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위대하게 지속하자’는 카피문구를 단 purge 시리즈 3편 Election Year의 포스터
‘미국을 위대하게 지속하자’는 카피문구를 단 purge 시리즈 3편 Election Year의 포스터

선거라는 축제의 효용성
미국 대선이 다가오면서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미국이 전 세계 정치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워낙 크다 보니, 남의 나라 일로 치부하는 국가는 없는 것 같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가 극단적이고, 코로나 사태와 흑인 인권 시위, 우편 투표 문제까지 겹쳐있어, 투표 결과에 대해 과거 어느 선거보다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즐겁지만은 않은 호기심이다. 미국은 경찰의 과잉진압과 총기 살해, 흑인 인권운동 관련 시위 등으로 몇 달째 폭력적인 분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우편 투표와 관련해 선거 결과 승복 여부라는 근본적 문제까지 도마 위에 올랐다. 선거 제도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얘기다. 논의 그 자체만으로도 불경한 일이다. 민주주의의 제도적 약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아 더욱 불편하다.

누군가는 권력을 가지게 돼 있다. 과정과 결과에의 승복이 깔끔하기를 바라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 시민의 당연한 바람이다. 현대 민주주의의 선거 제도는 권력 다툼의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 발명한 계몽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후유증을 남기며 권력을 잡는 것은 그 자체로 반칙이며, 선거 제도 기반의 대의제 민주주의를 의미 없게 만드는 배신행위다.

조물주가 점지한 권력자라는 것은 없다. 권력을 가진 자가 있고 도전자가 있다. 방어를 하면 권력을 지키고, 실패하면 도전자가 새로운 권력자가 되는 이치다. 그래서 권력을 놓고 늘 다툼이 있었다. 인류의 역사가 선택한 권력투쟁의 가장 흔한 방식은 폭력이었다. 정적들을 모두 죽이거나 법의 이름으로 제거하면, 내가 왕이 되거나 허수아비 왕을 내세워 권력을 장악하는 구조였다. 저마다 자신이 권력을 잡아야만 하는 필연적 이유를 가지고 있다. 주로 정의와 관련이 있다. 선왕의 적통이라거나, 부덕한 권력을 대체한다는 등이다.

그러나 권력 다툼이 있을 때마다 칼부림이나 봉기와 혁명으로 권력의 향방을 결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비용이 많이 드는 방식이다. 권력 추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민초들이 권력자의 욕망을 위해 희생되기도 한다. 특정인이 권력을 잡자고 나라의 질서가 무너지고 백성의 살림이 피폐해지는 일도 허다했다. 민주주의가 비록 시끌벅적한 데다 장기집권이 기본인 전제 군주정에 비해 잦은 권력 이양으로 편 가르기를 유도하는 경향이 있지만, 인류가 개발한 최저 비용 최고 효율의 정권 이양 방식인 것은 틀림없다.

권력은 누구나 갖고 싶으니까, 서로 죽이지 말고 선거라는 게임을 통해 누가 권력을 가질 것인가 정하자는 것이다. 획기적이다. 이제 권력 이양 과정에서 서로 죽고 죽일 필요가 없다. 백성도 선거 개표 방송을 통해 권력의 향방을 확인한 다음 일터에서 생업에 종사하면 된다. 출근길에 간밤의 정변으로 객사한 널브러진 시신을 볼 일은 없다.

