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화’라는 현상
1990년대부터 서구 학계에서는 새로운 학문용어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일상어가 된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이 그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와 기술적으로는 교통과 통신(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는 “시공간의 압축”(time-space compression, 데이비드 하비)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이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은 처음에는 ‘세계화’라는 번역어로 국내에 소개됐는데, ‘세계화’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신자유주의와 같은 ‘경제적 지구화’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의 세계적 전파다. 하지만 ‘세계화’라는 번역용어는 시공간의 압축이나 지구적 문화와 같은 현상들은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전한 개념으로 인식됐다.

‘지구화’라는 번역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아마도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 1944~2015)의 『Was ist Globalisierung?』(1997)의 번역서부터일 것이다. 영어로는 “What is globalization?”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우리말로는 『지구화의 길』(조만영 옮김, 2000)로 번역됐다. ‘세계화’가 아닌 ‘지구화’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 번역어는 당시 서구의 ‘globalization’ 담론에 대한 울리히 벡의 비판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울리히 벡은 globalization을 경제적인 세계화로만 이해하는 것은 globalization의 전체적인 측면을 놓치는 오류라고 지적하면서, globalization은 정보·문화·생산·생태 등의 영역에서 전 방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위험의 globalization’(globalization of risk)에 대해서는 이미 1986년에 쓴 『위험사회(Risk Society)』에서부터 강조하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은 위험이 지역이나 국가를 넘어서 지구적 차원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Was ist Globalisierung?”의 번역어로 ‘세계화’가 아닌 ‘지구화’를 택한 것은 울리히 벡의 이러한 비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구화의 길』에서는 ‘지구화’를 비롯해 지구성(globality), 지구주의(globalism), ‘성찰적 근대성’(reflexive modernity)과 같이 당시 서구 학계에서 논쟁의 중심이 되고 있는 개념들을 상세히 논하고 있다. 이 점은 지구화로 인해 ‘지구성’이라는 새로운 인식이 생기게 됐고, 그것이 ‘근대성’과의 맥락에서 논의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지구화의 파장
한편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매즐리쉬(Bruce Mazlish. 1923~2016)는 지구화를 프랑스혁명에 비유하면서 ‘지구화혁명’이라고 표현했다(「The New Global History」, 2006). 매즐리쉬에 의하면, 프랑스혁명과 지구화혁명은 비록 수단 상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같이 기존의 권력체제를 전복해 새로운 힘과 주권을 위한 새로운 길을 열었으며, 기존의 장벽을 허물고 색다른 방식으로 정체성과 경계를 초월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화는 프랑스혁명보다 더 큰 영향력과 심도를 지니고 있으며, 그 효과 역시 전 지구적이다. 그만큼 지구화가 발휘하는 힘과 파장이 크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지구화에 대한 논의는 경제학, 국제관계학, 정치학, 역사학, 지리학, 종교학 분야 등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특히 종교학에서는 종교사회학자들의 주도로 ‘지구화와 종교’라는 주제로 활발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크로아티아 출신의 미국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지구화시대의 종교의 역할에 주목했다. 그는 『인간의 번영』(양혜원 옮김, 2017)에서, 지구화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으며, 지구화를 그 그림자에서 구해 내려면 종교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지구화는 생태적 재난과 같은 영향에 맞설 도덕적 자원이 부족한데, 이 부분에서 종교의 역할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국가적 공공성에서 지구적 공공성으로
최근에는 ‘지구종교’(Global Religion)라는 용어로 세계종교를 지구적인 맥락에서 재서술하는 시도도 이뤄지고 있다. 또한 사회학 분야에서도 ‘글로벌’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사회학 서적들이 출판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로빈 코헨과 폴 케네디의 『Global Sociology』다. 2000년에 초판이 나온 이래로 2013년에 3판까지 나와 있다. 우리말로는 『글로벌 사회학』이라고 번역돼 있는데(박지선 옮김, 2012), 글로벌을 우리말로 바꾸면 ‘지구사회학’이 될 것이다.

이처럼 서양에서는 1990년대부터 지구사회학(Global Sociology), 지구종교학(Global Religious Studies), 지구사(Global History), 지구인류학(Global Anthropology)과 같이, 각 분야에서 ‘글로벌(지구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연구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학문적 경향을 ‘지구학’ 또는 ‘지구인문학’이라고 명명하고, 오늘날 인류가 부딪히고 있는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국가’ 중심의 공공성에서 ‘지구적 공공성’으로의 전환이 필요함을 제창하고자 한다.

