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동 충남대학교 자치행정학과 교수
김찬동 충남대학교 자치행정학과 교수

민주화란 국가나 공동체를 운영하는 주권자가 누구인가란 문제와 관련되는 것이다. 즉 국가나 공동체를 운영하는 주권자가 특정한 개인 혹은 소수의 집단이냐 전체의 구성원이냐라고 하는 폴리테이아(politeia,정체)의 문제이다. 현대국가에서 헌법을 통하여 민주공화정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국가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주권자가 왕도 아니고 귀족도 아니며 구성원인 시민과 주민이 주권자로서 공공성과 공익을 모색해나가는 정치체제임을 밝히는 것이다.

국가란 구체적으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혹은 지방자치단체)로 구성된다. 그런데 시민과 주민들이 국가나 공동체 속에서 생활하는 것은 정부로부터의 공공서비스(혹은 공공재)를 소비하는 것도 있지만 자율적으로 필요에 따라 공동체를 구성하거나 자치체를 구성하여 공유서비스를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는 시민사회영역과 시장경제영역도 존재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경제학에서 국가와 시장경제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즉 국가는 작은국가가 좋은 것이어서 야경국가에서 시작하였지만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점차 행정국가화 되고 복지국가화 되면서 큰 정부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즉 국가영역이 시장경제영역에 개입하여 대공황문제를 해결하거나 국가산업경제의 발전에 대한 책임을 지지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1980년대 영국의 복지병 혹은 재정파탄으로 인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의해 비대해진 공공부문도 시장경제원리인 경쟁과 가격원리를 도입하여 공공부문의 개혁을 하여야 한다는 ‘다시 작은정부로’의 개혁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은 공공서비스를 공급하는 네트워크에서 방향잡기(steering)의 역할로 한정되나 공공서비스 공급체계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도록 조정과 협력유인을 하게 되었다.

한편, 국가와 시민사회와의 관계에서는 시민들의 자유권과 재산권을 보장하도록 국가의 핵심의사결정 구조를 민주화하는 과정에서 양자 사이에는 의회중심의 대의제 민주주의제도가 발생하게 되었다. 선거를 통해 대표(representative)를 선출하고 이들이 시민사회를 대변함으로써 주권자의 주권이 행사되는 간접민주주의 제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의민주주의는 중앙정부 계층에서 만이 아니라 지방정부 계층에서도 적용되어야 민주주의가 생활화 된다. 지방자치를 민주주의의 학교라고 하는 것도 지방정부와 풀뿌리 근린정부 계층에서 민주주의의 학습과 경험이 없이 중앙정부의 선거에만 참여하는 것으로서 시민사회의 민주주의 교육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반증한다. 4년 혹은 5년에 한 번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선출하고 나면 대의자들이 엘리트화 되거나 정당조직의 구성원이 되어 주권자들의 선호와는 다른 방향으로 행동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가치에서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 들어와서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정치학에서는 공동체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 논의가 일찍부터 이뤄져 왔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대의민주주의와 공동체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기법으로서 숙의민주주의 혹은 심의민주주의를 위한 제도적 장치들이 개발되어 왔다. 문제는 주권자와 주권을 결정하는 사람들 간 소통의 문제이고, 서로 다른 가치와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공감하게 하는가의 문제이다. 충분한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신뢰가 있다면 하나하나의 생활문제나 공공문제가 논란을 불러 일으키지 않을 수 있지만, 서로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고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 사사건건 의사결정에 대한 의혹이 생기게 되어 극단적 비판과 감정적 분노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읍면동은 행정계층이다. 자치계층이 아니다. 이 점에서 읍면동을 민주화한다는 것은 두 가지의 차원에서 검토가 필요하다. 현재와 같이 행정계층으로 두면서 행정부문의 민주화를 도모하는 것과, 읍면동의 자치계층화를 민주화로 보고 근린자치제도를 민주적으로 재설계하는 것이다.

먼저 전자의 경우는 행정부문에 주민들의 참여를 확대하고 증대시키는 것이다. 읍면동 주민센터가 행정사무를 처리하거나 읍면동 관련 행정사무를 주민참여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혹은 행정부문이 주민들을 하부행정조직과 같이 조직화, 지시 혹은 전달하여 주민사회에 하향적으로 소통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통·리장을 동장이 임명하거나 공모하여 행정사무 집행의 전달체계로 활용함으로써 주민들을 행정과정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의제(擬制)적 참여, 관치에 활용되는 참여로서 주민들이 주권자로서 참여하는 자치적 참여와는 그 본질이 전혀 다른 것이다. 오히려 관치적 참여로 인해 주민들로 하여금 자치적 참여에 대한 자각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최근에는 행정부문에 주민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주민참여예산제도를 도입한다든지, 공청회·청책회·주민조사 등의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행정이 그 사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관료들 만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을 참여시킨다는 점에서 민주적 방향으로 나가는 것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읍면동 계층을 민주화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후자인 읍면동을 자치계층화 하면서 민주화하는 것이 온전한 민주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읍면동을 자치계층화 한다는 것은 주민들의 대표가 읍면동을 다스린다는 의미이고, 이것은 선거를 통해 읍면동의회를 구성하거나 읍면동 주민총회를 통해 선거로 집행위원회를 구성하여 자치관리한다는 의미이다.

