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사이야기] ‘형제는 청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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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이야기] ‘형제는 청렴했다’
  • 이도남 건국대학교 사학과 강사
  • 승인 2020.10.09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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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언·조사수, 임호신·임보신 형제

같은 피를 나눈 형제는 성격도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태어난 순서에 따라 형제들의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맏이는 책임감이 강하고 결단력이 있지만, 막내는 반항적이고 모험심이 강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형제의 성격 차이에 대한 생각은 고정관념일 뿐이다. 최근의 연구 결과를 보면 이와 같은 통념은 허구에 불과하다.

2019년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와 스페인 발레아릭 아일랜드 대학교 연구진은 세 가지 데이터를 분석해 보았다. 첫 번째 분석 데이터는 탐험가나 혁명가로 족적을 남긴 위인 200명이었다.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산에 올랐던 에드먼드 힐러리(삼 남매 중 둘째), 쿠바 혁명의 지도자 체 게바라(오 남매 중 맏이), 전투적 사회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오 남매 중 막내) 등을 분석한 결과, 반항적이거나 모험심이 강해서 위험을 무릅쓰는 성향은 태어난 순서와 무관한 것으로 나타났다.

두 번째 분석은 ‘바젤-베를린 위험 연구’의 평가 방식에 따라 1만 5천 명을 대상으로 실험하고 인터뷰했다. 예컨대 10달러를 그냥 받을 것인가 아니면 승률 10%로 100달러를 받을 수 있는 게임에 베팅할 것인가를 묻는 식이었다. 역시 태어난 순서와 위험을 감수하는 성향은 무관했다. 독일의 1만 1천 가구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왔다.

2015년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교 연구진이 미국, 영국, 독일의 2만 명을 대상으로 ▲개방성, ▲성실성, ▲외향성, ▲쾌활함, ▲신경질적 성향 등 ‘다섯 가지 기질’에 관해 연구한 결과 역시 형제간 출생 순서와 무관한 것으로 나왔다.

위의 연구 결과처럼 형제는 성격 차이가 있다는 통념적인 생각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과 경험의 차이, 그리고 환경적 요소에 의해 형제간에 성격 차이가 나타날 수는 있겠지만 대체로 같은 피를 나눈 형제들은 비슷한 성향을 가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아는 청렴결백한 관리, 즉 청백리淸白吏는 조선시대에 218명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그런 청백리 중에는 형제 모두 청백리에 녹선된 경우가 존재한다. 바로 형제가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조선 전기 조언수·조사수 형제와 임호신·임보신 형제가 대표적인 청백리 형제이다.

청렴결백한 관리, 청백리
청백리淸白吏란 조선시대 선정을 위해 청렴결백한 관리를 양성하고 장려할 목적으로 실시한 관리 표창제도, 또는 염근리廉謹吏(청렴하고 근면한 관리)와 청백리에 선정된 사람을 일컫는다.

청백리의 제도화가 명확하게 드러난 것은 조선시대였다. 그러나 청백리가 언제 제도화됐는지와 선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그렇지만 태조대 안성安省 등 5인을 청백리에 녹선한 이래로 이러한 기록들이 후대에도 계속 확인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시기엔가 제도화됐음을 추정할 수 있다.

1514년(중종 9) ‘청백리에 녹선된 자의 행적을 보면 시종始終이 한결같은 자가 드물다’고 하고, 1552년(명종 7)에는 생존시에 청백리로 선발된 자를 염근리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 대에는 청백리의 선발 절차를 구체적으로 규정했다.

