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 답이 있다.”
기업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이 말처럼,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지름길은 먼저 현장을 살피는 것이다. 주
민자치도 마찬가지다. 전국 18곳 주민자치(위원)회를 직접 찾아 다양한 운영 실태와 사례를 파악해 『주민자치 잘 될 거
야』란 책을 펴낸 박진호 전 청주시 청원구청 세무과장을 만나 주민자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

「주민자치 잘 될 거야」 저자 박진호
「주민자치 잘 될 거야」 저자 박진호

전국 18개 주민자치회 탐방…
“재정·교육 뒷받침 절실”

행정복지센터와 주민자치센터가 어떻게 다른지도 모를 만큼 ‘주민자치 문외한’이던 박진호(60) 전 청주시 청원구청 세무과장은 2016년부터 청주시 상당구 용암1동장, 흥덕구 봉명2송정 동장에 잇따라 임명되면서 주민자치와 인연을 맺게 됐다.

“읍·면·동장과 주민자치위원장을 대상으로 한 워크숍에서 어떤 분이 제게 ‘동장이 주민자치위원회의 발목을 잡는다’고 타박을 하시더군요. 그 한 마디에 도대체 주민자치란 무엇이고, 어떤 것이 진정한 주민자치인지 궁금증을 갖게 됐습니다.”

공직 생활 동안 전국 최초로 체납세금 ARS납부시스템과 취·등록세 자동입력 프로그램(SOW)을 개발할 정도로 저돌적인 업무 추진력을 보여 온 그는 당장 주민자치위원회의 문을 두드렸다. 2018년부터 청주시를 비롯해 서울시 은평구 역촌동,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충북 진천군 진천읍, 충남 당진시 신평면, 부산시 동래구 안락2동, 광주시 북구 임동 등 전국 12개 지역 18개 주민자치(위원)회를 찾아가는 ‘선진지 견학’에 나선 것. 공무원 신분이었기에 주민자치 현장을 좀 더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었던 귀한 경험이었다.

1년간 직접 발로 뛰며 모은 주민자치 모범 사례들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어 지난해 『주민자치 잘 될 거야』란 책도 펴냈다. 책에는 우리나라 주민자치위원회 도입 과정과 일본·대만 등 외국의 사례, 18개 주민자치(위원)회의 운영 노하우 등이 담겨 있다.

전국의 주민자치 현장을 들여다본 그는 수도권·중앙정부 중심주의가 여전히 견고하고 주민자치에 대한 인식은 지나치게 낮은 현실을 절감했다. 주민들이 자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다 보니 주민자치위원 모집부터 난항을 겪어 기존 주민자치위원과의 친분으로 가입하거나 타 직능단체를 겸직함으로써 주민 대표성이 부족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또 주민자치위원 임기가 짧아 업무 연속성이 떨어지고 교육 기회도 부족해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채 임기를 마친다는 어려움도 알게 됐다.

행정기관에 대한 높은 의존율도 실감했다. 사무실이나 상근인력을 갖추지 못한 일부 주민자치위원회는 회의실 준비와 서류 작성 등에 행정기관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또 공무원들이 주민자치 업무를 ‘한직’으로 인식해 담당이 자주 바뀌다 보니 전문성을 갖추고 장기적 사업을 계획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었다.

