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사이야기] 기억과 망각 사이, 역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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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이야기] 기억과 망각 사이, 역사 기록
  • 신안식 가톨릭대학교 인문사회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20.11.10 14: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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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찾아보는 역사의 기록 과정

우리는 흔히 가을을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고 하면서, 가을의 풍성함과 더불어 독서를 강조하기도 한다. 오늘날은 모든 정보를 인터넷이라는 현대문명의 총아를 통해 다양한 지식을 생성하고 얻는 매개체로 삼는다. 정보는 영상 혹은 소리로 이뤄지기도 하지만 그 최종적인 지식은 문자로 이루어지고 미래로 전해진다. 문자는 곧 문장으로 이루어지고, 문장은 글쓰기를 통해 형성되고 이뤄진다. ‘코로나-19’라는 어려운 시절이지만, 계절은 나름대로 아름다운 자태를 잃지 않는다. 이 좋은 계절에 역사에서의 기록이 생성되는 과정을 한번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역사와 기록

역사란 국가가 존재할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고, 멸망의 역사는 강자에 의해 수난을 면치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의 역사 또한 분열과 통일, 외침과 저항 그리고 위대함과 굴욕 등을 반복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 속에는 찬란하고 비약적인 시대가 있었지만, 암울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았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한 경우에도 역사의 기록은 우리 민족이 존재하는 한 시대의 면면을 이어왔다.

역사란 과거 지나간 결과를 다루는 학문으로써 인간들의 희로애락과 체취를 삶의 흔적에 따라 되새겨보는 것이다. 역사 연구의 목적이 세계사의 보편성 속에서 우리 역사의 위상을 가늠하는 데 있다면, 역사에서의 기록은 인간의 삶에 담겨 있는 보편적 가치가 우리의 삶에 어떻게 녹아 있는지를 살펴서 자신의 경험으로 되새겨 보는데 그 의의가 있다.

이런 점에서 역사 연구는 일차적으로 연구 대상 그 자체의 발전 논리를 찾아야 하고, 그런 다음 주변 문화나 역사와 비교하는 관점에 따라서 연구 대상을 바라본다. 이는 역사 흐름의 특수성과 보편성, 즉 주관성과 객관성의 입장을 고려한다는 뜻이다. 역사에 대한 평가는 어느 일방적인 평가보다는 양날의 시각으로 평가돼야 한다. 이는 곧 한국사에서 세계사적인 보편성은 무엇이고, 한국사의 고유한 발전 원리인 특수성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이런 고민을 통해서 오늘날의 우리는 추체험적追體驗的 시각으로 내가 그 사람 속에 들어가서 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다시 그 사람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역사의 사건 따위를 인식한다. 이는 또한 같은 사건 혹은 자료를 다양하게 볼 수 있는 사고를 활용해 역사 인식의 편견으로부터 탈피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일반적인 기록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개념적 명료성과 설득력 있는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이 돼야 한다. 의사소통을 문어적 혹은 구어적 형태로 대화를 통해 상대방에게 일정한 영향을 주고받는 행위로 규정한다면, 역사에서의 기록도 그러한 영향을 주고받는 의사소통의 한 방식이다. 따라서 역사에서의 기록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독자讀者와 청자聽者 그리고 학문 외적인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수적이다.

역사와 역사가

‘역사’라는 말은 수많은 사람에 의해 정의됐다. 그러나 그 정의들이 곧 바른 것이 아니거나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에 대해 끊임없이 묻게 된다. 혹자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역사가를 ‘지옥의 심판관’ 또는 ‘공동묘지 관리인’ 등으로 정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왜 그러한지는 많은 다른 생각들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에 대한 정리된 정의에도 불구하고 매번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곤 한다.

문제는 역사에 대한 정의가 어느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시대와 지역 그리고 인종과 문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디서든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역사에 대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역사는 역사가의 개인적인 경험의 소치로서 지역·국가·문화 간의 우열 다툼의 소산에 불과하게 된다. 역사의 딜레마는 사실 역사가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시작된다. 비록 역사가의 개인적인 경험이 보편적이라 할지라도 개인적인 판단으로 역사를 정의하기 때문에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역사가의 역사 서술은 그 자신의 개인적인 작업이다. 그런데 역사가의 작업이 객관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사실이 갖는 객관성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 사실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에 대한 지식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제한적인 과거 사실은 역사가의 작업을 통해서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역사가는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를 섭렵하면서 현재의 가치와 부합되는 사실들을 발견해 낸다. 이러한 절차를 통해 비로소 과거는 현재에 동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역사가는 주로 문자로 기록된 과거의 사실들을 더듬어 간다. 기록은 주관적일 수도 객관적일 수도 있다. 역사가는 주관적인 과거 사실의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동시대의 다른 과거 사실들을 비교 참고해 주의 깊게 역사적 사실을 도출해 낸다. 역사가가 객관적인 사실을 서술할 때 그 사실로부터 무엇을 얻을 것이지, 무엇을 찾을 것인지의 명료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작업에 임한다. 이러한 역사가의 노력으로 과거는 현실 속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으며, 현실이 품고 있는 과거 연원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 이는 또한 미래에 대해 전망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셈이다.

