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져라, 꺼져라, 잠시 동안의 촛불이여!
인생은 그저 걸어 다니는 그림자!
무대 위에서 초조해하며
거들먹거리다가 사라져 버리는 것!
……
태양을 바라보는 일도 이제 지겹다.
이 세상의 질서여, 산산이 부서져라.”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의 마지막 장면이다. 『맥베스』는 인간이 이해, 통제할 수도 없는 어떤 운명과도 같은 힘으로 인해 한 인간이 비극적 종말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바로 이 마지막 장면은 인간의 권력욕과 야망이 가져온 파멸적인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스토리는 오늘날에도 흔히 있을 법한 ‘권력의 속성’에 관한 것이다. 맥베스는 용감한 장군이었다. 반란을 진압하면서 왕의 총애를 받게 됐고, 민중들도 그를 추앙했다. 그러자 맥베스에게 주변의 사람들은 나약한 왕을 제거하고 왕위를 차지할 것을 제안하며 그를 유혹한다. 여기에 마녀들이 나서 그의 권력 의지에 불을 지핀다. 지금으로 비유하면 언론과 정치인들이 나서서 유명인에게 야망을 부추기는 것과도 흡사하다.

맥베스와 벤쿠오가 세마녀는 만났을 때 Theodore Chasseriau 작품.(출처 : 위키미디어)
맥베스와 벤쿠오가 세마녀는 만났을 때 Theodore Chasseriau 작품.(출처 : 위키미디어)

이들의 부추김에 따라 맥베스는 거사에 나선다. 결국 왕을 살해하고 온몸을 왕의 피로 물들인다. 맥베스는 반역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권좌에 올랐다. 하지만 스스로 정당성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언제나 불안했다. 권력을 탈취한 맥베스는 민중의 저항이 두려웠다. 피에 젖었던 자신의 손을 떠올리며 공포에 시달렸다. 자신도 누군가의 공격을 받아 언제든 권력을 다시 빼앗기고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맥베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
그는 저항하는 민중들을 무력으로 억압하면서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그것은 곧 폭정으로 이어졌고 저항은 불길처럼 번져 갔다. 반란군에 의해 포위됐고, 권력의 종말을 예감한 맥베스는 자신이 알 수 없는 어떤 운명의 힘에 대해 한탄한다. 자신은 자신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자신도 알 수 없는 운명의 그림자였고 무대 위의 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
영화와 소설 속에 그려지고 있는 영웅들은 대체로 비극적인 경향이 있다. 영웅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귀결될 때에만 ‘영웅’으로 기억될 수 있는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영웅은 실현되지 못한 메시아로 남을 때에만 성립될 수 있는, 그래서 비극으로 표상되는 매우 모순적 서사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같은 영웅의 미학은 가끔 영웅사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영웅사관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역사관 중의 하나이다. 현실을 소수의 영웅에 의해 진보하는 역사의 결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 같은 영웅사관은 우리에게 깊이 뿌리박고 있는, 매우 익숙한 역사 인식이기도 하다. 따라서 영웅사관은 특별한 인식론적 노력 없이도 쉽게 받아들이게 되는, 매우 용이하고 편리한 역사 인식이다.

역사적 진실은 어떤 인식론적 노력 없이 편리하고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역사적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시민은 불가피하게 지난한 인식론적 투쟁 과정을 거친다. 문제는 영웅주의 역사관은 이 같은 인식론적 노력을 배제한 역사 인식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는 역사적 진실에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역사를 왜곡하기도 한다. 이처럼 대중의 인식에 왜곡·편승해 영웅을 미화한 것이 파시즘이다. 파시즘은 저급한 역사 인식을 자신들의 영웅적 미학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영웅의 미학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역사의식에 대한 통찰의 부재이다. 영웅 서사에서 비극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운명적인 힘에 의해 좌절되거나 희생됨으로써 발생한다. 영웅 서사가 언제나 비극적인 이유는, 영웅은 미학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역사에 대한 성찰의 결핍에서 기인한다.