이 경우 읍면동계층에 존재하는 읍면동장은 폐지하거나 읍면동 주민센터의 공무원을 읍면동 자치공무원으로 전환하고, 읍면동의회나 주민총회에 의한 집행위원회의 의사결정을 따르는 것이다. 한국적 현실에서는 이상적이고 이론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시·정·촌 계층에서 주민들이 선거로 지방의회를 구성하거나 주민총회로 지방의회를 구성하고 있다. 일본에서 시·정·촌이 1700여 개 존재하므로 그 인구 규모가 한국의 시·군·구보다는 약 1/8이상 작은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한국에서 유사한 형태를 취하는 것이 도시지역 아파트단지의 입주자 대표회의나 농촌지역의 마을총회를 통한 리·장선거의 경우 주민들이 공동체의 주권자로서 참여하여 의사결정기구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민주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읍면동 민주화란 폴리테이아로서의 주민들이 주권자로서 읍면동정부를 구성하고 참여하여 지배하기도 하고 지배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읍면동민주화는 정치적 정부구성에서의 주민주권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읍면동 민주화에 있어서 행정부문의 민주화란 어떤 개념인가? 행정이란 정치를 행하는 것인데 정치부문의 민주화 없이 행정부문만 민주화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이 부분을 확인하기 위하여 정치부문의 민주화와 행정부문의 민주화로 나누어서 2⁎2의 매트릭스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읍면동계층의 행정 민주화란 동사무소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주민자치위원회 등의 주민이 행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도입하는 것이다. 읍면동계층에는 주민들이 있고 읍면동 행정구역이 있지만 자치권이나 자치관리정부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자치의 3요소인 공간과 사람은 있지만, 행정관리사무소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 행정관리사무소는 상위 계층인 시군구 지방자치단체장의 통제를 받는 관료제의 하부행정조직이다. 즉 시군구의 입장에서는 주민의 선거로 선출된 지방자치의회와 단체장이라고 하는 자치권 혹은 자치관리단체(정부가 아님)의 자치권이 작동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읍면동 계층 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자치권이 이관(devolution)되어 있지 않은 것이고, 생활자치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즉 시군구의 수직적 통제를 받는 것이고 자치의 공백영역이 발생되어 있는 것이다.

시군구 행정의 입장에서는 읍면동 행정관리를 위해 읍면동주민들과 소통을 해야 하고, 주민들의 지역 현안이나 주민 공동체의 의견을 수렴하면서 행정관리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직접적 행정관리방식으로서 통·리장제도를 도입한 것이고, 간접적 행정관리의 방식으로 주민자치위원회 혹은 주민자치회라고 하는 자치 의제적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주민자치위원회의 경우는 위원의 구성방식에서 관치적이다. 즉 동장이 임명하는 것이어서 상위정부 관료행정의 권위(authority)로서 행정관리의 전달체계상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세금에서 통·리장에게 수당으로 지급하고 있고, 관료제가 지역주민사회를 관리 통제하는 네트워크인 셈이다.

이 부분이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나 지방자치를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관료식민통치’에 해당하기에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1998년 이후 읍면동에 대한 관치(官治)방식을 개혁하기 위해 읍면동사무소 폐지를 검토하기도 했지만, 현실은 읍면동사무소의 축소와 의제적 주민자치로서 주민자치위원회를 설치한 것이다. 위의 표에서 <1영역>에서 <2영역>으로 이동한 것이다.

요컨대, 행정영역에서의 민주화는 아무리 노력해도 1영역에서 2영역으로 이동하는 정도이고, 이것을 정치적 패러다임에서 보면, 무민주화1)에 불과하다. 즉 행정부문의 민주화도 필요하고 지향해야 할 방향인 것은 분명하고 주민들의 참여를 통해 민주화를 향한 일보 진전된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행정부문의 민주화 방식으로 제시되고 도입된 것을 보면, 주민자치회 시범실시의 경우도 여전히 읍면동 관료제를 그대로 읍면동 공간 속에 통치구조로서 조직을 설치해 둔 상태에서 행정사무의 일환으로 하는 것이기에 여전히 관치적 패러다임에 있는 것이다. 관치가 완화된 것은 분명하지만 자치(自治)적 패러다임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결국 행정부문의 민주화는 정치적 패러다임에서의 민주화 없이는 어려운 것이고, 행정영역의 비민주화를 지속하고 있으면서 의제적 민주화(제3영역)만으로서는 읍면동이 민주화되었다고 하기 어려운 것이다. 즉 읍면동 민주화의 이상은 정치영역의 민주화인읍면동의회 혹은 통·리의 주민총회에 기반한 연합의회로서의 제도설계가 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현재의 읍면동에는 주민자치회가 설치되어 있다. 즉 행정계층으로서 읍면동장과 주민센터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주민자치위원회 혹은 주민자치회가 설치되어 있다. 주민자치위원회는 주민센터의 프로그램 운영위원회와 같은 주민참여기구에 불과하여 아른스테인(Arnstein)의 참여 8단계 중 형식적 참여에 불과하다.