게임은 룰을 따르고 지키는 것이 생명이다. 1루 주자는 2루로 뛰어야지, 갑자기 홈으로 쇄도해 홈 플레이트를 밟는다고 점수가 인정되지는 않는다. 풀하우스 패를 받아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돈을 다 걸고 배팅했는데 상대방 패가 더 높은 포카드라면, 건 돈을 다 주고 망하는 수밖에 없다. 규칙이 그렇다. 미국 선거의 게임 규칙은 희한해서, 심지어 더 적은 표를 받은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 조지 W. 부시도 그랬고, 트럼프도 힐러리 클린턴보다 더 적은 표를 받았지만 주 단위 승자독식이라는 게임의 규칙 덕분에 대통령이 됐다.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에 의한 권력 이양은 정례적 축제여야 한다. 본질은 권력투쟁이지만, 축제를 가장해야만 한다. 이 약속이 깨지면 폭력 이외에 마땅한 대안이 없다. 내가 즐겁지 않아도 축제는 계속돼야 한다. 위선적이라 하더라도 상관없다. 받아들이기 힘들어도 패자는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는 제스처를 취해야 한다. 승자는 패자를 조롱하고 능멸하고 싶겠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위로의 제스처를 취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그래서 용인된 만큼의 위선을 통해 폭력을 억누르는 제도다. 폭력은 나쁘니까 그것을 억누르는 것은 정당하다. 선거라는 축제가 위선을 합리화하고 숫자를 동원해 폭력을 무마하는 수단이 된다. 영화 <퍼지>(purge)는 축제가 폭력의 수단이 된 상황을 가정해, 폭력과 정치 권력의 관계를 극단적으로 파고드는 스릴러 액션이다. 저예산 영화인데 흥행에 성공해서 3부작 프랜차이즈가 됐다. 영화사가 톡톡히 재미를 본 모양인지, 외전도 만들어졌고 내년에 개봉할 신작도 제작 중이다.

영화 <퍼지> 시리즈와 폭력 축제
2013년 개봉한 첫 번째 영화는 미국 경제가 완전히 붕괴했다는 설정에서 시작된다. 2008년 경제 불황의 후유증으로 힘겹던 시기다. 당시 이런 얘기가 여러 매체를 통해 떠돌아다녔다. 미국이 패권을 쥐고 세계를 주도하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는 이제 끝났으며, 중국이 몇 년 안에 미국을 추월해 경제와 군사 등 모든 면에서 세계 1등이 될 거라는 식의 추측이다. 영화는 당시 우울한 상황과 몰락에 대한 미국인의 우려를 극단까지 몰고 가서 아예 경제적으로 망해버린 미국을 상정한다.

일자리가 귀해지고 실업률이 치솟으면 할 일이 없는 젊은이들이 대낮부터 추리닝 바람으로 길거리에 몰려나오게 된다. 즉시 폭력적 상황이 전개된다. 싸움질과 마약 거래가 여기저기서 끊이지 않는다. 일자리가 없으니 폭력이 개인적 경제난 해소의 유일한 수단이 된다. 갈취와 편취, 강도와 도둑질이 성행한다. 행인은 돈을 빼앗기고, 가게가 털리는 일이 일상이 된다. 범죄가 커지면 조직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다른 패거리들도 이권을 탐내니 패싸움이 날 수밖에 없다. 폭력은 점점 대담해지고 잔인해진다. 범죄율이 치솟아 사회불안이 야기되고, 생산과 소비가 모두 저하되는 악순환이 형성된다. 이제 미국은 희망이 없어 보인다.

이때 구세주가 등장한다. ‘새 건국의 아버지들’(New Founding Fathers)이라는 이름의 정당이다. 1787년 필라델피아 제헌 회의(Constitutional Convention)를 소집해 건국의 기틀을 닦았던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초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4대 대통령 등 55인이 공식적인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다. 제2의 워싱턴을 표방하는 ‘새 건국’ 세력은 누구인가? 실은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자들이다. 망해가는 나라에는 역시 히틀러와 같은 이들이 힘을 얻게 마련이다. 새 국가 건설을 통한 위대한 미국 재현을 기치로 괴벨스식 선전 선동을 펼쳐 유권자의 마음을 갈취하는 데 성공한다.