조선왕조는 개국과 함께 나라를 유지하고 사습(士習 : 선비들의 풍습)을 일신하고 민풍民風을 교화하기 위해 『관자管子』에 적기된 예禮·의義·염廉·치恥의 사유四維, 특히 염·치를 사대부가 지켜야 할 규범으로 권장했다. 이를 볼 때 청백리제는 조선 개국 초기부터 실시되고, 중종 대 정비됐으며, 선조 대 선발 절차의 규정 등이 보완되면서 정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전시기를 통해 청백리에 녹선된 수는 명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명단을 기록하고 있는 『전고대방典故大方』에는 218명, 경종·정조·순조 대가 제외된 『청선고淸選考』에는 186명이 수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200여 명 내외가 선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고대방典故大方』에 실려 있는 왕대별 인원을 보면 태조 대 5인을 시작으로 태종(8인)·세종(15인)·세조(7인)·성종(20인)·중종(35인)·명종(45인)·선조(27인)·인조(13인)·숙종(22인)·경종(6인)·영조(9인)·정조(2인)·순조 대(4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218인이 녹선됐지만, 이외의 왕대에는 녹선 기록이 없다.

청백리제의 운영에 있어 조선 전기에는 녹선자가 국가로부터 예우를 받지 못했지만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관리에게 염·치를 일깨우고 탐관오리에게는 자극을 주는 정화 기능을 어느 정도 발휘했다.

‘형만한 아우 없다’ 조언수·조사수 형제
조선 전기 대표적인 형제 청백리를 들자면 조언수·조사수 형제를 빼고는 말할 수 없다. 조언수趙彦秀(1497~1574)와 조사수趙士秀(1502~1558)는 세종 때 이름난 재상이었던 조말생趙末生의 5대손으로 모두 판서 반열에 올랐던 문신이다.

형인 조언수는 순박하고 인정이 두터우며 청렴하고 검소하며 남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일삼지 않았는데, 위인의 풍채가 아름다웠다고 전한다. 세 임금을 모시면서 오래도록 관직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물려받은 집 한 칸을 겨우 지켰고, 죽은 뒤에는 상을 치를 돈이 없어 부의로 겨우 염습했을 정도로 청백했다 한다. 서경덕徐敬德과는 동년진사同年進士로, 조언수의 경학經學을 매우 높이 여겨 함께 진사가 된 것을 늘 자랑으로 생각했다. 78세에 이르러 병환이 잦아지자 가난한 살림살이를 둘러보며 “이만하면 내 족히 일생을 마칠 만하다”고 했다 하니 그 검소함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우인 조사수는 형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청백리였다. 중종 시절 이야기다. 어느 날 중종은 조정 신하를 모두 거느리고 청백리를 뽑는 행사를 거행했다. 중종은 대궐 마당에 예문, 청문, 탁문이라는 이름의 3문을 세워놓고 자신이 해당하는 문으로 지나가도록 했다. 예문은 보통의 문이요 청문은 깨끗한 문, 탁문은 더러운 문이다. 즉 자신이 판단해 본인이 청백리라고 할 수 있으면 청문, 탐관오리라고 생각되면 탁문, 이도 저도 아니면 예문을 통과하라는 것이었다.

왕과 모든 관리가 있는 앞에서 깨끗하다고 청문을 지나갈 사람도 없었고 스스로 더럽다고 탁문을 지나갈 사람도 없었기에 모두 예문을 지나갔다. 그런데 조사수 혼자만 당당하게 청문을 통과했고 이에 대해 만조백관이 모두 이의가 없었다고 한다.

일찍이 대사헌(大司憲 : 조선시대 정사를 논하고 백관을 감찰해 기강을 진작하는 등의 업무를 맡았던 사헌부의 장관으로 종2품 벼슬)으로 있을 때는 임금 앞에서 경연經筵을 하는 자리에서, 영의정 심연원沈連源(1491~1558)에게 “백성들의 집이 법에 맞지 않게 크거나 호화로운데, 영의정이 첩의 집을 호화롭게 지었으니 영의정이 법을 어긴 탓에 백성들도 어기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영의정은 식은땀을 흘리다가 물러났는데, 그 후 첩의 집을 멀리했다. 그러나 영의정 심연원은 원한을 품지 않고 뒷날 이조판서 자리에 조사수를 천거했다. 심연원이라는 정승도 대단한 인물에는 틀림없지만 고위 관료의 잘못된 점을 직접 면전에서 지적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강직한 성품이었던 조사수는 정말 청백리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사수는 명종 1년(1546) 4월 6일에 청백리로 선정되고 승품陞品됐는데, 이날 무덤의 비석에 한 글자도 새기지 않은 백비白碑로 유명한 박수량朴守良과 김순金洵도 청백리로 선발됐다. 4일 후인 4월 10일 대사간 조사수가 자신을 청백리에서 삭제할 것을 주청했다.

