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할 때면 괜스레 마음이 들뜨게 된다. 그럴 나이가 지나지 않았냐고 누군가는 말할 법 하지만 아마도 새해라는 단어 자체가 뭔가 상큼한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느낌을 제쳐둔다면 새해란 말의 논리적 의미는 힘을 잃게 된다. 아무리 시계를 붙잡고 있어도 어김없이 매년 1월 1일은 돌아온다.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 아침이지만 ‘새해 아침’이란 새로운 이름이 붙으면서 해돋이마저 특별한 행사가 된다. 집이나 사무실 청소를 하고 목욕재계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찌 보면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에다 새로운 의미의 색깔을 입히는 게 뜬금없는 생각이나 의식같이 여겨질 수도 있다.

새해의 현상학적 의미는 ‘새로운 것으로의 변화’
그러나 세상사가 그러하듯 새해에 대한 이러한 자연과학적 해석에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새해란 말에는 자연과학이 포착하지 못하는 삶의 소중한 현상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법칙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일지 몰라도 인간 삶의 현상은 주관적이고 생성 소멸하는 역동성을 지닌다. 그래서 인간도 사회도 끊임없는 변화와 생성의 연속이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이란 말이 의미하듯 새해는 곧 ‘변화’를 의미하며 ‘낡은 것’(舊)이란 반(反)명제의 해체를 전제로 한다. 낡은 것을 해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합(合)명제가 새해인 것이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새해의 현상학적 의미는 ‘새로운 것으로의 변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변화가 능사는 아니지만 변해야 할 때 변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는 퇴보이며 남에게는 ‘사회악’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체하고 창조하며 변화시킬 것인가? 변화의 양상은 다양하겠지만 하나로 수렴되는 속성이 있다. 그것은 곧 사유방식이다. 변화의 근저에는 언제나 개인이나 잡단의 사유방식이 자리하고 있다. 한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하는 결정적 요소는 그 사람의 사유방식이다. 사유방식에 따라 행복과 불행,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조직이나 국가의 건전성과 경쟁력을 가늠하는 준거 역시 구성원들의 사유방식이다. 위기에 봉착하는 이유가 사유방식이며 위기를 극복하는 동인도 사유방식이다. 세계적인 장난감기업 레고에서부터 스포츠용품기업 아디다스, 삼성전자, 인텔 등 거대기업들이 시대변화에 따른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혁신기업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사유방식의 혁신 때문이다. 개인적 삶에서부터 기업을 포함한 조직, 관료 및 정치집단에 이르기까지 발전과 진보를 위한 블랙박스는 사유방식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해체 그리고 창조에 있는 것이다.

사유방식에 대한 진지한 성찰·해체·창조 통해 발전·진보
주민자치도 마찬가지다. ‘왜 주민자치인가?’에 대한 주민 및 행정 관료들의 사유방식의 변화가 주민자치의 발전을 촉진시킨다. 인간 삶에 있어서 ‘자치’가 품고 있는 소중한 실존적 의미와 힘(Macht)을 주민들이 절실하게 인식하는 것만큼 주민자치는 발전한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프리드리히 에버트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자를 필요로 한다’는 말을 남겼다. 주민자치가 바로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나 주민들의 사유방식의 변화는 필수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무엇보다 주민자치에 관여하는 행정안전부를 포함한 공무원, 정치인 집단의 의식의 변화가 필수적이다. 혹시라도 주민자치 역량에 대한 공무원들의 회의나 의구심이 과거 ‘면서기’가 ‘한글 까막눈’ 동네 사람들을 대하던 시대에 머물러 있다면 큰일이다.

사유방식의 변화를 강조하지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사유방식이란 말 그대로 사유[사고]하는 혹은 생각하는 방식이다. 특정한 사람이나 현상에 대해 지각이나 기억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경우에 우리는 그에 대해 어떤 결론을 얻으려는 관념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확실하고 객관적인 사실 혹은 지식을 얻기 위해 귀납적 추론이나 연역적 추론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형성된 사유방식을 토대로 우리는 타인을 그리고 세상을 인식하고 해석한다. 나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며 나의 사유방식은 비교적 객관적이라고 믿고 자부한다. 그 결과 나의 사유방식과 다른 사람이나 집단과 마주치게 되면 이해를 못하고 당혹감을 느끼며 심지어는 분노의 감정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만 돌아보면 나를 지탱하는 그 사유방식이 실은 매우 허접하고 우연적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눈을 통해 세상을 보지만 정작 그 눈은 볼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내다보는 나의 사유방식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일 역시 쉽지 않다. 그러나 개인의 발전과 사회의 진화는 개인 및 집단의 사유방식에 대한 성찰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성찰의 출발은 나의 사유방식이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를 이성적으로 돌아보는 일이다. 이를 위한 전제는 나의 사유방식이 언제나 이성 혹은 정신의 엄밀한 추론작용을 거쳐 형성되는 것은 아니란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개인의 발전·사회의 진화, 사유방식에 대한 성찰에 달려
이슬람문화권에서 태어난 사람은 일반적으로 이슬람교 교의에 기초한 사유방식을 갖추게 된다. 기독교문화권이나 유교문화권에서 삶을 시작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유교문화권에 ‘내 던져진’ 우리들은 유교를 몰라도 유교적 사유방식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니 이슬람 극단주의는 제쳐두고서라도 이슬람적 사유방식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어느 시대 어디서 태어나서 어떤 사유방식을 갖게 되는 지는 개인의 자유의지와는 관련 없는 인간 실존의 운명이다. 순전히 자연적 복권추첨(natural lottery)과 다름없는 것이니 잘잘못을 따질 수도 없는 일이다.