정권을 잡은 ‘새 건국’ 패거리들은 범죄를 종식시킬 방안으로 퍼지(purge), 즉 ‘연례 숙청의 날’ 혹은 ‘숙청절’ 행사를 고안한다. 일 년에 한 차례 열두 시간 동안 정치인, 공무원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 대한 살인과 방화, 강간을 포함한 범죄가 모두 용인하는 행사다. 행사 중 경찰이나 소방서와 같은 치안과 안전 관련 공공서비스는 중단된다.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행사의 취지는 만민에게 폭력 욕망을 해소할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자는 것이다. 폭력의 하수구를 만들어주면 만연한 폭력이 줄어들 것이라는 주장이다. 권력층의 입장에서는 이룰 수 없는 권력에 대한 무지렁이들의 욕망을 폭력으로 분출하게 만들어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방안이 되기도 한다. ‘새 건국’ 패거리들은 연례 숙청절 제정 법안을 통과시킨다.

놀랍게도 이 행사는 범죄율 감소에 큰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숙청의 날 행사일에 살인을 필두로 한 잔인한 폭력이 집중되고, 행사일의 폭력은 공식적인 범죄가 아니기 때문에 당일 범죄율은 살해당한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0퍼센트가 된다. 화산이 분출해 시뻘건 용암을 실컷 토해내면 한동안 잠잠해지듯이, 극단적인 폭력의 날 이후 나머지 364일의 범죄율도 0에 가깝게 떨어진다. 범죄가 사라지자, 전반적인 사회경제 선순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정권 유지에 가장 중요한 지표인 고용률까지 큰 폭으로 상승하며 전체주의 정권은 안정기를 맞이한다.

올해도 숙청의 날 행사일이 다가왔다. 로스앤젤레스의 중상류층이 모여 사는 한 마을. 거주 지역에 울타리를 치고 외부인의 출입을 차단하는 소위 빗장 동네(gated community)다. 샌딘 가족은 숙청의 날을 집에서 안전하게 보내고자 한다. 마침 샌딘은 보안시스템 회사 운영자다. 안전한 보안시스템이 잘 작동하고, 가족들은 각자의 일상을 보낸다. 그런데 어린 아들이 보안시스템 모니터를 통해 문밖에 심하게 다친 사람이 도움을 구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불쌍하게도 곧 죽을 것 같다. 착한 아들은 시스템을 해제하고 사내를 집 안으로 들인다. 뒤늦게 웬 사내가 피를 질질 흘리며 집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한 샌딘은 기겁해서 총으로 사내를 위협하며 시스템을 작동시키지만, 사내는 어디엔가 숨어버렸다.

곧이어 가족들은 모니터를 통해 기함할 장면을 보게 된다. 문밖에 무장한 사내 여러 명이 서 있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다친 사내다. 사연은 알 수 없으나 여하간 숙청 대상자로서 이미 길거리에서 처형을 당했어야 하는데 이 집으로 숨어들어온 것이다. 갱들은 부상자를 순순히 내놓지 않으면 쳐들어가서 가족들까지 모두 숙청하겠다고 위협한다. 가족은 보안시스템에 의지하려 하지만, 정작 샌딘은 작정하고 들이닥치면 보안시스템으로도 막을 수 없다고 실토한다. 샌딘을 부자로 만들어준 보안시스템도 결국 안전을 보장해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샌딘 가족은 집을 샅샅이 뒤져 부상자를 포획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문밖으로 내보내면 바로 처형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 도움을 청하러 온 사람을 살인마들에게 넘겨준다면 자신들이 숙청자 갱단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족은 양심에 따라 부상자를 구해주기로 하고, 감정이 상한 갱단이 문을 부수고 들이닥친다. 이 영화의 제작사는 공포 영화로 유명한 블럼하우스(Blumhouse) 프로덕션이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온 집안에 피칠갑을 하는 사뭇 끔찍한 액션이 연출된다.

우여곡절 끝에 이웃의 도움으로 가족 몰살의 위기를 모면한다. 그러나 알고 봤더니, 이웃은 숙청의 날 행사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제도의 희생자와 만연한 공포를 발판으로 보안시스템을 팔아 부자가 된 샌딘을 증오한 나머지, 모여서 샌딘을 숙청하자고 작당했던 사람들이었다. TV에서는 올해의 숙청절 행사가 역대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다며, 무기류와 보안시스템 회사의 주가가 치솟아 경제가 좋아지게 됐다는 보도가 흘러나온다.