“소신의 천성이 본래 잔약하고 어리석어서 남에게 무엇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남들이 혹시 주는 자가 있으면 받아서 먹기도 했으니 심히 청렴하지 못했습니다[小臣, 性本孱愚, 未嘗求於人, 人或有餽者, 則受而食之, 不廉甚矣]. 성조聖朝에서 관용하시어 탐리貪吏를 면한 것만으로도 만족한데 잘못 실정에 지나친 이름을 얻고 보니, 이는 신이 하늘을 속이는 죄를 받을 뿐만 아니라 청명한 정치를 지향하는 새 정치에도 누가 될 것이 두려우며 몸 둘 바를 몰라 저도 모르게 이마에 땀이 맺히고 등에도 땀이 흐릅니다. 청백리의 이름을 삭제하시고 아울러 품계 승진의 명도 거두어 주소서[請去淸吏之名, 竝收不次之命].”

이렇게 자신이 청백리 녹에 올려진 것을 삭제해 달라고 임금에게 아뢰자, 당시 임금이었던 명종은 “청백리란 예부터 드문 것이다. 경의 행실은 온 조정이 잘 알기 때문에 천거한 것이니 사양하지 말라”고 했다. 조사수가 다시 “소신이 되풀이 생각해 보아도 저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겠습니다. 이러한 몸이 대사간이 됐으니 더욱 뻔뻔스럽게 그대로 행공行公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의 간청을 따르소서”라고 했다 그러나 명종은 “경의 청렴한 덕은 어느 한 사람이 천거한 것이 아니라 바로 조정이 다 함께 천거한 것이니 사양하지 말라”고 했다. 이와 같이 조사수는 청백리 선정과 승품을 취소해달라고 진언한 대단한 인물이다.

훗날 많은 이가 조언수·조사수 형제를 만세에 빛날 청백리 형제라고 부르며 칭송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분수를 알아 만족할 줄 알았던 염근리廉謹吏, 임호신·임보신 형제
조언수·조사수 형제와 더불어 조선 전기 대표적인 형제 청백리를 꼽자면 임호신·임보신 형제를 들 수 있다. 두 형제는 염근리(생전에 청백리로 녹선된 사람)로 녹선돼 그 이름이 더욱 유명하다.

두 형제의 본관인 풍천豊川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구을현仇乙縣이었는데 고려高麗 초기에 풍주豊州로 고쳤고 고려 성종조에 풍천도호부豊川都護府가 있던 고려 초기의 오래된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송화군을 말한다.

우선 형인 임호신任虎臣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중종 때 척신으로 간흉에 속했던 김안로의 미움을 사서 황간현감黃澗縣監으로 외직에 나갔다가 김안로 일파가 조정에서 쫓겨난 다음에야 중앙으로 다시 돌아와서 관료 생활을 했다.

임호신은 꾸밈새가 없이 소탈하고 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 그는 황간현감으로 외직에 나갈 때도 불만이나 불평을 조금도 나타내지 않고 태연히 부임했다. 그리고 김안로 일파가 쫓겨나고 다시 조정에 돌아온 다음에도 항상 중용을 지켜 자신을 해코지한 사람들에게도 원한을 떠나서 넓은 마음으로 관용했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이러한 그의 태도를 타고난 천성의 소치(所致 : 어떤 까닭으로 생긴 일)라고 했다.

임호신이 사헌부 집의로 있을 당시 이무강李無彊이라는 관원을 탄핵한 일이 있었다. 뒤에 그 사람이 다시 득세를 한 다음에 우연히 술자리에서 임호신과 만나게 됐다. 이무강은 다짜고짜로 “몇 년 전에 사헌부에서 나를 탄핵했는데, 그때 누가 이 일을 주동했소?”라고 물었다. 임호신은 태연히 “그 일은 바로 내가 주관했소”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도 이무강은 부끄러워할 줄을 몰랐을 뿐 아니라, 임호신에게 화를 내지도 못했다. 임호신의 처사가 너무나 깔끔하고 바르기 때문이었다.

