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진원 경희대학교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
채진원 경희대학교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출발점은?

2020년은 1919년 삼일운동의 공화정신에 따라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국을 선포한지 101주년이 되는 해이다.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전환점인 만큼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국민적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특히, 1987년 기점으로 민주화를 시작한지 33년, 한 세대를 넘었다는 점에서 절차적 ‘민주단계’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만큼, 그 다음단계인 ‘공화단계’로 자연스럽게 이행하는 데 주의를 모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친일vs반일’, ‘민주vs반민주’ ‘진보vs보수’ 등 선악의 이분법과 적대적 진영 논리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함께 대안으로 공화라는 새로운 규범에 대한 토론이 필요하다.

대안모색으로 여러 의견이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그 중에서도 ‘진정한 민주주의’ 혹은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조건으로서 풀뿌리민주주의와 읍·면·동의 주민자치를 실질화하자는 주장과 의견들이 봇물처럼 나오고 있다. 이것의 대표적 의견자로 『마을공화국, 상상에서 실천으로-진정한 민주공화국을 위하여』를 쓴 신용인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올해 1월 2일 국회 1호 법안으로 제출된 바 있는 ‘주민자치회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이하 주민자치회법)을 성안하는 데 자문역할을 맡았던 전상직 한국주민자치중앙회대표회장 등이 있다.

신용인 교수는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모델을 ‘읍·면·동 마을공화국 자치’에서 찾아야 한다고 피력하고 있다. 그는 “2017년 12월 기준 우리나라 읍·면·동은 3500개에 이르고 있지만 현행 읍·면·동은 아무런 자치권이 없다. 주민자치위원회나 주민자치회가 구성되어 있으나 명목상의 주민자치”라고 비판한다. 그는 대안으로 “읍·면·동 주민에게 자기입법권과 자기통제권을 부여해야 한다. 그래야 무늬만 주민자치가 아닌 명실상부한 주민자치가 실현되며 우리나라가 제대로 된 ‘마을연방민주공화국’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전상직 대표회장은 서울시가 시범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이른바 ‘주민자치위원회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 미국의 건국시기 타운미팅의 성격을 갖는 ‘주민자치회’를 제시한다. 이것은 주민자치회법으로 제안되었다. 그는 ‘주민자치회법’의 주요 골자로 ▲주민자치회에 법인격 부여 ▲마을을 단위로 설립되어 해당 마을의 지역과 주민을 대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주민자치회의 자율성 보장 ▲매년 1회이상 주민총회 개최 ▲설립 목적 범위 내 수익사업과 회비·기부금·보조금 등을 통한 독립재정 확보 등을 주장한다.

신용인 교수와 전상직 대표회장은 공통적으로 우리나라가 진정한 민주공화국이 되기 위해서는 ‘읍·면·동장의 직선제 부활’과 ‘시·군·구 사무와 예산의 읍·면·동 이양’을 주장한다. 이들은 시군구와 지역주민 사이에는 읍면동과 주민자치위원회라는 행정계층이 있는데 선출직 단체장은 읍면동장의 인사권과 주민자치위원의 추천권을 통해 지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면서 읍면동장을 주민들이 투표로 선출하고 주민자치회를 주민들이 직접 참가하는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들은 인구 5천만의 대한민국에서 직접민주주의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이고, 평균 인구 22만 명의 시·군·구 단위에서도 대의민주주의로 갈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많은 문제점이 나온다고 인식한다. 평균 인구 1만 5천 명의 읍·면·동에서 ‘민주공화국’의 본래 뜻에 맞는 ‘시민이 스스로를 통치한다’를 실현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읍·면·동에는 자치권이 없기에 하부 행정기관에 지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주민자치위원은 읍·면·동장이 위촉하는 형태여서 비유하자면 임명된 대통령이 국회의원도 임명하는 식의 관치위원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지적한다.