숙청절과 카니발
숙청절은 카니발(carnival), 즉 사육제 행사에서 착안한 발상이다. 서구에서 오래 지속된 문화다. 지금은 관광상품처럼 돼버렸고, 고대 로마에서 비롯돼 오랫동안 여러 지역에서 다양하게 변화해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카니발은 억눌린 백성들의 울분을 달래주기 위해 일정 기간 무질서를 제한적으로 용인하는 행사로서, 정치적 함의가 있었다.

카니발의 기원은 고대 로마의 농경신으로서 ‘씨를 뿌리는 자’란 뜻의 사투르누스(Saturnus)와 관련이 있다. 로마 신화에서 그는 제우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로마로 도망가 미개한 백성들에게 농업 기술을 전수해 문명을 일군 것으로 돼 있다. 농업이 가지는 특별한 위상 때문인지, 그의 지위는 고대 로마에서 매우 특별했으며, 그를 모시는 신전은 국고를 보관할 만큼 중요하게 여겨졌다고 한다. 사투르누스에게 제사를 지내는 기간을 사투르날리아(Saturnalia)라고 하는데, 바로 이때 일주일간 노예에게 자유를 주어 축제를 즐기도록 허락했다고 전해진다.

양초를 주고받는 등의 풍습을 비롯해 고대 로마의 농경 문화로서의 카니발은 중세 유럽의 기독교 행사로 전승된다. 부활절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다. 그리스도가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 부활절 이전 40일간이 ‘사순절’ 기간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40일간 수행한 것을 기념하는 행사다. 당연하게도 금욕적이고 영적인 근엄한 행사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고자 하면 맨 먼저 육체적인 쾌락의 추구를 중단해야 한다. 무엇보다 식욕을 조절해야 한다. 사순절 기간은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지 않고 절제하는 기간이다. 카니발은 라틴어의 카로 발레(caro vale) 혹은 카르넴 레바레(carnem levare)가 어원인데, 육식을 금지한다는 의미다. 고기를 먹는 것을 금지하기 직전에 고기를 먹게 해주는 것이 카니발이다.

사순절에 접어들기 직전, 그러니까 절제의 기간에 들기 전 며칠간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카니발을 개최한다. 먹고 마시고, 웃고 즐기는 것이 허용된다. 미하일 바흐친은 이렇게 쓰고 있다.

“중세인들은 두 가지 삶을 동시에 살았다. 하나는 공식적인 삶이다. 신중하고 우울하며, 엄격한 계급적 위계질서와 공포, 도그마, 충성 강요, 폭력 등 순종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이다. 다른 하나가 광장의 카니발에서 이루어지는 삶이다. 제약이 없는 자유로운 삶, 같은 것을 보고도 웃음이 만발하고, 악담과 신성 모독, 저속한 외설이 난무하며, 누구든 친숙하게 접촉할 수 있는 그런 삶이었다.”

카니발을 통해 억압받는 민초들은 서로를 보듬어주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카니발 기간이 아니면 각자의 일터로 흩어져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노동에 투입했던 그들이 동질집단이라는 정체성을 구성할 방법은 없었다. 카니발은 억압받는 민초들끼리는 뭉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숙청절은 방종을 허용하고 폭력적 본성과 욕망을 분출하도록 일 년에 하루를 허용한다는 의미에서 카니발의 외양을 베껴왔지만, 본질은 완전히 다르다. 카니발이 무질서와 관련이 있다고 해서 폭력적이라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폭력은 오히려 지배계층의 전유물이었다. 카니발의 집단 방종은 서로를 뭉치게 만들지만, 숙청절의 집단 폭력은 편을 갈라놓는다. 폭력은 다양한 형식과 강도의 또 다른 폭력을 부른다. 깨진 유리창 이론처럼, 망가진 것이 방치된 것을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더 부수고 망가뜨리는 것이 인간의 심리이기도 하다. 영화 <퍼지>에 제시되는 숙청절 행사가 잘 보여주는 특성이다. 이때 망가진 채 방치된 것은 기물이 아니라 인권과 도덕이다.

