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텝포드 와이프’ ‘미드소마’   아름다운 마을의수상한 사람들

많은 영화의 배경이 ‘마을’이다. 영화 주인공들의 삶의 터전 역시 그들이 사는 마을이고 동네이기 때문이다. 스크린 속 인물들은 배경이 되는 마을, 그리고 이웃들과 때로 갈등하고 협력하며 여러 이야기들을 만들어나간다. 그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엔딩이 되기도 하고 비극으로 치닫기도 한다. 앞으로 ‘마을, 사람들 그리고 영화’에서는 마을과 사람들의 케미스트리, 그들 사이의 교감과 성장, 변화를 다른 작품들을 소개한다. 그 속에서 주민자치의 바람직한 방향, 때로 반면교사의 깨달음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주>

⁎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국 거대 방송사의 CEO, ‘조안나’(니콜 키드먼)는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이한다. 기획하는 프로그램마다 성공을 거두며 승승장구하던 그녀였지만, 새 프로그램에 불만을 품은 리얼리티 쇼 출연자가 론칭 행사에서 총을 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방송국은 조안나에게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종용한다.
부국장이었던 남편, ‘월터’(매튜 브로데릭)는 갑작스런 해고로 큰 충격을 받은 아내에게 잠시 뉴욕을 떠나자고 말한다. 조안나는 남편을 따라 코네티컷의 ‘스텝포드’라는 작은 마을로 간다. 그러나 최신식 시설을 갖춘 화려한 저택, 평온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이 마을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다.

심리학을 공부하는 ‘대니’(플로렌스 퓨)는 동생의 극단적 선택으로 온 가족을 한꺼번에 잃는다. 그녀는 큰 슬픔에 빠져 4년 넘게 사귄 남자친구, ‘크리스티안’(잭 레이너)에게 의지해보려 하지만 그는 원래 불안 증세가 심하고 신경이 날카로운 대니를 위로하는데 지친 눈치다. 대니는 기분 전환과 관계 회복을 위해 크리스티안이 친구들과 계획한 스웨덴 여행에 합류한다.

이들이 도착한 ‘호르가’라는 지역은 한여름에 9일간의 ‘하지제’(미드소마)를 지내는데,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는 크리스티안 일행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히 신비로운 곳이다. 숲으로 둘러싸인 넓은 초원은 축제를 위해 흰 옷을 차려 입은 사람들로 더 밝고 아름답게 보인다. 양떼, 염소와 어우러진 주민들은 자연 그 자체로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이 마을 사람들은 외부인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미풍양속으로 삼고 있다.

갑작스런 스트레스, 삶의 공간-환경을 바꿔보자!

장르도, 톤 앤 매너도 다르지만 ‘스텝포드 와이프’(The Stepford Wives, 2004. 감독 프랭크 오즈)와 ‘미드소마’(Midsommar, 2019. 감독 아리 에스터)는 공히 한적한 마을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을 보여준다. 주인공들은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상태에서 이 마을에 들어간다. 특히, 스텝포드로 이주한 사람들 대부분은 조안나와 마찬가지로 기업인, 판사, 과학자 등 거물급 인사들로 엄청난 압박감과 스트레스 속에 살던 이들임이 밝혀진다.

스텝포드에서 만나 친구가 된 조안나와 베스트셀러 작가 ‘바비’, 천재 건축가 ‘로저’는 매우 자연스럽게 우울증약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졸로프트 복용해봤어요?” “그건 애들용이죠.” “난 구식이라 자낙스를 숭배해요.” “난 프로작요.” 지친 도시인들이 치유를 바라며 들어간 친환경적 공간이 거대한 블랙홀처럼 이들을 더 큰 나락으로 떨어뜨린다는 설정이 흥미롭다.

조안나는 스텝포드에 도착하자마자 ‘웰링턴’(글렌 클로즈) 부인의 안내를 받는다. 이 곳에 온지 가장 오래된 웰링턴 부부는 각각 아내들과 남편들의 중심에서 마을의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다. 조안나는 아내들의 운동모임에 갔다가 마치 1950년대로 돌아간 듯한 광경에 기겁을 하고 만다. 허리 라인을 강조한 파스텔톤 원피스에 하이힐을 신고 빈틈없이 메이크업을 한 여성들은 모두 바비 인형처럼 환한 미소를 짓고 남편에게 사랑 받기 위한 기술을 습득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여성들이 오직 주부로서만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시절의 풍경이 스텝포드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월터는 남편들과 모임을 가질 수록 다른 아내들과 달리 사회적 성공에 대한 욕망과 자기 주장이 강한 조안나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되고, 이전까지와 달리 가부장적 남성의 모습을 보인다. 이에 조안나는 남편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스텝포드에 적응해 보기로 마음 먹는다.