"지구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인간과 국가 중심의 공공성에서 지구적 공공성으로의 전환 필요해"

지구화의 양면성
‘지구학’의 핵심주제는 ‘지구화’이다. 지구화는 “전 지구가 하나로 연결돼 간다[化]”는 의미이고,‘지구화시대’(global age)는 이와 같은 “지구화가 전개되는 시대”를 말한다. ‘지구화’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시점은 1990년대이다. 전 세계에서 쉽게 목격되는 맥도널드, 스타벅스, 그리고 WHO, WTO와 같은 초국가적(transnational) 기구들은 지구화 현상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현대사회는 시간이 갈수록 상호 관계가 긴밀해지고 서로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는데, 지구화는 이러한 변화를 가장 잘 포착하는 개념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지구화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다양한 해석이 이뤄지고 있다. 어떤 연구자들은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경제적 과정이 지구화의 핵심이라고 인식하는 반면, 다른 연구자들은 정치나 문화 혹은 이념을 지구화의 핵심이라고 본다. 이에 대해 가장 대표적인 지구화 연구자인 맨프레드 스테거(Manfred B. Steger)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 비유를 들면서, 이러한 관점들은 지구화 현상의 중요한 측면을 정확하게 파악하고는 있지만, 지구화라는 복잡한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지구화란 “지구적 차원의 상호연결성이 강화되는 것”이라고 간결하게 정의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상호연결성의 글로벌화, 즉 개인, 집단, 사회가 하나의 지구 안에서 서로 긴밀하게 상호작용을 하는 과정이 지구화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최근에 개정판이 나온 지구화 입문서에서 지구화에 대한 설명을 지구사적(Global History) 이해를 시작으로 해 경제적·정치적·문화적·생태적·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다양하게 전개하고 있다(「Globalization: A Very Short Introduction」, 2020).

한편 지구화가 좋은가 나쁜가를 둘러싼 논쟁도 진행 중이다. 지구화는 위험성과 가능성이라는 양명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 인권과 평화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지구적으로 확산시켜 더욱 발전시키고 공유하는 데에는 기여했지만, 경제적 불평등이나 혐오 또는 기후위기와 “위험의 지구화”(울리히 벡)는 지구화의 어두운 측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도 출신의 지구사 연구자인 디페시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는 지구화와 지구온난화의 동시 발생에 주목했다(조지형 외, 『지구사의 도전』). 지구화는 지구온난화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또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은 초연결사회가 가져온 재앙으로, ‘질병의 지구화’에 속한다. 그래서 혹자는 ‘탈지구화’를 논하기도 하고, 지구적 연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등, 지구화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뜨겁다.

지구학(Global Studies)의 대두
울리히 벡의 지적처럼 지구화는 지난 30여 년 동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진행돼 왔다. 이와 같은 지구화의 다양한 측면을 이해하기 위해서 각 학문 분야에서도 지구화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을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분야를 ‘지구학’(Global Studies)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국내 역시 지구학에 대한 관심은 높지만 다소 제한적인 느낌이 든다. 여러 대학에서 ‘Global Studies’를 표방하고는 있는데, 대부분 국제관계나 지역연구, 또는 국제통상과 같은 기존의 프로그램을 ‘지구학 프로그램’으로 확대 재편해 설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각 학문 분과에서 지구화 현상을 다룰 경우에는, 앞에서도 소개했듯이, ‘global’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붙이고 있다. 사회학의 ‘global sociology’와 역사학의 ‘global history’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global sociology’는 우리말로 ‘글로벌 사회학’이라고 번역되고 있지만, ‘global history’는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지구사’라고 소개되고 있고, 중국에서도 ‘전구사全球史’로 통용되고 있다.

지구사(global history)는 지구학 중에서도 특히 최근에 연구가 활발한 분야이다. 지구사는 크게 두 분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빅히스토리이고 다른 하나는 주제별로 지구화 과정을 다루는 분야이다. 빅히스토리로서의 지구사는 선사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구가 하나로 연결돼 가는 과정을 거시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한편 대표적인 지구사 연구자인 매즐리쉬는 지구사를 “지구화 과정에 대한 역사적 성찰”과 “지역이나 국가의 층위가 아닌 지구적 층위에서의 연구”로 정의하고 있는데, 지구사의 고유한 영역은 전자에 있다고 보고 있다(조지형, 「새로운 세계사와 지구사」, 『역사학보』 173, 2002).

