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로 간주됐던 김영삼 전 대통령

지금으로부터 약 30여 년 전, 1993년 초의 일이었다. 2016년 타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당선자 신분으로 서울대 철학과 신년하례식에 참석했다. 동문과 대학원생들이 매년 열어왔던 행사였지만, 이날 신년하례식에는 예년에 비해 몇 배나 많은 동문이 참석했다. 예정된 시간에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당당한 모습으로 들어섰다. 단호하게 다문 입에서 군사독재와 싸워 문민정부를 쟁취한 자긍심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이 묻어 있었다.

어느 원로 교수가 마이크를 잡고 그를 소개했다. 그리고 “이제 철인정치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며,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끌어갈 문민정부 시대에 대해 그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 그를 시대정신의 화신이며, 시대정신을 구현할 메시아라는 칭송이 터져 나왔다. 이는 마치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헤겔(1770년~1831년)이 나폴레옹의 행진을 보면서 “저기 시대정신이 오고 있다”고 표현했던 것을 연상시켰다. 헤겔의 이 표현으로, 1789년 프랑스혁명 정신을 바탕으로 프랑스를 재건·확장하고 있었던 나폴레옹을 시대정신의 우상으로 칭송하고자 했던 것이다.

원래 플라톤이 강조한 ‘철인정치’란 정치적 의사결정을 신탁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합리적 지성과 토론에 기반한 공론의 정치를 의미한다. 원로 철학자들이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기대했던 ‘철인정치’는, 당시 독재청산과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시대정신을 구현하기를 바라는 ‘정치적 희망’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야말로 당시의 시대정신을 담지하고 실천할 메시아로 간주했던 것이다.

우리 속의 메시아주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들의 기대에 부응해 곧바로 개혁 조치들을 단행했다. 취임하자마자 그는 군부독재의 심장부였던, 육사 출신들의 사조직 ‘하나회’를 전격 해체했다. 이어 주요 보직을 차지하고 있었던 ‘하나회’ 장성들에 대한 대대적 숙청을 다행했다. 나아가 공직자들의 재산등록을 계기로 부정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던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고위 인사들은 사표를 내야 했다.

개혁조치는 취임 6개월 후 ‘금융실명제’ 도입으로 이어졌다. 긴급재난명령으로 발동한 ‘금융실명제’는 정치인을 비롯한 사회 기득권층의 불법 자금 은폐수단이었던 ‘차명계좌’를 불법화한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정치·경제적 비리를 차단하는 것은 물론, 투명한 금융질서를 정착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전격적으로 단행한 개혁조치에 대해 시민은 환호했고, 김영삼 대통령을 ‘개혁의 화신’으로 인식됐다. 또 시민은 다름 아닌 김영삼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전격적 개혁조치들이 가능했다고 믿었다.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무려 95%까지 치솟았고, 10대 청소년들을 그를 ‘우상’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이 같은 역사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서거 직전까지 그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가 개혁을 추진할 정당성을 부여했던 자산은 다름 아닌 ‘도덕성’이었으나, 그의 아들이 구속됨으로써 정당성의 위기를 초래한 데 이어 정치적 레임덕을 맞게 됐다. 군사독재의 보상체계 속에서 안주·성장해왔던 관료사회도 ‘伏地不動’으로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이 같은 관료 통제의 실패는 임기 말 초유의 IMF 국가부도 사태로 이어지게 됐다. 그리고 시민은 그를 외면했고, 그는 쓸쓸한 퇴임을 맞아야 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과정은 반복됐다. 시민은 개혁이든, 성장이든 자신들의 요구를 대통령이 모두 구현해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시민은 선출된 대통령에 대해 곧 실망하게 됐고, 레임덕을 맞은 대통령은 쓸쓸히 퇴임해야 했다. 또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던 시민도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또 다른 대통령을 뽑고 그에게 시대적 난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주기를 바란다.

사실 우리 내부에는 메시아주의가 잠재해 있다. 지난 60년부터 개발독재를 거치면서 ‘1인 카리스마’ 중심의 사회정치적 인식에 익숙해졌다. 군사독재는 성장을 위해 모든 정치적 자원을 동원했고, 그 모든 성과는 독재자 개인의 리더십의 덕택으로 칭송했다. 반면, 시민은 단순히 영웅을 기대하고 또 칭송하는 것에 그 역할이 제한됐다. 김영삼 대통령 당선 이후 민주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됐음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대통령에 대한 인식은 메시아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공공성의 위기를 불러오는 것들

공공성은 개인의 주체성이 확립될 때에만 비로소 성립된다. 근대 시민사회의 등장과 개인의 주체성 확립은 동시적 과정이었다. 근대 시민사회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개인은 국가 성립의 원천이자 기원으로 규정됐다. 국가사회는 이런 개인들의 합의로 설명되고 합의에 의해서만 정당성을 부여받게 됐다. ‘사회계약론’은 바로 이 같은 인식의 이론적, 압축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개인의 주체성만을 강조하게 될 경우 자유주의로 경도되기도 했다. 시장에서의 거래의 자유를 정치·사회적으로 확장한 자유주의가 유일한 대안으로 주장되기도 했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자유방임주의’로 왜곡되거나 ‘빈부격차’ 등과 같은 사회정치적 갈등을 불러오면서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관심(공동체주의)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공공성을 논의할 때 개인의 주체성과 공동체의 존립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문제는 언제나 커다란 화두였다. 개인의 주체성을 배제하고 어떤 형태의 공공성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렇다고 공동체가 해체될 수도 있는 자유방임주의가 옹호될 수도 없다. 공동체 해체가 자칫 개인의 주체성은커녕, 생물학적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공동체주의도 자칫 위험에 노출되기는 마찬가지이다. 공동체의 관점과 이익을 앞세워 개인의 주체적 상황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사태를 역사적으로 직접 경험한 바가 있다. 20세기 초 인류는 정치·경제적 민주주의 확대와 함께 개인 주체성과 자유가 신장돼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 같은 역사적 전개는 또 다른 갈등을 불러왔다. 그리고 그 위기를 극복한다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유보한 파시즘이 나타나 우리 문명을 초토화시키기도 했다.

