3월의 대학가는 활력이 넘친다. 봄의 문턱을 넘어선 캠퍼스는 연한 초록색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여기저기 인생의 봄을 만끽하는 젊음의 웃음소리들이 산골 계곡 물소리처럼 청아하다. 싱그러운 봄의 아름다움은 겨울 그림자가 드리운 가을이 되어야 제대로 체감할 수 있는 것인지 올 봄 강의실 문을 들어서는 마음가짐이 마치 신입생처럼 설렌다. 복도를 지나가며 강의실 문틈으로 서로 다른 수많은 전공분야에 대한 강의와 토론의 열기가 새어나옴을 느낀다.문득 이 모든 학문의 전공들이 지향하는 것은 무엇일까란 물음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대학의 교훈은 답을
한국주민자치학회와 한국주민자치중앙회는 지난해(2023년) 여러 분야에 걸쳐 실로 많은 사업을 수행하였다. 그중에서 주목할 만한 사업은 주요 대학에 시범적으로 ‘주민자치’ 관련 과목을 설치하고 지원하는 것이었다.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을 비롯한 전국 5개 대학에 설치하여 운영한 ‘주민자치학’ 강의는 2023년 한국주민자치학회의 최고 업적 중의 하나로 평가한다. 주민자치 강의 어떻게 진행 되었나대학교 수준에 주민자치 관련 과목을 개설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학의 내부 사정이나 주민자치학의 생소함, 전공 커리큘럼 개발의 난이
첫 마음- 정채봉(1946-2001)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1년을 산다면,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한다면,사랑하는 사이가,처음 눈을 맞던 날의 떨림으로 계속된다면,첫 출근하는 날,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 일을 한다면,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개업 날의 첫 마음으로 손님을 언제고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기쁨으로 맞는다면,세례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나는 너,
한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다. 한 장 남은 탁상달력의 가벼움이 까닭모를 세모(歲暮)의 무거움으로 차갑게 다가온다. 섣달그믐이 가기 전에 뭔가 해야 할 일이라도 있는 지,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총총 발걸음이 분주하다. 나뭇잎을 남김없이 떨군 가로수들, 그 밑을 지나치는 이름 모를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듯 12월이면 그동안 잊고 지냈던 일상의 사소함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실존적’ 사소함에 문득 경이로움마저 느끼게 된다. 생철학자 니체가 말하는 행복한 순간이다. 니체는 “다행히도 인간이 행복해지는 데는 아주 적은 것으로도 충분
향약은 원래 향촌규약(鄕村規約)의 준말이다. 향약은 원칙적으로 조선시대 양반들의 향촌 자치와 이를 통해 일반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리학적 기본 질서 확립이라는 전제 아래 유교적 예절과 풍속을 향촌사회에 보급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아울러 각종 재난을 당했을 때 상부상조하는 규정을 두어 향촌사회의 안정을 꾀하였다.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이 예안에서 향약의 약문을 작성하였다. 퇴계향약은 그 약문에 의하면 농암(聾巖) 이현보(李賢寶, 1467~1555)의 영향을 받아 그가 살아생전에 이루
“이게 이효석의 메밀꽃이야? 별로 이쁘진 않네.” 메밀꽃을 바라보며 걷던 나의 등 뒤로 어느 여성이 일행에게 건네는 대화 내용이 귓전을 스친다.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녀의 말대로 메밀꽃은 ‘별로 이쁘진 않다’. 장미나 백합처럼 화려하거나 고고하지도 않으며 길가의 코스모스처럼 계절의 내음은 풍기지만 가을햇살에 활짝 핀 어느 집 정원의 썬데빌라(sundaville)처럼 길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지도 않는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별로’인 그 메밀꽃만의 아름다움을 포착해 세상에 알린 작가가 바로 이효석이다. 널리 알려