서울시나 세종시 등과 같이 읍면동의 민주화를 위해 선도적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곳에서는 주민총회를 개최한다든지 주민참여예산제도를 읍면동 주민자치와 연계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또 읍면동의 민주화를 위해 관치적 주민단체가 아닌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을 통한 주민자치의 씨앗만들기로 1천만의 도시 서울에서 마을만들기 참여사업에 연인원 3~4%가 참여하는 혁신적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업들이 읍면동 공간 속에서 주민들의 자치공동체를 형성하고 육성하는 긍정적 효과가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행정사무의 일환으로 행정예산에 의존하여 ‘자치라는 탈’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1) 무민주화는 정치적 차원에서 민주화가 실질적으로 제도설계 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고, 비민주화는 행정적 차원에서 관료지배적 구조가 주도적이 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함.

행정부문의 민주화는 정치적 패러다임에서의 민주화 없이는 어려운 것이고, 행정영역의 비민주화를 지속하고 있으면서 의제적 민주화(제3영역)만으로서는 읍면동이 민주화되었다고 하기 어려운 것이다.
즉 읍면동 민주화의 이상은정치영역의 민주화인 읍면동의회 혹은 통·리의 주민총회에 기반한 연합의회로서의 제도설계가 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인간사회의 행동과 정부사업의 양태에서 이중적 측면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한 것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보면 이기적인 사익을 위한 거대한 성을 쌓아 놓아 부패하고 불의의 나락에 빠져버린 역사를 수도 없이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인간사회의 모순과 오류, 한계를 방지하기 위해 절대권력을 부정하고 상호견제와 균형(check and balance)라고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여기에 인간사회운영과 역사경영의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헌법적 질서와 가치는 이러한 교훈을 문서화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 한국사회는 지난 70여 년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운영이라고 하는 정치경제적 가치를 헌법제도적 가치로서 ‘선택’하고 운영해 왔다. 물론 그 과정에서 특정한 사람들의 이기심과 사익의 우상에 빠져 부패와 불의가 만연한 적도 있지만 그 공과(功過)를 균형 있게 보고 공을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과를 드러낼 것은 드러내면서 인간사회운영의 현실을 인정하고 이해해주는 ‘배려와 포용’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들도 언제든지 그러한 위치와 영향력이 주어졌을 때 그러한 한계와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개연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개연성을 부정하고 자신만이 정의라고 하거나 자신만의 가치를 이루기 위해 제도적 선택자체를 부정한다면, 인간의 한계를 넘는 메타 개혁이 되는 셈이다.

읍면동 민주화라고 하는 개혁에도 자유민주주의의 가치와 시장경제운영이라고 하는 제도적 장치 속에서 대안들을 모색하고 이상적 비전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관료제가 읍면동 민주화를 위해 행정사업과 행정예산으로 주도해 민주화된 이상을 그려내려고 해서는 헌법적 제도의 ‘선’을 넘는 것이다.

시민사회가 읍면동 공간을 자율적으로 자치할 수 있는 권한과 예산, 재정과 인적자원구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헌법과 법률적 권위를 가진 기반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협력해서 해야 할 일이다. 직접 행정예산을 투입해 행정사업으로 할 것은 아니다. 일정한 기간 한시적으로 시범운영을 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으나 이것이 구조화되고 상시화 되어선 안될 것이다.

이 점에서 읍면동 민주화란 과연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전문가들과 현장활동가들이 생각할 수 있는 주제를 깊이 있게 토론하고 성찰할 필요성이 있다. 헌법 개정의 창(window)이 열리게 될 때, 합의되고 공감되어 있는 읍면동 민주화에 대한제도적 설계가 대안(alternative)으로서 준비되어 있을 때, 주민주권에 입각한 지방자치가 읍면동 공간속에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법제도적으로 준비되어야 할 뿐 아니라 이것을 구현해 나갈 미래세대의 인재들이 준비되어야 하는 것이다. 읍면동 민주화는 시대를 앞서 가서 읽어내고 준비하는 선각자들을 필요로 한다.

시민사회가 읍면동 공간을 자율적으로 자치할 수 있는 권한과 예산, 재정과 인적자원구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헌법과 법률적 권위를 가진 기반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협력해서 해야 할 일이다. 직접 행정예산을 투입해 행정사업으로 할 것은 아니다.일정한 기간 한시적으로 시범운영을 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으나 이것이 구조화되고 상시화 되어선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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