근대학문의 유럽중심주의
한편 서양에서 지구사가 대두되게 된 주된 원인은 서구중심주의와 근대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일찍이 울리히 벡은 『지구화의 길』에서 20세기에 서구에서 탄생한 학문들은 ‘국가’ 중심의 학문이었다고 비판했다. ‘국사’나 ‘국문학’과 같이 국가 단위로 학문이 이뤄져 왔기 때문이다. ‘세계사’(World history)는 이러한 ‘국사’들의 집합체이다. 그런데 이때 세계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유럽’이었다. 그 이유는 근대화의 시작이 유럽에서부터라고 설정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이 쓴 세계사는 서양에서 시작된 근대화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돼 갔다고 하는 ‘서구 근대사의 지구적 적용’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사와 탈유럽중심주의
이에 반해 최근에 등장한 ‘지구사’는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되고 있다. 대표적인 지구사 연구자인 독일의 세바스티안 콘라드(Sebastian Conrad)는 2016년에 출판한 『What is Global History?』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구사’는 그동안 역사가들이 과거를 분석하기 위해 사용해 왔던 도구들이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는 확신에서 탄생했다. … 특히 근대 사회과학과 인문학이라는 두 개의‘태생적 결함들’이 우리로 하여금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과정들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고 있다. 이 결함들의 기원은 19세기 유럽에서의 근대 학문의 형성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첫 번째 결함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탄생이 (국민) 국가에 얽매여 있었다는 것이다. … 역사는 대부분 지역에서 국사國史에 한정돼 있었다. 두 번째 결함은 근대 학문 분야가 지극히 유럽중심적이었다는 것이다. … 국가, 혁명, 사회, 진보와 같은 분석적 개념들은 구체적인 유럽의 경험을 어디에나 적용할 수 있다고 하는 (보편적인) 언어의 이론으로 전환시켰다. … 지구사는 근대 학문의 두 개의 불행한 반점 (=태생적 결함)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이다.     - 『What is Global History?』 pp.3~4 -

여기에서 콘라드는 근대의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은 19세기 유럽에서 탄생했는데, ‘국민국가의 탄생’과 같은 유럽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반면에 최근에 대두되고 있는 지구사는 국가 중심과 유럽 중심이라는 두 가지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시도되고 있는 새로운 역사서술 방식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지구사 연구자들이 ‘세계(world)’라는 말 대신에 ‘지구(globe)’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이유는 ‘세계’와는 달리 ‘지구’는 서구중심주의에 오염되지 않았고, 국제적(international)이나 초국가적(trans-national)에서와 같은 ‘국가’를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사(world history)에서 지구사(global history)로
한국의 대표적인 지구사 연구자인 조지형도 지구사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 문제를 “유럽중심주의 극복”으로 설정하고 지구사는 유럽중심주의, 중화주의, 자민족중심주의, 국가(일국)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각과 방법론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특히 지구사는 20세기 후반의 지구화 과정과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기 때문에 선호도가 높았다고 한다(「지구사의 미래와 역사의 재개념화」, 『역사학보』 200, 2008).

뿐만 아니라 지구사는 상호관계성과 상호의존성의 관점에서 다양하고 복잡한 층위들에 얽혀 있는 인간의 경험을 살펴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자연과 인간 사이의 균형 즉 공생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반면에 종래의 세계사에는 이러한 상호관계성의 역사적 안목과 의식이 전제돼 있지 않다. 지구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지 못하고, 특정 집단·지역·국가를 중심으로 인간의 인지적 경험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조지형, 「지구사란 무엇인가」, 『서양사론』 92, 2007).

이와 같이 새로운 학문 분야로 부상하고 있는 지구사는 세계사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전 지구적 포괄성, 상호연관성, 보편성, 탈유럽중심주의에 초점을 맞추어, 인류사 전체에 대해 객관적이고 탈중심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학문의 전환
이처럼 지구적 차원에서 역사를 이해하는 ‘글로벌 히스토리’(지구사) 분야를 ‘지구역사학’이라고 부른다면, ‘글로벌 사회학’도 ‘지구사회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구종교학’, ‘지구정치학’과 같은 명명도 가능할 것이다. 이 글에서 말하는 ‘지구학’(Global Studies)은 이런 학문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마치 조선 후기에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흐름이 생겨났듯이, 서구학계에서도 1990년대부터 ‘지구학’이라고 불릴만한 새로운 학문 조류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지구학’이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다. 해외에서도 ‘글로벌’이라는 수식어는 붙고 있지만 지구사를 제외하고는 주로 사회과학과 같은 일부 분야에서만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지구학의 태생이 사회, 정치, 경제, 문화의 상호 연결성을 이해하는 사회과학 분야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히 논의되는 주제도 지구화로 인해 대두된 ‘지구적 이슈’(global issue)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가령 일리노이대학의 지구학 센터장을 역임했던 에드워드 콜로드지(Edward Kolodziej)는 지구학의 연구와 실천에 적합한 지구적 이슈로 인권과 생태적 재앙, 바이러스 감염, 대량살상무기 확산 등을 지적한다(Patricia J. Campbell 외, 「An Introduction to Global Studies」, 2010). 또한 최근에 들어서는 지구학 학회나 연구소의 주된 관심이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서양의 지구학 연구는 지구온난화나 생태문제와 같이 지구적 차원의 문제를 논의하고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인간만을 중심으로 한 사고를 넘어 생명중심적 사고로의 전환을 통해 지구공동체를 대상으로 인식 넓혀야"