같은 문화권 내에서도 개개인의 가족배경, 교육, 경력 등을 통해 세상을 내다보는 사유방식은 결정적 영향을 받게 된다. 피에르 부르디외(Bourdieu)가 말하는 개인의 아비투스(Habitus)가 바로 그것이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의 특정한 환경에 의해 형성된 개인의 성향이나 습관, 인지, 판단, 행동체계가 내부에 상존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개인의 사유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나의 사유방식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내가 속한 계급화된 사회적, 집단적 구조 속에서 체화된 버릇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비슷한 아비투스를 가진 사람들끼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구별짓기’를 통해 사유방식의 유사성을 공유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배척하기 쉽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지만 동시에 감성이 앞서는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서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개인 간, 집단 간에 ‘감각적 거부감’이 이성을 앞지르기도 한다. 감각적 거부감은 대상에 대해 즉각적이며 주관적이다. 자기 생각에 갇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자기 입맛에 맞는 결론을 내리기가 쉽다. 이른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다. 막스 베버(Weber)는 이를 ‘감정의 비합리적 직접적 이해’라고 규정한다. 이런 경우 마음속으로 이미 결정하고 난 후 나의 결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들만 선택하는 인지적 오류(cognitive bias)를 범하기 십상이다.

확증편향에 기름을 붓는 것이 인터넷이다. SNS나 언론매체에 따라 사유방식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교류하면서 확증편향은 더욱 심화된다. 특정한 지식·정보가 거짓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도 웬만해선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 들지 않는다. 게다가 하버드대 캐스 선스타인의 말대로 확증편향은 ‘정보의 폭포화(cascades)’, ‘동조의 폭포화’ 및 ‘집단 극화(polarization)’로 인해 그 파괴력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부풀려진다. 다시 말해 이러한 ‘폭포화’는 우리가 판단을 내릴 때 타인의 생각과 행동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보이면서 일어난다. 이런 경향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의사소통을 통해 더욱 극단화되는 것이다.

확증편향·편견서 벗어나 새로운 사유의 경험을
내가 아는 지식과 정보에 대한 이성적 추론이나 성찰 대신 남들 생각에 근거해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많을 경우 사회적 갈등과 폐해가 어떨지 능히 상상할 수 있다. 한 예를 들어보자. 과거 영국이 EU를 탈퇴했을 때의 일이다.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통해 탈퇴 결정을 한 후에 코믹한 일이 발생했다. 브랙시트 투표가 끝난 후 영국 구글에서 둘째로 많이 검색된 질문 중 하나가 ‘EU가 뭐예요?’였기 때문이다. 국민의 72%가 넘게 투표한 사안인데 탈퇴를 찬성해 놓고 나서 기껏 묻는 게 EU가 뭐냐는 것이었다. 생일파티에 초대받아 밥그릇 다 비우고 나서 ‘그런데 누구 생일이에요?’라고 묻는 형국인 것이다.

막스 베버는 이런 형태가 ‘어리석고 비열할 수도 있는 인간의 평균적 결함들’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감각적 승인이나 거부감은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자연적 현상일 수 있다. 문제는 나의 사유방식이 감각과 정서에만 지배와 조종을 당하게 놔두는 데 있다. 좋고 싫다는 느낌을 비판의 준거로 삼기 전에 이성에 의한 사유의 과정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베버가 말한 ‘합리적인 직접적 이해’의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서 이성의 힘은 때로는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각자의 사유방식대로 산다고 생각하지만 사유하는 것 자체를 귀찮아하는 성향 역시 병존한다. 우리 행동의 대부분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습관적 행동이다. ‘왼발의 앞부분부터 땅을 딛으면서 동시에 오른쪽 다리를 들어 올려서 앞으로 내민다’라고 생각하며 걷는 사람은 없다. 사유하는 방식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금까지 형성된 사유방식 혹은 도식에 의한 사유를 고민도 하지 않고 고집하기 쉽다. 그러나 자주 신지 않던 하이힐을 신고 집을 나올 경우는 문제없이 걷기 위해 ‘생각’도 한다. 그때는 신발도 보이고 길도 새롭게 보이는 변화가 일어난다.

어쩌면 새해, 새로운 한 해의 소중한 의미는 우리 모두가 신고 있을지도 모를 낡은 신발, ‘평균적 사유의 결함들’을 벗어 던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붙은 낡은 사유의 바다를 깨뜨려버릴 때 우리는 ‘새로운 사유의 신발’을 신어 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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