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영화의 배경이 ‘마을’이다. 영화 주인공들의 삶의 터전 역시 그들이 사는 마을이고 동네이기 때문이다. 스크린 속 인물들은 배경이 되는 마을, 그리고 이웃들과 때로 갈등하고 협력하며 여러 이야기들을 만들어나간다. 그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엔딩이 되기도 하고 비극으로 치닫기도 한다. 앞으로 ‘마을, 사람들 그리고 영화’에서는 마을과 사람들의 케미스트리, 그들 사이의 교감과 성장, 변화를 다른 작품들을 소개한다. 그 속에서 주민자치의 바람직한 방향, 때로 반면교사의 깨달음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집콕족들이 늘어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인류는 오랜만에 사색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물론, 예전보다 더 격렬하게 OTT와 웹툰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도 사실이지만, 강제적 거리두기 때문에 적어도 타인에게 휩쓸리지 않고 자신과 주위를 천천히 둘러볼 여유는 생긴 셈이다. 사색의 주제는 역시 삶의 질과 만족도, 행복에 관한 것이다. 코로나가 촉발시킨 불확실성의 시대, 미래에 대한 계획이 어그러지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들이 허상으로 드러나면서 사람들은 보다 궁극적으로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해 목말라 있다.

유토피아의 이면 ‘다운사이징’
현재 나의 삶이 불만스럽다면, 원인을 찾아 그에 대한 돌파구를 찾는 것이 현명할 터. 여기 최첨단 기술을 이용해 더 나은 인생을 살아보기로 결심한 남자가 있다. 영화 ‘다운사이징’(Downsizing, 감독 알렉산더 페인, 2017)에서 재활치료사, ‘폴’(맷 데이먼)은 아무런 발전이 없는 삶에 무기력증을 느낀다. 그는 아내와 열심히 맞벌이를 하는데도 어렸을 때 살던 집을 탈피하지 못하는 현실에 낙담하고, 많은 이들이 선택한 다운사이징 프로젝트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몇 년 전 개발된 ‘다운사이징’은 사람을 12.7센티미터로 줄이는 혁신적인 기술이다. 소인이 된 사람들은 그들이 살기 좋은 환경을 조성해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이룬 채 살고 있다. 폴 부부가 다운사이징 박람회에서 마주한 소인들의 마을은 말 그대로 파라다이스다. 크기가 작아졌을 뿐, 모든 것을 풍요롭게 누리며 살고 있는 그들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일반인들을 소인 커뮤니티로 유혹한다. 폴 부부는 이 곳이야말로 자신들의 남은 삶을 윤택하게 해줄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영화 첫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애초에 다운사이징은 인구증가와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로 개발된다. 세계적으로 다운사이징이 합법화된 데에는 이러한 효과들이 명분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폴 부부를 비롯한 사람들 대부분은 1억이 120억의 가치를 지니는 삶에 훨씬 더 큰 매력을 느낀다. 부피가 0.0364%로 작아진 사람들은 그만큼 모든 것을 적게 소비하게 되므로 쪼들리며 살던 사람들도 갑부 행세를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다운사이징 세상인 것이다.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외피를 썼으나 사실상 대중성보다 철학에 무게를 둔 이 영화는 초반부터 이처럼 양면성을 가진 근미래 기술이 초래하게 될 다양한 문제를 제기한다. 뉴스에서는 소인들의 경제활동 규모가 터무니없이 작다는 점에 대해 토론을 벌인다. 소인의 삶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국고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소인들에게 투표권을 1인당 1표씩 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의무는 줄어드는데 반해 소인들이 똑같이 누리는 권리와 혜택에 대한 일반인들의 박탈감이 문제다.

다운사이징은 또한 금세 각종 범죄에 이용되기 시작한다. 소인들은 손쉽게 국경을 넘어 범죄와 테러에 가담하고 흔적을 감춰 버린다. 어떤 조직에서는 심지어 문제를 일으키는 이들에게 강제로 다운사이징을 시키는 ‘형벌’을 내리기도 한다. 어릴 적 ‘걸리버 여행기’에서나 봤을 법한 소인 마을의 신기하고 아기자기한 풍경들에 익숙해질 때쯤, 영화는 다소 무거운 메시지를 하나씩 꺼내놓는다. ‘실제로 이런 기술이 있다면, 당신은 시술을 받으시겠습니까’ 같은 질문은 미끼에 불과하다. 궁극적으로 이상적인 커뮤니티와 공동체에 관한 영화인 것이다.

비극은 폴이 소인 커뮤니티 중에서도 낙원으로 알려진 ‘레저랜드’에 입성하기 전부터 시작된다. 폴의 아내가 시술 직전 심경의 변화를 느끼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혼으로 돈도 잃고 사랑하는 사람도 없이 작은 아파트에 살게 된 폴은 예전보다 더 어두운 얼굴로 무미건조하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폴이 다운사이징을 준비하며 꿈에 부풀었던 시간, 지나칠 정도로 세밀하게 보여주었던 다운사이징 과정과 달리 그가 누리게 된 레저랜드의 호사스런 생활은 완전히 생략되어 있다. 천국은 죽기 전에는 결코 갈 수 없다는 사실, 유토피아란 머릿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듯 영화는 레저랜드에 대한 기대를 단숨에 꺾어 버린다. 그러던 중 폴은 매일 밤 파티를 여는 이웃, ‘두샨’(크리스토프 왈츠)과 ‘녹 란트란’(홍 차우)을 만나 다시 한 번 인생의 변곡점을 맞는다.