기억과 망각 사이의 역사가

역사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육감을 통해 겪기 전에 먼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시작해 오로지 겪음을 통해서 생각하고 있는지 분별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생각과 더불어 (무언가를) 겪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겪는 대상을 선택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생각 없이 겪음을 통해서 생각을 갖춰 간다면 이는 어쩌면 우리가 이룰 수 없는 최고의 가치일 것이다.

역사의 현장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과거의 사실은 역사가의 애국심이나 국가관 혹은 이념에 따라 선택적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주관적인 환경은 기억하고 싶은 과거와 잊고 싶은 과거로 분리돼 하나의 역사관으로 발전한다. 역사가는 민족적 혹은 사회·경제적 관점 등을 통해서 역사를 기술한다. 역사가의 관점은 편협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역사가의 기본적인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 인간으로서의 역사가는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틀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이 가꾸고 길들여 온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행해지며 기억하고 싶은 과거의 사실들을 마음대로 정리 정돈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가의 권리는 과거 사실의 조작·은폐·왜곡을 위해 쓰일 수도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을 기억할 수도 망각할 수도 있지만, 과거의 사실 자체를 왜곡하거나 비논리적인 억지의 희생물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역사가는 자신이 원하는 사실을 강조할 수 있으며, 다른 역사가와 다른 의견이 있을 때는 논거를 통한 토론이나 논문과 같은 논리적 대응물을 통해 자신의 견해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도 물질적인 기반의 중요성이 확인된다. 부유한 나라일수록 역사에 대한 투자를 많이 해 수많은 역사가를 확보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그들의 역사는 질적 양적인 축적을 이루게 된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부강한 나라의 전제 조건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역사의식을 통해 강한 의지와 용기를 지닌 국민이 양성되고, 바른 역사를 통한 국민 교육은 바른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확고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국가의 존재 근거를 강조함으로써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도 삼을 수 있다.

"역사가의 주관이 섞일 수 있지만 역사의 왜곡을 항상 경계하고 끊임없이 객관성을 추구해야"

왜곡을 통한 의도적인 역사의식의 함양은 장기적으로는 국민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궁극적으로는 국민을 분열시켜 국가적 기반이 무너지는 결과를 낳게 할 것이다. 잊고 싶은 과거와 기억하고 싶은 과거는 역사가에게 주어진 취사 선택의 권리이지만, 과거 사실 자체의 왜곡은 비인간적인 행위로써 비난받아 마땅하다. 따라서 역사가는 자신의 성취가 보편적인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역사가의 숭고한 사명이다.

전통시대의 역사 기록과 사관

역사 기록은 역사 연구의 기본이다. 동양에서는 역사 기록을 전문적으로 남기는 자를 사관史官이라고 했다. 사관의 역할은 군주의 언행言行과 정사政事를 기록함으로써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고, 풍속의 미악美惡과 사정邪正을 가려서 유교적인 왕정의 덕치 이념을 구현하는 데 있었다.

우리나라 사관(史館, 역사를 편수하는 관청)의 기본체제는 고려시대에 갖춰졌다. 고려 초기에 사관이 설치되면서 역사 서술이 개인 저술 중심에서 국가 편찬 중심으로 바뀌었는데, 이로써 덕종(1031~1046) 때에 이르러 사관들이 처음으로 태조(918~943)에서 목종(997~1009)에 이르는 ‘7대 실록(七代實錄, 태조·혜종·정종·광종·경종·성종·목종)’을 편찬할 수 있었다. 그 후 성리학이 도입 보급됨에 따라 사학史學이 융성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적 기반이 마련됐으며, 사관의 정치적 비중도 종래보다 훨씬 더 커졌다.

조선왕조는 유교 국가였던 만큼 사학이 경학經學과 더불어 유자의 필수 교양으로 간주했으므로 역사에 대한 인식이 전시대보다 더욱 높아졌다. 따라서 사관은 모든 관직 가운데 가장 청요淸要한 관직으로 인정돼 문과 급제자 가운데 경사經史와 문장이 뛰어나고, 집안에 아무런 흠결이 없는 사람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그 선임 방법도 엄격하게 규정돼 있어서 사관에 결원이 생기면 전임 사관의 천거, 춘추관원의 심사, 소시召試의 3단계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임명됐다.