이런 의견과 제안들이 국민적 공감을 얻고 있는 만큼 이번 기회에 ‘읍·면·동 민주화’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미국 건국기의 타운미팅의 사례와 제퍼슨의 ‘기초공화국 모델(elementary republic) 헌법안’을 살펴보면서 주민자치의 의미와 시사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 또 우리나라 4.19 민주화운동의 결과물로서 1960년 6월 15일 개정 헌법에 신설된 조항인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선임방법은 법률로써 정하되 적어도 시, 읍, 면의 장은 그주민이 직접 이를 선거한다”는 제96조를 되새기면서 이것을 다시 부활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타운미팅과 제퍼슨의 기초공화국 모델 헌법안

일반적으로 ‘민주주의’와 ‘민주공화국’의 개념은 1863년 11월 19일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링컨이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말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by the people, for the people)”라는 말로 상징된다. 민주주의와 민주공화국의 근간인 국민주권의 원칙은 단순히 ‘국민이 주인이다’라는 레토릭상의 말이 아닌 “권력의 주인으로서 자유시민의 생활태도와 습속”에 해당되는 말이다.

즉, 자유시민의 생활습속으로서 국민주권의 원칙은 시민들이 억압적 권력에 맞서 권력의 가로축을 입법,사법, 행정으로 쪼개고, 세로축을 연방, 주, 카운티,마을로 쪼개서 각 단위에 자치시민들이 자유로운 말과 행위로 참여하면서 견제와 균형의 공론장을 펼쳐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 국민주권의 원칙은 미국 건국기의 타운미팅과 제퍼슨의 기초공화국 모델 헌법안에서 그 원형이 잘 드러나는 만큼 여기에 주목하고 우리와 비교하여 시사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

이런 미국 사례의 시사점은 지난 8월 13일 한국지방자치학회 하계학술대회에서 필자가 발표한 ‘주민자치의 정치학적 고찰과 함의’에 잘 드러난다. 미국 타운미팅과 제퍼슨의 기초공화국 모델 헌법안 사례가 주는 주민자치의 정치학적 함의는 관료주의적이고 억압적인 국가권력과 중앙집권적인 관료주의 정부형태를 인간의 자유로운 실천행위(praxis)가 가능한 ‘근거리의 자발적인 시민결사체’ 내지 ‘자발적 시민참여공간’으로 전환하여 “시민들의 실질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즉, 미국 혁명기의 타운미팅과 토마스 제퍼슨이 제안한 읍·면·동(township) 및 구(wards) 단위를 기본으로 하는 기초공화국(elementary republic) 헌법안은 억압적 국가권력과 중앙집권적 관료주의 정부형태를 적극적으로 분쇄하고 시민의 말과 행위가 자유롭게 표현되고 공론화되면서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실질적 주민참여의 공간(pubilc realm)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위 발표문에서 필자는 제퍼슨이 카운티(county)를 구(wards)로 세분하여 분할하는 것, 즉, ‘소규모 공화국’들의 창설을 요구하는 것이 공화주의 정부의 원리라고 보고, 이런 소규모 공화국은 대규모 공화국의 원동력으로 역할 한다고 분석했다. 제퍼슨은 구(wards)와 같은 작은 마을단위의 기초공화국(elementaryrepublic)이 큰 연방공화국의 존립 조건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마을을 형성하는 구 단위의 기초공화국은 중앙정부의 독재적 관료주의 경향과 공적문제에 대한 개인 생활의 무기력과 무관심을 동시에 구원한다고 보았다.

제퍼슨에게 타운자치(township)는 “전체 주민의 목소리가 모든 시민의 공동이성에 의해 공평하게, 충분히, 평화롭게 표현되고 논의되며 결정되는 기초공화국”이었다. 제퍼슨은 미국이 기초공화국 중심의 연방공화국이 되기 위해서는 카운티(county, 군)를 수백 개의 워드(wards, 구)로 쪼개는 ‘구 체계(wardssystem)’로 전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런 제퍼슨의 구상은 오늘날 진정한 민주공화국이 되기 위해서 시·군·구의 권력과 예산을 읍·면·동 자치권력으로 이양하여 연방공화국의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같은 시사점을 한국 상황에 적용해 볼 수 있다.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3500개의 읍·면·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만일에 전국의 읍·면·동 마을 하나하나가 ‘기초공화국’으로 생명력을 가지고 자라나게 한다면 지금처럼 중앙에 집중된 권력과 부는 전국 3500개 읍·면·동으로 널리 분산될 것이다. 그럴 경우 3500개 읍·면·동 주민 모두가 권력과 부를 고루 향유하며 스스로 통치하고 남의 지배를 받지 않아 주권자로서 공화국의 시민적 자유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소수의 특권층과 기득권층을 위한 대한민국이 우리 모두의 자유를 위한 대한민국으로 바뀌게 된다.

