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직 한국자치학회 회장.
전상직 한국자치학회 회장.

한국의 주민자치는 엄청난 질곡의 과정을 겪었고, 지금도 질곡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그러나 조선의 향촌자치 변천 과정에서 우리는 향촌자치에서 주민자치로, 양반 지배에서 주민자치로의 과정을 모두 살펴볼 수 있다.

향약은 훈구파에 맞서서 사림파가 향촌의 장악을 위해 도입한 것으로 처음부터 주민자치가 아니라, 사림파의 ‘향촌 지배’로서 ‘향촌 자치’도 ‘주민 자치’도 아니었다. 향약 이전에는 국가의 관료인 수령이 통치하던 지방에 재지사족이 향약으로 지배자의 지위를 확보해 주민(常賤)을 지배했다.

향약은 덕업상권(德業相勸)·과실상규(過失相規)·예속상교(禮俗相交)·환난상휼(患難相恤)의 강령으로 이뤄지며, 강령의 시행 주체는 상(相)으로 ‘상’은 주민들간의 상호성과 민주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조선의 향약은 말로는 상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재지사족들이 향약의 주인이 되고, 주민은 향규에 예속돼 지배를 받고 향약으로 교화 대상이 됐다. 주민(常賤)은 수령의 통치에 양반의 지배를 추가로 받게 돼 결국은 수령과 사족의 이중지배 하에 놓이게됐다.

향약의문제점과율곡의통렬한지적

향약의 문제점과 율곡의 통렬한 지적

율곡은 향약의 문제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지적했다. 첫째,“남전여씨 향약은 강령이 바르고 조항이 상세하니 이것은 동지와 선비들이 서로 약속해 예를 강구하는 것이지 널리 백성에게 시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했다. 둘째,“토호(土豪)들이 향약을 핑계로 백성들에게 괴로움을 끼칠 것이 뻔하다. 이것을 누가 단속할 것인가? 만약에 향약을 행하게 되면 백성들은 반드시 더욱 곤란하게 될 것이다”고 했다.

율곡의 지적은 지금도 유효하다. 첫째,주민자치회에서 주민을 빼버린 오류다. 향약에서 향회를 구성하는 것은 재지사족이지 주민이 아니다. 주민은 향회의 구성원도 되지 못하면서 향약의 구속을 받았다. 지금도 주민은 주민자치회 회원이 될 수 없고, 주민자치회 영향은 받아야 한다. 공적인 행정과 재정이 투입되는 주민자치회에서 주민을 빼는 것은 적어도 임진왜란이전으로 후퇴하는 것이다.

둘째,주민들이 할수없는 사업을 주민자치사업이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생업이 없는 시민운동가들이 할수있는 정도의 일들을 주민들에게 자치로 임무를 부과하는 것은 주민자치에 역행하는 것이다.

서울형 주민자치회 문제점과 제안

서울형 주민자치회는 임진왜란 이전의 향약으로 밖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악한 정책이다.

주민자치회에서 주민을 고의로 빼 버리고, 구(區)에는 지원단, 동(洞)에는 지원관을 둬서 주민자치회가 할 일과 산을 가져가는 것은 조선의 향약에서 양반들이 하는 카르텔과 다를 바가 없다. 향약의향회는 재지사족들로만 구성됐고, 주민들은 향회의 지배·교화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에는 전란으로 향촌이 파괴돼 재지사족(상계)의 힘만으로 복구가 어렵게 되자 상민과 천민(하계)을 향촌자치에 참여시켰다. 향촌에서 사족·상민·천민이 함께하는 상하합계가 탄생한 것이다. 상하합계에서 주민들은 처음으로 향촌구성원으로 지위를 얻게 된다. 그런데 1999년 주민자치위원회, 2013년 시범실시 주민자치회, 2015년서울형 주민자치회, 2018년 시범실시 표준조례는 주민을 위한 주민자치회가 못되도록 막고 있다.

상하합계에서 사족은 약무(約務)를 담당하고, 향민은 향무(鄕務)를 담당했으나 사족들의 무궤도한 침탈이 있었으며, 사족의 향촌지배가 많은 부작용을 만들고, 주민들이 노골적으로 반발했다. 지금의 주민자치 상황에서 살펴보면, 주민자치 중간지원조직이 마치 조선의 양반인양 행세한다. 그런 행세는 주민들로부터 배척당하기 마련이지만, 불행히도 주민도 없는 주민자치회라서 비판할 주민도 없다. 이 지점이 주민자치에 사명을 가진 사람으로서 분노할 수밖에 없다. 상하 합계에서 문제가 지속되자 사족에서 관료로 향촌을 지배하는 방법을 바꾼다. 주현향약이 등장해 관료가 전면에 나선 것이다. 이때 율곡의 향약과 퇴계의 향약을 시행한다. 주현향약은 상하민 모두 구성원이 돼 의무로 참여해야 했다.

사족의 횡포가 심해지자 향촌지배권을 국가가 회수했다. 시민운동가들에 의한 주민자치 중간지원조직·교육조직·사업조직은 곧바로 주민자치에 뜻있는 사람들의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국가가 회수해서 주민에게 부여해야 한다. 조선의 향약은 촌계로서 완성된다. 관료와 사족이 빠지고 주민들만이 생활세계에서 구축하는‘촌계’는 두레를 잉태하고 농민혁명의 동력이 됐다. 이제 주민들의 자치동력으로 주민자치회를 비정부조직(NGO)으로, 비영리조직(NPO)으로, 비사적조직(NIO)으로 만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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