파시즘이 공공성에 부합한다고 강변하는 사람은 없다. 공동체와 전체의 이름으로 개인의 주체성을 훼손하는 일은, 어떤 형식이든 공공성에 부합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개인의 주체성을 누가 대신 보호해주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적 가치가 개인의 주체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는 개인이 공동체의 주체가 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개인과 공동체의 균형이 중요하다면, 그 균형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 또한 개인 주체들의 역량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 시민은 자신들의 주체성을 바탕으로 건강한 공동체를 관리, 유지할 수 있는 역량을 가졌을까? 우리는 과연 공공성의 주체로서 시민은 깨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메시아는 오지 않는다

이 질문에 대해 마냥 낙관적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 우리의 유전자에는 아직 과거 군사독재 파시즘의 경험들이 남아있다.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위대한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물론, 그 영웅(?)에게 나의 모든 주체성을 헌신·양보해왔던 과거의 향수(?)에 젖어있는 시민도 여전히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남아있다. 이는 특정 정치이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일부 보수정치세력에 이 같은 향수가 특별히 강하게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진보진영에도 자신들의 의제를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를 희망하는 가운데 메시아에 대한 특별한 기대가 관찰되기도 한다.

위험한 것은 진보진영 내에 있는 파시즘적 경향이다. 사실상 보수 파시즘에 대한 평가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한국 보수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하나가 이명박으로 대변되는 시장적 보수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가 박근혜로 대변되는 이념적 보수이다. 물론 양자 모두 부패로 몰락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둘 다 모두 시대적 유효성의 종말 또는 몰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념적 보수는 지금도 여전히 파시즘적 가치를 중심으로 결집되고 있지만, 그것이 더 이상 시대적 타당성을 갖기는 힘들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진보진영에서 파시즘 경향은 아직까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개혁이 지체되고 그로 인해 갈등이 심화될 경우 진보진영 내부의 파시즘이 슬며시 고개를 들 수도 있다. 사실 우리 사회는 해결해야 할 수많은 위기 요인이 있고, 그 해결의 책임은 상당부분 진보에 위임돼 있다.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거나 해결이 지체될 경우, 진보 파시즘의 등장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코로나-19’ 사태가 가져올 변화는 지금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할 수 없다. 시대적 불안과 우울이 우리 사회를 지배할 수도 있다. 특히 앞으로 예상되는 세계경제의 위축은 국내에서도 다양한 갈등을 불러올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경제적 양극화이다. 경제위기가 도래하면 그 귀결은 언제나 빈부격차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세계적 수준의 갈등 요인과 별개로 우리에게는 분단이라는 매우 본질적이고도 구조적 위기 요인을 지니고 있다.

이 같은 위기가 확대되거나 그 해결이 지체될 경우, 진보 내부에서도 파시즘의 경향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일어날 수 있다. 진보 이념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진보는 민주주의 연속의 결과일 뿐, 민주주의를 부정한 별개의 가치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적 가치나 절차를 외면하고 ‘단번에’ ‘효과적으로’ 자신들의 이념이나 가치를 추구하려는 조급함을 노출하기도 한다.

대부분 시민은 자신의 주체성을 바탕으로 어떻게 정치사회 공동체를 유지, 관리해야 하는지에 대해 각성돼 있다. 그것은 지난 박근혜 탄핵에서 보여준 촛불집회에서 잘 보여주었고, 지금까지 수많은 개혁과제에 대한 그들의 인내심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아가 주체적 시민은 우리 사회를 개혁하고 공동체를 유지, 관리하기 위해 제도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그럼에도 아직 제도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진보를 과격한 행동으로 증명하려 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진보적 의제를 보다 과격한 행동과 방식으로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의 선명함을 드러내려 한다. 이런 경향의 중심에는 언제나 파시즘적 정치지도자가 자리 잡기 마련이다. 그 정치인은 과격하고 시원한 발언으로 진보 내부의 파시즘을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결집하려 한다. 그리고 결집력 있는 과격한 행동주의를 정치적 자산으로 자신의 정치적 시장을 확대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일부 시민은 그를 위해 자신의 정치적 주체성을 헌납, 포기할 수도 있다. 그 결과는 진보 가치의 종말로 이어질 것이다. 민주주의를 거부한 진보는 결국 진보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각성되지 않은 진보와 메시아주의 결합이 위험한 이유이다.

※ 출저, 『대통령의 발견』의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칼럼임을 밝힙니다.

김창호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김창호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저작권자 © 더퍼블릭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