임호신은 1545년(명종 즉위년) 우부승지에 경연참찬관을 겸하고, 1546년 우승지·도승지·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면서 공명정대함과 간관을 물리치지 말아야 함을 간언해 나갔는데, 이는 임호신 스스로가 청렴하고 바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명종실록』 명종 1년 3월 10일 정묘조 기사에 의하면, 석강에 참여한 임호신이 임금에게 간관의 말을 따를 것을 아뢰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도道가 있는 임금은 스스로 천하를 잃는 데 이르지 않습니다. 비록 도가 없는 임금이라도 직간直諫하는 신하가 있으면 나라를 잃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허물이 없을 수 없으니, 반드시 직간하는 신하가 있어서 간해 바로잡은 뒤에야 비로소 고쳐서 허물이 없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임금이 만약 자기 자신이 성인이라 자처하면서 간언을 듣지 않는다면 뇌정雷霆같은 위엄 아래서 누가 직언을 하려 들 것입니까? 위망危亡한 화禍가 눈앞에 닥쳐도 구원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누구나 다 간쟁했기 때문에 간관諫官이라는 명칭이 따로 없었으나 후세에 와서는 간관에게 책임을 지우고 할 말을 다 하게 한 것이니, 상께서도 간관의 직언이 잠시도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꼭 생각하시고 물이 흐르듯이 이에 따르셔야 합니다.”

깔끔하고 바르며, 공명정대한 임호신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임호신은 특히 ‘청백리’로서의 직함보다 그 내면의 본모습에 충실하려 애썼다. ‘염근리(생전에 청백리로 녹선된 사람)’로 천거될 때부터 자랑스러워하기는커녕 “내 어찌 염근廉謹 두 글자를 더럽힘이 없겠는가” 하고 서글퍼하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그의 겸손한 태도 때문에 말년은 지극히 곤궁했다.

임호신이 병석에 누워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그와 가장 가까이 지내던 홍섬洪暹이 문병을 왔다. 그리고는 임호신의 병세가 위독함을 알고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임호신은 당시唐詩 한 권을 꺼내서 홍섬에게 주고는 “홍공洪公, 나를 위해서 시詩 한 수를 멋들어지게 불러주오”하고 웃어 보였다. 공이 작고하자 그와 함께 과거에 오르고 또 같이 청백리에 녹선됐던 조사수(趙士秀 : 좌참찬 역임)는 “어떻게 다시 무백(武伯 : 임호신의 자)과 같이 정직하고 담백한 사람을 볼 수 있겠는가?”하고 크게 슬퍼했다.

임호신은 관직에 나가서 공무를 집행함에 있어서 사심을 버리고 정성을 다해 봉사했다. 그리고 그는 차고 넘치는 ‘성만盛滿을 경계해 항상 청렴하고 검소하게 살았다. 그래서 임호신은 명종 7년(1552)에 그의 아우 임보신任輔臣과 함께 염근리廉謹吏, 즉 청백리로 녹선됐다.

임보신 또한 형인 임호신과 같이 용모가 단정하고 엄숙하며 말과 웃음이 적었고 몸가짐을 간결하게 해서 가업家業이 쓸쓸했으며 아름다운 천성과 올바른 의지가 시종 변함이 없었다.

모든 이들이 형제가 동시에 청백리로 녹선된 것을 더없는 영광이라고 해 부러워했다. 그러나 임호신은 근심스러운 모습으로 “어떻게 하면 이 영광을 욕되게 하지 않을까”하고 더욱 행동을 삼갔다 한다. 명종은 그의 부음을 듣고 “훌륭한 재상을 아깝게 잃었다”고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이도남 건국대학교 사학과 강사
이도남 건국대학교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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