영웅이 아니라 시대정신
지금 검찰개혁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쟁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검찰개혁이냐, 아니면 검찰통제냐’로 요약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두 가지 상반되는 의제가 경쟁하고 있으며, 각 의제를 표방한 진영은 서로 피할 수 없는 충돌로 치닫고 있다. 물론 우열은 이 두 가지 의제 중에 어느 것이 더 시대정신에 부합하는지에 따라 갈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의제의 경쟁이 정치적으로 뜨겁게 맞부딪히면서 서로에 대한 비판과 옹호가 얽히고설킨 상황에서 무엇이 시대정신에 부합하고 옳은 관점인지 판별하기 쉽지 않다.
경쟁하는 의제를 놓고 시민의 시대적 감각을 혼란케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물 중심의 갈등으로 몰아가는 전략이다. 의제가 가지는 시대적 의미를 외면하고 단순히 정치적 인물들의 경쟁으로 변형시켜 상황을 모호하게 몰아가게 될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특별한 인식론적 노력 없이도 인물로 표상되는 갈등으로 몰아 시민에게 어떤 사태를 각인시키는 쉬운 방법일 수도 있다. 우리의 언론과 지식사회도 가끔 어떤 시대적 의제가 가진 정신을 외면하고 정치적 인물들의 경쟁으로 몰아가 논점을 흐려버리게 만들어버린 경우가 적지 않다.

검찰개혁을 둘러싸고 정치적 갈등을 보인 서초동 집회(좌)와 광화문 집회(우)
검찰개혁을 둘러싸고 정치적 갈등을 보인 서초동 집회(좌)와 광화문 집회(우)

경쟁하는 의제를 놓고 시민의 시대적 감각을 혼란케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물 중심의 갈등으로 몰아가는 전략이다. 의제가 가지는 시대적 의미를 외면하고 단순히 정치적 인물들의 경쟁으로 변형시켜 상황을 모호하게 몰아가게 될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특별한 인식론적 노력 없이도 인물로 표상되는 갈등으로 몰아 시민에게 어떤 사태를 각인시키는 쉬운 방법일 수도 있다. 우리의 언론과 지식사회도 가끔 어떤 시대적 의제가 가진 정신을 외면하고 정치적 인물들의 경쟁으로 몰아가 논점을 흐려버리게 만들어버린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오늘날 저널리즘은 어떤 사안도 인물대결로 몰아가는 선정적 관점을 선호한다. 물론 ‘갈등’은 언론이 뉴스를 선별하는 주요한 기준인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 갈등이 세력과 인물(특히 정치적 인물)로 표상시키는 것은 대중의 인식에 부응하는 노력의 하나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사태의 본질에 벗어나지 않은 범위 내에서 허용될 수 있는 노력이다.

오늘날 언론은 가끔 갈등을 의도적으로 부추기고 갈등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인물을 영웅으로 만들기도 한다. 과거 언론이 뜬금없이 군사독재 지도자를 영웅으로 미화한 적도 있지만, 대체로 의도적으로 조성한 갈등의 중심인물 중 하나를 영웅으로 등장시키는 것이 그들의 일반적인 전략이다.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까
갈등을 인물(정치적 인물)로 표상하는 것은 일정 부분 불가피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시대정신과 사태의 본질을 왜곡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허용될 수 있다. 따라서 언론과 지식사회는 끊임없이 자신의 기록들이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를 성찰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성찰하는 인식, 즉 역사 인식의 부재는 결국 비극적 결과(또는 인물)을 만들어 낼 뿐이다. 그것이 허구적 인물이든 실제적 인물이든, 시대정신과 역사적 성찰에 기반을 두지 않는 한 그 인물은 비극적 결말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는 지난 대통령 탄핵에서 다시 한번 그 비극이 확인한 바 있다.