숙청절과 선거
<무법천지>(anarchy)라는 부제를 단 <퍼지> 2편은 가난한 가정이 겪는 숙청의 밤을 다룬다. 해를 거듭하면서 숙청절은 하나의 문화로 자리를 잡아간다. 사람들은 행사에 빠르게 적응했다. 나름대로 합법적인 처형을 보복이나 오락거리로 이용하고 있다. 너무나 강력한 자극이어서, 중독성이 있다. 거의 국경일의 반열에 오른 숙청절은 이제 없앨 수 없는 행사가 됐다.

한편, 희생자가 늘어나자, 이 제도와 ‘새 건국’ 일당에 반기를 든 레지스탕스 그룹도 생겨난다. 대게 유색인들이다. 숙청절이 범죄율을 낮췄다고 보고됐으나, 폭력의 용인으로 갈등이 해결될 수는 없는 법이다. 폭력은 오히려 더 큰 폭력과 갈등으로 연계될 뿐이다. 숙청절은 계급 갈등과 인종 갈등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경제적 모순들이 왜곡되고 극대화되는 정치 플랫폼인 것이다.

주인공 에바는 고교생 딸과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가는 식당 종업원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숙청의 날이 다가오면 바리케이드를 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 재력도 무력도 없다. 남을 죽이면서 즐길 일도 없고, 죽임당할 일도 없다. 그저 숨어서 열두 시간을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숙청절에 비번인 한 경찰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자를 사사로이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보복을 통해 사적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자경단들에게 숙청절은 절호의 기회가 된다. 갱단에게는 합법적으로 상대방을 제거할 기회여서, 숙청절은 조폭 전쟁일이기도 하다.

숙청절을 즐기는 또 하나의 세력은 사이코패스 부자들이다. 숙청절이 시작되자마자 에바의 병든 아버지는 웬 리무진을 타고 사라지는데, 알고 봤더니 숙청의 날 부자의 살인 오락거리로 자신의 생명을 10만 달러에 판 것이었다. 수혜자는 물론 딸인 에바다. 숙청절 문화는 점점 끔찍해져서, 오락 살해의 대상으로 목숨을 사고파는 데 이르렀다.

에바와 딸은 경악하고 비탄에 사로잡히지만, 이들의 숙청절 시련은 시작에 불과했다. 아파트 경비가 다짜고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평소에 모녀가 경비인 자신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앙심을 품고 있는 자들에게 숙청절은 더할 나위 없는 보복의 기회가 된다. 큰 변고를 당하기 직전 난데없이 웬 군인처럼 잘 훈련된 부대가 나타나 경비를 죽이고 에바를 구한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일단 고맙다.

그러나 알고 봤더니 갱스터 두목에게 숙청절 오락거리가 될 살해 대상 여자들을 길거리에서 납치해 상납하는 조폭 부대원들이다. 엄마와 딸, 여자 둘을 한꺼번에 숙청 대상으로 상납할 수 있는데 하찮은 경비가 먼저 죽이려고 해서 ‘습득물 보호’ 차원에서 손을 쓴 것이다. 숙청절 폭력도 진화하고 있었다. 살인 면허는 인간의 사악한 본성과 결합해 잔혹한 상상과 계획을 낳게 된다. 가히 무법천지가 되고 말았다. 숙청절과 폭력은 문제의 해결책은커녕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되고 말았다. 시민은 자각하기 시작했고, 지하조직을 꾸려 레지스탕스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2016년 선을 보인 3번째 영화의 부제는 <대선의 해>(Election Year)다. 미국 대선이 있는 올해 눈에 확 들어오는 제목이다. 미국 국기 디자인 기반의 의상에 가면을 뒤집어쓰고 무기를 든 숙청 살인광들의 섬뜩한 사진으로 점철된 포스터 광고에 당시 막 대통령이 됐던 트럼프를 비꼬는 ‘미국을 위대하게 지속하자’(Keep America Great)는 카피 문구를 얹어 내어놓았다. 마케팅이 통했는지, 미국인들이 트럼프의 언행과 영화 속의 숙청절을 관련지어 생각했는지 알 수 없으나,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여성 상원의원 론(Roan)은 어린 시절 숙청절과 관련된 끔찍한 기억이 있다. 숙청자들이 집에 침입해 가족들을 묶어놓고, 어머니에게 가족 중 딱 한 명만 살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죽일 테니 누굴 살릴 것인지 지정하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론이 살고 나머지 가족들은 살해당했다. 엄청난 트라우마다. 정치인이 돼 숙청절 폐지에 일생을 바친 론은 대선 출사표를 던진다.