이상한 마을 수상한 이웃들

스텝포드에 수상한 리더들과 클럽이 있다면, 호르가에는 통과의례가 있다. 호르가에 도착하기 직전, 대니 일행이 먼저 만난 것은 환각버섯이다. 마치 환영의 메시지처럼 마을 주민으로부터 전달된 이 버섯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모르고 있는 외부인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기보다 정신을 흐릿하고 멍하게만 만든다.

마른 버섯을 꺼려하던 대니는 한 호르가 청년이 권한 버섯차를 마시는데 곧 부모님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불쾌한 환각 상태에 빠진다. 또, 그녀가 깊이 잠든 사이, 그토록 기다리던 생일도 그냥 지나가 버리고 만다. 도시 청년들의 떠들썩한 생일 파티 관습은 그렇게 버섯차와 북유럽의 백야 속에 사라져 버린다. 이는 현대 문명과 분리된 채 무속신앙과 전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호르가 주민들이 뉴요커들에게 선사하는 첫 번째 새로운 경험이다.

이후, 호르가에서는 모든 것이 대니 일행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전통 의상, 나무로 만든 커다란 공장형 숙소, 우리에 들어 있는 곰 등 시각적인 요소부터 전통 악기 연주, 아이들의 놀이, 식사 풍습까지 방문자들에게 신기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처음부터 이 곳의 분위기가 무섭고 불편했던 대니는 하지제 의식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반면, 크리스티앙을 비롯한 인류학과 학생들은 더 깊숙이 이 마을 안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끔찍한 절벽의식을 목격한 후, 크리스티앙은 호르가에 대해 오히려 더 큰 호기심을 보이며 하지제에 관한 논문을 쓰기로 결심한다. 그는 먼저 이 곳 풍습을 논문 주제로 잡고 있던 동료가 황당해 하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호르가에 푹 빠져 있다.

한시라도 이 곳을 빨리 떠나고 싶은 대니는 크리스티앙이 마을 주민에게 근친상간의 전통이 있는지 적극적으로 묻는 모습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여기서 근친상간이 현대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성관계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호르가를 신기한 볼거리 정도로 여기던 외부인들의 의식이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을 거쳐 관음증적 시선으로까지 확장된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는 방문객들을 스스로 파국으로 몰아가는 핵심적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스릴러 장르로서 ‘미드소마’의 섬뜩함은 하지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그 자체 뿐 아니라 방문자들의 왕성한 호기심과 전통에 대한 지나친 관대함에서도 느낄 수 있다. 마을의 어르신들이 절벽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하는 의식을 가치 판단 없이 그저 문화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관객들까지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마주하게 되는 추악한 이면

조안나 또한 처음에는 그동안 일 때문에 등한시해왔던 주부로서의 삶에 집중하는 것이 나쁠 것은 없다는 마음으로 머핀을 굽고 아내들의 모임에 참석한다. 그러나 스텝포드의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완벽한 주부의 모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기계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는 충격에 빠진다.
한 때 세계 최고의 유전공학자였다는 웰링턴 부인은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 조안나에게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지만 이는 호르가 주민들의 논리보다 더 빈약하다. “나는 더 나은 세상을 원했을 뿐이야. 남자는 남자답고 여자는 사랑과 아낌을 받는 곳. (중략) 나도 당신과 같았거든. 스트레스 과잉, 시간 부족, 사랑 부족. (중략) 그래서 난 시간을 돌리기로 했어. 초과근무가 생기기 전, 자녀와 늘 함께 있고, 여자들이 스스로 로봇으로 변하기 전으로.” 그녀는 일만 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남편과 보조연구원의 부적절한 관계를 목격하고 낭만이 살아있는 마을, 스텝포드를 만들었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러나 그녀는 동정심을 유발하기는커녕 바쁜 현대사회가 만들어낸 신종 괴물로 보일 뿐이다.

어딘가에 이상적인 동네? 지금 발붙이고 있는 이곳서 더 나은 삶을

한 개발자가 인간을 로봇으로 개조해 마을 가득 채워 놓는다는 ‘스텝포드 와이프’의 어두운 이야기는 영화의 밝은 분위기와 가벼운 SF적 요소 때문에 대중적으로 순화된다. 반면, ‘미드소마’는 후반부로 갈수록 통렬하게 호르가의 실상을 드러낸다. 계획적인 근친, 외부인들을 강제로 끌어들여 후손을 이어가는 방식, 규범을 어긴 자들에 대한 원시적 처벌 등은 이성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대니와 크리스티앙은 결국 이들의 최종적 제물이 되고 만다.
영화에 굳이 교훈을 주려는 의도는 없었다 해도, 스텝포드를 찾았던 거물들과는 또 다른 종류의 욕망과 무절제함, 헛된 기대가 대니 일행에게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종종 지금 살고 있는 곳보다 이상적인 동네가 있다고 믿고, 그 곳으로의 이주를 꿈꾸기도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현대인들의 고질적인 병을 치료하고 더 나은 삶을 계획해야 하는 곳은 사실, 현실에 발붙이고 있는 바로 여기일지도 모른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팝엔터테인먼트

윤성은 영화평론가
윤성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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