이상주의자의 존재 의미 ‘남쪽으로 튀어’
현실에서 유토피아를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또 있다. ‘남쪽으로 튀어’(감독 임순례, 2012)의 ‘최해갑’(김윤석)은 망망대해에서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작은 섬을 찾아 헤맨다. 일찌감치 부모님이 이주한 그 섬을 찾는다면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해갑은 믿고 있다.

TV 수신료는 물론 국민연금 납부도 거부하고 사회고발성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주민등록증 파기를 조장하는 최해갑은 극단적인 무정부주의자로 보인다. 그는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한국 국민일 필요는 없다’, ‘내가 직접 동의하지 않은 법과 제도에 순응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반사회적 인간의 궤변인 것 같지만 영화에서 돈과 명예만을 밝히는 정치인들, 의무만 강요하는 공권력의 실태를 보면 그의 논리에도 일면 수긍이 간다. 그는 국가가 본연의 기능을 상실했으며,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하는 대신 오히려 인간의 기본적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캐릭터로 따지자면 해갑이 폴보다 훨씬 유별나고 영화적인 인물이다. 폴은 팍팍한 삶에 대한 사적인 불만 때문에 다운사이징 시술을 결심했고, 그것은 최소한 제도권 하에 있는 안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해갑의 불만은 개인이 넘어서기 어려운,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을 향해 있다. 그는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국가 시스템에 저항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문제점이나 한계를 알면서도 개선의 가능성이 없다고 포기하거나 막연히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점을 감안할 때 해갑은 확실히 이상주의자다. 그러나 이상주의자가 없는 사회에는 발전도 없다.

최해갑은 가족들과 함께 고향인 들섬으로 간다. 어쩌면 해갑은 남쪽의 이름 모를 섬을 찾아 헤매는 대신 이 곳에 다시 정착해 유토피아를 건설해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핸드폰도 잘 안 터지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발전기를 돌려야 하지만 하루를 즐겁고 건강하게 사는 것만 고민하면 되는 이 곳은 해갑의 이상향과 닮아있다. 그러나 해갑의 아버지가 들섬에 기부했던 집과 땅은 국가가 접수해 버렸고, 리조트를 짓기 위해 자치단체에서 곧 허물어낼 예정이다.

해갑 부부가 온 몸으로 깡패, 포크레인, 정치인들과 맞서는 동안 섬에 몇 남지 않은 주민들과 경찰 청년은 그들을 직간접적으로 도와준다. 처음에는 해갑을 감시하기 위해 따라온 정부요원들까지도 그가 실천하고자 하는 정의에 감화된다. 비록 섬에 리조트가 들어서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해도 주민들의 생각과 힘을 보여준 것으로 들섬의 하룻밤 소동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이상적 커뮤니티, 발견 아닌 건설의 대상
폴은 두샨의 집에서 청소를 하는 베트남 반정부 활동가, 녹 란 트란을 만난다. 강제로 다운사이징 시술을 받고 추방당하다가 한 쪽 다리까지 잃은 그녀는 폴을 레저랜드와 대비되는 빈민가로 안내한다. 뉴욕의 어두운 뒷골목을 연상시키는 트란의 동네는 흥청망청 파티를 벌이던 두샨의 펜트하우스와 극단적 대비를 이룬다. 완벽해 보이던 신도시, 다운사이징 커뮤니티에도 빈부의 차가 존재하고, 가난한 이들은 부자들의 치다꺼리를 하며 겨우 먹고 산다는 사실에 폴은 충격을 받는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유사한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또한 두샨, 트란과 함께 방문하게 된 노르웨이에서 다운사이징 개발자인 요르겐 박사 부부를 만나게 되는데, 박사는 곧 지구가 파괴될 것이기에 지하시설에 들어가 지구가 자정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장 먼저 다운사이징 시술을 받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이 마을에서는 여전히 환경오염을 걱정하고 있다. 인류의 미래를 위한다는 점은 본받을 만 하지만 이미 실패한 다운사이징 프로젝트 이상으로 지하시설 계획은 무모해 보인다. 지하시설은 다운사이징 1세대가 또 다시 만들어낸 이상향에 불과하다.

해갑 부부가 남쪽에 있는 섬을 찾아 떠나는 결말과 달리 폴은 지하로 들어가는 대신 트란과 함께 그녀의 이웃들을 돕기로 한다. 누가 더 옳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다만, 이상적인 커뮤니티는 발견의 대상이 아니라 건설의 대상이라는 것, 그 공사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일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윤성은 영화평론가
윤성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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