소시는 『자치통감강목』, 『춘추좌씨전』으로 시험을 보았는데, 이에 합격한 자를 성적에 따라 임용했다. 대교待敎[수찬관修撰官, 정8품] 이하는 윗자리가 비면 차례대로 승진했는데 서열을 엄격하게 지켰다. 봉교奉敎(정7품)는 대교 이하 사관의 자리가 모두 차고, 맡았던 시정기를 모두 완료했다는 수사장修史狀이 나온 뒤에야 다른 관직에 임용될 수 있었다. 이러한 사관의 선임 방법은 다른 관직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사관이 그만큼 중요한 직책이었음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봉교 이하의 사관은 왕의 좌우에 입시해 왕의 언행을 기록했는데, 하번검열下番檢閱은 승정원에, 상번검열上番檢閱은 춘추관에 입직해야 했으며, 책임은 8인 전원의 공동책임이었다. 조선시대의 태종 이후로 왕이 인정仁政을 편다는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나 사관의 노력과 대간臺諫의 요청 등으로 임금의 활동 범위인 경연經筵·청정聽政·조계朝啓·인견引見·행행行幸 때에 입시하거나 시종하는 범위가 점차 넓어 갔다. 그러나 이러한 입시 범위의 확대는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인사 발령과 같은 민감한 사무를 처리하는 현장인 정청에 입시하기를 요청한 것은 조선 초기부터였으나 중종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입시가 허용됐다. 이런 사관이 남긴 대표적인 기록이 사초史草였다.

사초는 실록 편찬의 중요한 자료였는데 주로 왕에게 구두로 아뢴 내용과 왕의 언행들이 기록됐다. 실록 편찬과정에서 문제가 된 것은 사관의 이름을 적어 내게 한 점에서였다. 예종 원년 『세조실록』 편찬 때에 사초에 이름을 기재해 제출토록 하자, 권신을 혹평한 데 대한 보복을 두려워해 사초를 고친 일로 ‘민수閔粹의 옥사’가 발생했다. 이때 실록의 편찬을 담당한 상위 책임자들이 모두 세조 집권의 공신들로 신숙주·한명회·양성지 등이 생존해 있으면서 실록 편찬의 책임을 맡자, 이들의 비행을 기록한 사관이 신변의 위협을 느껴 사초를 고친 것이 알려져 처벌을 받은 사건이다. 이는 물론 사관의 역사의식이 부족한 데서 발생한 일이지만, 이처럼 사관의 이름을 적는 일은 사관의 신변과도 직결된 문제였다.

사초에 작성자의 성명을 기록하면 ‘직필直筆’이 적어진다는 반대의견이 있었으나, 여러 차례 논란을 거쳐 예종 원년(1469)의 논의를 통해 사초 기명 원칙이 계속 유지됐다. 이는 공적 기록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 뜻이 들어 있었다. 이처럼 사관의 사초는 주관이 개입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사관을 천거한 사람은 황천皇天 후토后土의 신에게 “병필지임秉筆之任의 천거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것이므로 적임자가 아니라면 반드시 그 재앙을 받겠습니다”라는 축문을 읽어야 했다.

역사 기록의 객관성 유지를 위한 사초와 실록의 엄격한 열람 제한에도 불구하고 실록 편찬자의 정치적 입장이 편파적으로 반영돼 정권이 바뀐 뒤에 새로이 실록을 수정하거나 개수하는 사례도 간혹 발생했다. 조선시대의 『선조수정실록』, 『현종개수실록』, 『경종수정실록』 등이 정치적 상황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지금의 목소리는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

‘어떤 것에도 구애되지 않고 어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는다’라는 ‘직필’을 무엇보다 강조했던 전통사회의 기록과 같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도 기록은 계속해서 생성될 것이다. 그 기록들이 미래 역사의 기초가 된다. 미래의 언젠가가 현재를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때 내 기록들이 받을 평가는 곧 내 자신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광화문에서 목청 높여 외치는 소리가 미디어 매체를 통해 가감 없이 전달되고 있다. 오늘날의 미디어 매체들은 자신들의 공공성을 강조한다. 공공성은 책임과 의무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그것이 미래의 시간에 또다시 어떻게 평가될지 궁금하다.

신안식 가톨릭대학교 인문사회연구소 연구교수
신안식 가톨릭대학교 인문사회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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