박진호 씨는 “주민자치위원장을 읍·면·동장이 위촉 혹은 해촉한다고 해서 직제 상 아래라거나 예속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동장은 마을의 행정을 책임지고, 주민자치위원장은 주민들이 마을의 일을 스스로 논의하고 해결하도록 돕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아무래도 조직과 재정을 갖춘 행정기관에 비해 주민자치위원회가 더디고 미숙하겠지만 좀 더 관심을 갖고 지원하면서 지역 발전을 위한 파트너십을 구축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주민자치위원회가 주민자치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도 지적했다. 특히 위원을 ‘추첨’으로 선출하는 방식에 의문을 표했다. 박진호 씨는 “공평하게 기회를 부여한다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현재와 같은 공개추첨 방식은 지원자의 자질과 성품에 따라 파당을 짓는다거나 사업·정치적으로 악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전 교육을 강화하거나 자질을 검증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한편, 주민자치에 관심과 애정을 가진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와 함께 “당진시 신평면 주민자치위원회는 회의실에 주민자치위원들의 출결사항을 빨강(회의), 파랑(행사), 노랑(교육) 스티커로 표시해 참석여부를 한눈에 알 수 있게 하고 있다”며 “위원들의 참여를 활성화할 수 있는 방안으로 참고 해볼만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주민자치(위원)회가 갖는 법적·제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희망도 발견했다.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며 ‘주민에 의한 자치’를 향해한 걸음씩 나아가는 사례들이다. 청주시 주민자치위원회들은 ‘로고젝터 설치를 통한 밤길 안전귀가 서비스’, 어려운 이웃들이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도깨비 뒤주’, 경력단절 여성의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는 ‘희망 봉제학교’, 지역 농가를 돕기 위한 ‘농산물 직거래 장터’ 같은 참신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또, 천안시 동남구 원성1동은 ‘안심마을 만들기 프로젝트’를 통해 심폐소생술 및 자동 심장충격기 사용법 교육, 초등학교 주변 차선 규제봉과 분리봉 설치, 빈집을 철거해 텃밭 만들기 등을 진행해 큰 호응을 얻었다. 거창군 북상면 주민자치센터 프로그램 일환으로 2009년 창단된 ‘농부합창단’도 눈길을 끈다. 이들은 우수한 실력으로 여러 대회에서 수상한 것은 물론 ‘노래하는 농부’를 브랜드화 해 2013년 특허청 상표등록도 마쳤다.

“주민자치 우수사례로 손꼽히는 곳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동장과 주민자치위원장이 서로 의논하며 행정과 자치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수시로 모여 차를 마시고 회의할 수 있는 주민자치 사무실이 마련되어 있고 간사(사무국장)가 있어 체계적인 업무가 가능합니다. 셋째, 미래를 기획하고 실천하는 능력을 갖춘 리더가 주민자치위원들과 계획과 목표를 항상 공유합니다.”

물론 사무실이나 간사도 두지 못한 열악한 상황에서 위원장의 열정과 노력만으로 주민자치의 싹을 틔워가는 곳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주민자치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 기본적 인프라를 갖추지 않고선 지속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때문에 주민자치가 지금보다 발전하기 위해선 재정과 교육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개인균등할 주민세의 일부를 주민자치회에 지원하거나 주민들이 직접 공모사업을 신청해 예산을 충당하는 등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에 ‘외부적 충격’도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중앙정부가 지방자치단체에 지원하는 보통교부세에 주민자치 관련 항목을 신설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인센티브 방식으로, 3~5년 후에는 주민자치가 활성화 되지 않는 곳에 패널티를 적용하는 방안을 도입한다면 풀뿌리 민주주의 발전을 견인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교육을 통한 지역 인재 육성과 네트워크 형성의 필요성도 짚었다. 그는 “주민자치 교육을 한번도 받은 적이 없다”는 한 주민자치위원의 고백을 전하며 “오히려 주민들은 타성에 젖어 지역의 문제나 강점을 분석하기 어려울 수 있다. 전문 강사가 객관적이고 실질적인 사례 교육을 진행한다면 주민들이 직접 마을의 미래를 설계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올해처럼 감염증 확산 우려로 직접 대면교육이 어려운 상황에서는 유튜브 등을 통한 온라인 교육을 적극 도입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주민자치가 시작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주민자치가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행정기관과 주민자치회가 다양한 해법을 모색하고 있지만 장기간 누적된 과제들이 단시간에 해소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열심히 현장을 뛰고 있는 주민자치위원님들이 계시기에 주민자치가 한 걸음씩 발전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주민자치의 궁극적 목표는 ‘행복한 삶’입니다. 주민자치회가 주민들의 행복을 꾸려가는 전진기지가 될 수 있도록 저도 미력 하나마 힘을 보태겠습니다.”

박진호

1960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났다. 충북대학교 대학원에서 2015년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고 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세무 전문 공무원으로 2006년 전국 최초로 체납세금 ARS(자동응답서비스) 납부시스템, 2009년 취·등록세 자동입력프로그램(SOW)을 개발하는 등 창의적 시책을 추진해 2015년 민원봉사대상을 수상했다. 2016년부터 청주시 상당구 용암1동장, 흥덕구 봉명2송정동장, 청원구청 세무과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주민자치 전문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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