코로나19 사태가 한창일 때보다는 조금 덜한 듯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공공의료에 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올여름만 해도 요양병원 노조의 파업들이 이어지기도 했고, 정부가 의대 정원 증가 방침을 밝힌 가운데 지역의 여러 대학은 지역사회 의료 수요 충족을 위한 ‘공공의대’ 설립을 명분으로 의대 유치 경쟁이 뜨겁다.그러나 여전히 공공병원에 대한 지원은 늘지 않았고, 의료현장에서는 인력 부족을 호소하고 있다. 저출생 현상이 심해지면서 대도시 지역을 조금만 벗어나도 소아·청소년의 학과나 산부인과, 일반 외과와 같은 필수의료의 수요조차 충족
그 동안 제주도는 지역경제를 활성화한다는 명분으로 국내외적으로 자본을 유치하고 각종 개발 사업을 벌여왔다. 2000년대 들어 ‘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 제정 이후 관광레저산업을 본격적으로 육성해 왔으며 지하수를 개발하여 산업화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 도로를 신설·확장하여 섬 전체를 도로망으로 뒤덮기까지 했다. 최근에는 제2공항 사업 추진을 둘러싸고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 모든 일들이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일자리를 창출하여 제주도민들의 생활수준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말로 포장되어 왔다. 그런데 자본유치와 개발 사업을 중심으로
공동자원과 마을 관계공동자원은 생업과 삶에 매우 중요하다. 마을숲(송계), 마을공동어장, 마을공동목장 등 전통적으로 알려진 공동자원의 운영구조와 그 특징을 살펴보면 공동자원은 스스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마을공동체가 공동자원을 운용하고 관리하는 관습이나 규율을 만들어 지켜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마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기에 다양한 욕구들이 존재한다. 모든 이들의 욕구를 해결할 수도 없고, 어느 사안에 대해서는 이해관계가 상충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마을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약속과 규율을
“오월 어떤 아침 그날따라 내 창 밖에서는 유난히 뻐꾹새가 울어서 나는 뻐꾹새 소리에 잠을 깨면서 ‘아 뻐꾹새가 우는군. 그 애가 또 얼마나 슬퍼할까?’ 하고 나는 눈물이 고임을 깨달았다.” - 춘원 이광수(1936년) 「뻐꾸기와 그애」 춘원 이광수의 단편 「뻐꾸기와 그애」에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과 이별하는 조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절절하게 담겨있다. “이른 아침 참새들의 첫소리, 멧새의 예쁜 소리, 비둘기가 구슬프게 우는 소리”도 있지만 죽은 조카딸이 듣고 슬퍼하던 것은 뻐꾸기의 소리였다는 것을 덤덤하게 회상하고 있다(춘원
필자가 한국주민자치학회/한국주민자치중앙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지도 어언 1년이 훨씬 넘었다. 대학에서 지방자치론, 시민참여론, NGO론 등을 강의 한 바 있는 필자로서는 한국주민자치학회/한국주민자치중앙회에서 개최하는 세미나 및 각종 활동에 관하여 비상한 관심과 흥미를 갖게 되었고 나름대로 보람 있게 지난 1년을 보냈다.주민자치학회는 지난 한 해에만 50회가 넘는 세미나를 개최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면 주민자치 이슈를 둘러싼 제도, 정책, 행정, 국내외 사례소개는 물론이거니와 다분과적인 시각과 접근을 시도했다. 실로 놀라운 성과가 아
한국주민자치학회/중앙회가 개최하는 세미나에서 자주 듣는 질문은 ‘주민자치 왜 해야 하나요?’이다. 십 수 년 간 수백 번이나 세미나가 열리고, 주민자치 전문잡지와 유튜브로 중계되었음에도 참가자들은 ‘주민자치를 해야 하는 논거’를 확실하게 정립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특히 오랜 기간 주민자치위원회 활동해 온 주민자치위원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을 때는 의아하고 당황스러웠다.하지만 이는 주민자치 전문가나 운동가들에게도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질문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지내왔던 일을 새삼 되돌아 성찰하게 하는 계기