미국 타운미팅과 제퍼슨 안은 읍·면·동과 연방정부의 관계 정립을 위해 ‘보충성의 원리’와 ‘연방주의 원리’가 작동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보충성 원리’란 사업과 활동의 수행에 있어 작은 단위에게 우선권을 주고, 작은 단위의 능력만으로 수행할 수 없는 경우에 비로소 더 큰 단위가 보충적으로 개입하여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보충성 원리는 개인이나 작은 공동체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인정되는 원리이며 마을공화국 건설에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

‘연방주의’는 수직적 중앙집권형 통치구조를 거부하고 수평적 네트워크형 통치구조를 지향하는 조직 원리이다. 자치권을 가진 기초공화국과 광역공화국이 공통의 정치이념 아래에서 연합하여 구성하는 연방국가의 모델이다. 우리도 미국 타운미팅과 제퍼슨의 기초공화국 모델 헌법안을 교훈으로 삼아 창조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자치권을 가진 3500개 읍·면·동 마을의 기초공화국이 ‘연방민주공화주의’라는 헌법의 이념 아래 연합하여 새로운 연방국가인 ‘마을연방민주공화국’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읍·면·동장 직선제 시행과 1960년 6.15 헌법 사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타운미팅과 기초공화국 헌법안을 탄생시킨 미국 자유시민의 청교도습속은 위계서열의 집단주의와 친화적인 유교와 성리학 습속에 영향을 받고 있는 한국 시민과는 다르다는 점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미국적 풍토에서 자라난 법과 제도 및 정치문화를 우리 실정은 무시하고 외부에서 이식하려는 ‘제도이식론’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의 경험에서 시작하여 한발 한발 점진적으로 나아가면서 변화를 도모하는 ‘제도개선론’의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6.25 전쟁 속에서 읍·면의회와 읍·면·동장의 직선제를 꽃피운 자치경험을 가지고 있다. 1950년대 전쟁 속 ‘동회(洞會)’는 동 재산을 관리할 권한을 갖고 있었고 식량 배급과 인구관리를 담당했기에 적지 않은 권력을 행사했다. 주민자치는 읍·면의회부터 시작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1952년 4월 25일 읍·면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돼 전국적으로 91%의 높은 투표율로 1만6051명의 초대 의원을 선출했다. 읍·면의회 의원 선거는 세 번 치러졌다. 이어서 1955년 동장 선거, 1956년 읍·면장 선거를 실시했다.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체제를 강화하면서 읍·면·동장 직선제는 불과 2년 만에 중단되고 임명제로 바뀌었다. 그러나 1960년 4·19 혁명 후 민주화의 열망에 따라 상황이 반전되었다. 6월 15일 공포된 개정헌법은 임명제였던 시장, 읍장, 면장을 주민이 직접 선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조항을 지방자치법이 아니라 헌법 제96조(지방자치단체의 장의 선임방법은 법률로써 정하되 적어도 시, 읍, 면의 장은 그 주민이 직접 이를 선거한다)에 삽입하였다. 헌법개정에 따라 읍·면·동장 직선제는 부활되었으나 제대로 시행하기도 전에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다시 임명제로 바꿔버렸다.

이처럼 현재의 읍·면·동장 임명제는 1950~60년대 주민자치의 꽃을 꺾은 독재의 유습이다. 1987년 6·10민주항쟁, 2017년 촛불시민혁명이라는 민주화의 큰물결이 있었음에도 읍·면·동장 임명제는 오늘날까지 유지되면서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읍·면·동장주민추천제’는 임명제보다는 진전된 형태이기는 하나 1950~60년대 주민들이 경험했던 읍·면·동 직선제에는 턱없이 미달하는 안이다. 이번 기회에 우리가 탄생시켰던 읍·면·동 주민자치의 경험과 의미를 되새기고 그 부활을 위한 제2의 민주화인 ‘읍·면·동 직선제쟁취’ 캠페인에 뜻을 모아야 할 것이다. 민주공화국의 근간인 국민주권의 원칙으로 돌아가서 “권력의 주인으로서 자유시민의 생활태도와 습속”을 찾고 함양하는데 뜻을 합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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