대선 토론회가 개최된다. 상대는 여당인 ‘새 건국’ 일당의 후보로서, 당선이 유력한 강력한 후보다. 대선 토론회에서 ‘새 건국’ 후보는 숙청절의 정당성과 효용성을 미국의 위대함과 연계시키며 궤변을 늘어놓고, 여기에 맞선 론은 숙청절 폐지의 도덕적 당위성을 웅변하고 청중들과의 스킨십을 통해 멋지게 ‘새 건국’ 일당 측 후보를 압도한다. ‘새 건국’ 측은 긴장하고, 저 여자를 그냥 놔둬선 안 되겠다고 모의한다. 다가오는 숙청절이 여자 후보의 제삿날이 될 예정이다.

영화는 론 후보를 보호하려는 다인종 레지스탕스 세력과 백인 일색인 ‘새 건국’ 일당의 대결로 전개된다.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대통령 권력의 불통과 전횡에 시민 봉기로 맞선 것이다. 묘하게도, 대선이 개최될 2020년의 미국 상황과 유사한 점이 매우 많다. 유색인들의 저항, 폭력에의 항거, 엉망진창 대선 토론회, 도처에 만연한 폭력, 총기 남용, 사이비 시위대의 약탈과 방화 등이다. 몇 해 전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했을 풍경이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 론이 우여곡절 끝에 대선에서 승리하게 되는데, ‘새 건국’은 지지자들을 동원해 폭력 시위를 통해 선거 결과에 불복한다는 마지막 대목이다.

카니발과 민주주의
카니발과 숙청절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웃음을 다루는 방식이다. 중세 기독교의 근엄주의적 문화 속에서 웃음은 천박하고,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잘 묘사된 것처럼, 심한 경우 죄악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졌다. 반면, 카니발은 피지배 계층 민중들이 마음껏 웃을 수 있는 기간이었다. 바흐친은 이렇게 썼다.

“공식적이고 권위적인 계급문화의 진지함은 폭력, 금지, 제한과 결부돼 있었고, 이는 늘 공포와 위협을 내포했다. 중세의 삶에서 이런 요소들이 지배적이었다. 반면, 웃음은 공포를 이겨낸다. 웃음이란 억압이나 제약을 모르기 때문이다. 폭력이나 권위는 결코 이런 웃음의 표현법을 사용할 길이 없다.”

카니발은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웃는 행사였고, 숙청절은 공포를 유발하기 위해 웃을 거리를 주지 않는 행사다. “즐겁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민주주의가 폭력과 반대된다는 의미에서 웃음의 카니발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너무 나간 것 아닌가 싶은 ‘숙청절’ 아이디어를 통해 <퍼지>는 오히려 현실적으로 우리의 선거 문화와 시스템이 웃음으로 공포를 극복하는 민주주의적 카니발인가, 공포를 기반으로 폭력과 분노를 유발하는 ‘숙청절’적 성격인가를 묻고 있다.

김기홍 ​한성대학교 크리에이티브인문학부 교수​
김기홍 ​한성대학교 크리에이티브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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