대나무가 서로 부딪치며 울리는 영롱한 소리, 영혼의 소리를 들어보셨나요? 밤벨 악기와 밤벨 주민올해 초 우연한 기회에 참가하게 된 어느 새해 모임에서 사회자가 한 질문에 좌중이 일순 조용해졌다. 이어진 프로그램, ‘밤벨로 하나 되는 시간’에서 처음 만난 밤벨(Bambell) 악기는 외모는 소박하지만 사회자의 표현대로 청아하고 영롱한 소리를 선사해주었다.평이해 보이는 전통 악기 하나로 주민으로서의 삶과 주민자치의 철학을 그토록 흥겹게 체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 주민자치교육의 장이기도 했다. 진행을 맡은 김창수 한국밤벨연구소 소장에 의
‘마을이 있는 풍경’은 ‘마을’의 속살을 가만가만 들여다보고 소곤소곤 소통하는 코너입니다. 더 없이 가깝고 밀착돼 있지만 적지 않은 이들에겐 대체로 멀기만 한 마을의 이야기를 때론 지직거리고 둔탁한 확성기로 때론 고성능 마이크의 ASMR로 들려드립니다.지인의 지인이 청주에 산다.지인의 지인을 알게 된 것은 지인이 샴푸와 치약,비누들의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려 자랑을 했기 때문이다. 나도 일 년 전부터 샴푸, 클렌징, 바디클렌저 등을 비누로 바꾸었고, 플라스틱을 하나라도 줄이겠다는 열의로 내친김에 치약도 바꾸어야 겠다 생각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걸/사랑받는 그순간보다 흐뭇한 건 없을 걸/…혼자선 알 수 없는 야릇한 기쁨/천만 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사랑해…굳이 연인 사이가 아니어도, 사랑의 언어는 언제 들어도 사랑스럽다. 오래 된 어느 노래 가사처럼 “천만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이다. 가까운 남녀 간에 가볍게 던지는 인사치레는 물론 전화로 들려오는 상담원의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란 비즈니스의 ‘사랑의 언어’마저 딱히 듣기 싫지는 않다. 사랑의 말을 듣는 사람의 느낌이 그렇다면, 반대로 사랑을 속삭이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 또
현대사회에서는 자치 기반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존의 제도 중심 자치개혁 방식으로는 지방자치의 민주성, 효과성을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일본의 경우만 보더라도 근 반세기 동안 지방분권 제도 개선을 통한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그 노력에 비해 성과는 미미하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는 일본의 지방자치 개혁이 그릇된 방향으로 정립되고 추진되었다기보다는 변화하는 자치 기반을 제도개혁이 따라잡지 못한데 기인한다. 이런 점에서 일본이든 한국이든 현재와 같은 점진적이고 정략적인 제도적 분권 방식으로는 지방의
신성한 차별한국의 헌법은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 등에 의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실정법으로서의 차별금지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처음 나온 것은 1997년의 일이다. 그러나 근 25년이 지난 2022년 현재까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은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차별받지 않아야 할 대상의 범주 가운데 하나로 ‘성 소수자’가 포함돼 있다는 것을 종교계 일부에서 문제 삼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보수 성향의 개신교 단체들의 반대 활동은 지속적이고 맹렬하다. 이들은
미디어, 권력의 지형을 만들다영상매체(TV)가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매일 우리 안방에 전해주기 시작했던 것은 1960년대 초였다. 주로 신문과 라디오가 했던 역할을 그때부터는 TV가 대신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의지적 노력이 있을 때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신문과 라디오와 달리, TV는 특별한 노력 없이도 손쉽게 현장을 있는 그대로를 우리에게 안겨주기 시작한 것이다.TV의 등장은 유럽과 미국 사회를 근본에서 바꿔놓기 시작했다. 물론 2차대전, 한국전쟁, 미·소 냉전으로 이어지면서 TV가 선전매체로 활용되기도 했다. 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