‘지구인문학’의 제안
지구사 연구자인 콘라드의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을 밀고 나가면, 종래의 사회과학 중심의 ‘지구학’도 여전히 인간중심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거기에서 논의되는 지구성(Globality) 개념에는 비인간 존재들은 배제돼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차크라바르티는 지구화 이야기가 본질적으로 인간중심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지구시스템이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닫기 위해서는 인간중심주의적(Homocentric, anthropocentrism) 사고에서 생명중심적(Zoecentric, non-anthropocentrism)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The Tanner Lectures in Human Values」, 2015, pp.141, 165-177). 여기에서 차크라바르티가 말하는 ‘생명중심적 사고’는 비인간 존재들까지도 지구시스템의 일원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지구적 사고’(global thinking)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인간과 국가 중심의 근대적 인문학의 한계를 뛰어넘어 지구적 차원의 인문학을 모색하자는 취지에서 최근에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제안한 개념이 ‘지구인문학’이다. 지구인문학은 지구를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하고, 인간 이외의 존재들도 ‘지구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간주해 인문학의 대상으로 삼는 학문 분야를 말한다.

토마스 베리의 지구인문학
이러한 의미의 지구인문학에 가장 걸맞은 대표적인 학자는 토마스 베리(1914~2009)이다. 자신을 ‘지구학자’(Geologian 또는 Earth Scholar)라고 자칭한 그는 지금까지의 학문은 모두 인간이 지구를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연구됐다고 비판하면서, 지구의 목적을 위해 지구를 연구할 때가 왔다고 제창했다. 아울러 지구를 착취의 대상이 아닌 사귀어야 할 주체로 인식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생태대(Ecozoic Era)’라는 새로운 시대 개념을 제안했다(『신생대를 넘어 생태대로』, 김준우 옮김, 2006). 인간은 지구 생태계의 일부로, 지구라는 우주선(우주선지구) 안에서 다른 존재들과 조화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 개념을 제시했는데, 지구공동체는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지하의 ‘우주적 공동주체’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김지하, 『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 2005).

지구법의 현실화
토마스 베리는 지구공동체 개념에 입각해 인간 이외의 존재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지구법’(Earth Jurisprudence)을 제창했는데, 이 제안은 최근에 현실화됐다. 뉴질랜드에서는 2017년 3월에 전 세계 최초로 ‘강’에 인간과 동등한 법적 권리를 부여했다. 왕거누이 강의 오염을 우려한 뉴질랜드 의회와 원주민 마오리족이 합작해서 지구법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러한 흐름을 반영해 최근에 한국에서도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을 중심으로 『지구를 위한 법학 :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지구중심주의로』(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가 출간됐다.

뿐만 아니라 인류학 분야에서도 종래의 인간 중심의 인류학을 넘어서(beyond) 지구적 차원의 인류학이 시도되고 있다. 2013년에 출간된 에두아르도 콘(Eduardo Kohn)의 『숲은 생각한다』(차은정 옮김, 2018)가 그것이다. 원제는 “How Forests Think: Toward an Anthropology Beyond the Human”인데, 부제로부터 알 수 있듯이 인간 이외의 존재들에서도 ‘사유’ 능력을 발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 중심의 인류학을 넘어서는(beyond)’ 지구적 차원의 인류학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차원의 인류학은 지구학이나 지구인문학적 관점에서 보면 ‘지구인류학’(Global Anthropology)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살림’을 위해
이처럼 현대 학문은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지구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행해지고 있다. 지구인문학도 지구를 하나의 공동체로 생각하는 ‘지구살림’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단지 ‘문사철’의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지구법학이나 지구인류학 또는 지구정치학이나 지구종교학, 지구평화학과 같은 다양한 학문 영역이 들어올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코로나-19라는 지구적 위기는 인간이 지구시스템을 교란시킨 결과이다. 팬데믹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구적 전환(Global Transformation)이 필요하고, 지구적 연대, 즉 지구공치(地球共治, Global Governance)가 요청된다. 아울러 인간 중심의 ‘인간세/인류세’에서 지구 중심의 ‘지구세’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한 학문이 지구인문학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구인문학은 가장 포괄적이면서 현실적인, 가장 최신에 대두되기 시작한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문학의 방향도 이제는 지구인문학으로 전환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이 글은 조성환·허남진의 「지구인문학적 관점에서 본 한국종교 – 홍대용의 『의산문답』과 개벽종교를 중심으로」(『신종교연구』 43, 2020)의 일부를 수정한 것이다.

조성환 『다시개벽』 편집인(왼), 허남진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원(우)
조성환 『다시개벽』 편집인(왼), 허남진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원(우)

 

 

 

 

 

 

저작권자 © 더퍼블릭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