역사가 지금의 갈등을 기록한다면, 검찰개혁을 둘러싼 논란에는 ‘권위주의 청산’이라는 본질이 놓여있다고 정의하고, 그 개혁에 대한 저항이 다양한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고 기술할 것이다. 1987년 이후 민주화로 군사독재정권의 후퇴로 정치적 민주화가 일정부분 성취되기도 했지만, ‘군사독재의 보상체계’ 속에 안주해오던 제도권력은 여전히 개혁되지 않은 상태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하고 있었고, 이들의 특권과 반칙을 개혁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갈등이 발생했다고 기록할 것이다. 나아가 사회의 여론을 과잉대표하고 있었던 언론과 군사독재의 폭력성을 옹호하던 검찰이 바로 그 갈등의 중심축을 구성하고 있다고 분석하는 것도 잊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로부터 파생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에 대한 우려들도 함께 소개할 것이다. ‘검찰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다양한 조치들이 자칫 공권력에 대한 정치적 편향과 통제를 야기할 수도 있었다는 지적도 기록해 둘 것이다. 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세력들이 검찰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그 같은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고 해석을 내놓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이 ‘검찰개혁’이라는 시대정신을 대신할 수는 없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의도하는 정치적 정략도 시대정신 앞에는 무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대로 이 같은 의도를 부각시켜 개혁을 좌절시키려는 시도도 결코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를 빌미로 ‘검찰개혁’에 반대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특정 인물을 영웅화하는 것 또한 결국 비극적 결말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자율을 넘어, 견제와 균형으로
‘검찰개혁이냐 검찰통제냐’는 현 단계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작금의 갈등이 ‘정권의 검찰통제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은, 검찰의 자율성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인식을 강조한다. 현 단계 민주주의는 사회의 각 부분이 ‘자율성’을 확대하는 것으로 실현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검찰도 선출된 대통령은 물론, 사회의 모든 분야로부터 자율성을 갖는 것이 작금의 검찰개혁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자율성은 개혁을 통한 정상화를 전제한다. 군사독재의 보상체계 속에서 권력을 키워온 검찰이 자신의 기득권과 잘못된 권한 행사를 청산할 때에만 검찰의 ‘자율성’이 옹호되고 정당화될 수 있다. 민주화 과정에서 ‘자율성’이 강조됐던 것은 군사독재가 사회 각 부분을 수직적으로 통제하던 상황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군사독재 사회는 청와대 중심의 정치권력이 경제사회와 시민사회를 지시·명령하던 체계였고, 검찰은 그 지시·명령체계를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물리적 기구였다. 이 같은 지시·명령사회에서는 사회 각 부분의 ‘자율성’이 시대적으로 중요하고도 정당한 요청이었다.

하지만 독재권력이 퇴각한 이후 우리 사회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수직적 지시·명령체계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권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견제를 받고 있다. 크게는 의회와 사법부로부터는 물론이고, 작게는 언론과 시민사회로부터 견제를 받고 있다. 정치의 본질상 유권자의 평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둘러싼 정치권력 내부의 경쟁도 정치권력이 불가피하게 겪어야 할 운명이다.

아직도 우리 정치 현상을 ‘제왕적 대통령제’로 평가하려는 것은 명백히 후진적 인식이다. 물론 ‘다수’가 가져올 수 있는 권력의 독점은 우려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은 시민의 평가와 정치세력 내부의 경쟁의 결과인 만큼, 그것을 해소하는 것 또한 시민의 선택과 정치세력들의 경쟁으로 해소돼야 한다.

오늘의 정치 현상을 ‘제왕적 대통령제’로 인식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인 발상임을 증명해준 것은 최근의 대통령 탄핵이었다. 최근 자신의 권한을 여전히 제왕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는 착오적 시대 인식을 가진 대통령들이 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이 탄핵구속됨으로 그 같은 인식은 명백한 시대적 실패라는 점이 증명됐고, 이 같은 결과야말로 ‘제왕적 대통령제’ 인식이 후진적이고 시대착오적임을 보여주었다.

공공성의 핵심 : 시민에 의한 민주적 통제
정치권력이 ‘견제와 균형’에 의해 권력분산이 이뤄진 것처럼, 사회 각 부분도 견제를 받아 균형을 이뤄야 한다. 특히 ‘군사독재의 보상체계’ 속에 안주성장해왔던 언론검찰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이런 지점에서 ‘자율성’을 민주화로 포장하는 것은 자신의 낡은 기득권을 유지강화하고자 하는 반개혁적 논리에 불과하다.

언론과 검찰을 포함해 우리 사회의 모든 부분은 어떤 형태로든 공적인 통제를 받아야 한다. 정치사회는 물론, 경제사회나 시민사회 어느 누구도 공공성을 기본가치로 하는 민주적 통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정치인과 정당은 선거를 통해 평가견제받고 있으며, 경제사회나 시민사회 또한 위임받은 공적 기구를 통해 통제견제받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견제와 균형’이라 할 수 있다. ‘견제와 균형’이야말로 공공성에 기반을 둔 통제(공적 통제)를 의미하며, 결국에는 공적 가치 실현의 주요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공적 통제’의 근본가치가 시민에 의한 민주적 통제라고 한다면, 그것을 구현할 수 있는 도구가 바로 ‘견제와 균형’이다. 어떤 권력도 견제받지 않는 독점적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 모든 권력은 다른 권력에 의해 견제받아야 하고 다른 권력과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이 같은 ‘견제와 균형’을 통해 민주주의 궁극적 가치인 ‘시민에 의한 민주적 통제’를 구현하는 것이다. 지금 검찰개혁이 시대적 요청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 이상의 글은 졸저 『대통령의 발견』, 523쪽의 내용 일부를 다시 각색·보완한 것입니다.

김창호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김창호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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