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된 미국 민주주의
미국 민주주의 전당인 의회가 트럼프 지지자들에 의해 점거돼 폭력적으로 파괴되기도 했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조 바이든의 대통령 당선 확정을 위한 절차를 중단시키기 위해 의회에 난입한 것이다(현지시각 2021년 1월 6일). 이들은 회의를 방해하는 것을 넘어 기물을 파손하는 등 폭력 행사를 서슴지 않았다. 트럼프가 직접 대중 앞에서 ‘의회를 점령해서 회의를 방해하라’고 선동한 것에 따라 지지자들은 행동에 옮긴 것이다.

미국은 제헌 헌법을 기반으로 지금까지 쌓아온 전통과 규범을 바탕으로 운영돼 왔다. 개헌을 통해 민주주의를 실현해온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민주주의가 발전해 온 것이다. 미국의 독특한 간접선거 방식은 우리와 다른 민주적 감수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총투표자 숫자에서는 이기고도 다수 선거인단 확보에 실패한 대통령 후보들도 흔쾌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상대의 승리를 축하했다. 이처럼 전통과 역사,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형성된 규범을 바탕으로 운영돼오던 미국 민주주의가 트럼프의 등장으로 와해되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 정치의 규범으로 정착해왔던 대선 패배 인정은 물론 상대 승리에 대한 축하도 거부했다. 미국이 오랫동안 쌓아온 전통을 트럼프는 완전히 무너트렸다. 최근 그가 보여준 행태는 미국 민주주의 미래를 의심케 한다.

이제 미국 민주주의마저 전통과 규범은 더 이상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게 됐다. 다른 곳도 아닌 민주주의의 본산인 미국에서 도덕 규범의 분열붕괴가 가장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의회 난입과 폭력에 대해 의회가 트럼프에 대한 탄핵으로 응징하려 하지만, 무너진 전통을 다시 되돌리기 어려울 지경이 됐다.

도덕, 공공성의 토대
정치적 균열은 언제나 있었고, 그것이 사회발전을 추동하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갈등이 파괴가 아니라 발전의 추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모두가 공유하는 규범이 효과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규범이 제대로 작동하기는커녕, 규범의 분열이 거꾸로 사회정치적 분열과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오늘날 공공성의 위기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공공성은 법으로만 완성될 수 없다. 그렇다고 정치경제 권력에 의해 보장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공성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도덕 규범이다.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 그리고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 동원되는 법 기술들은 오히려 공적 가치 실현을 방해한다. 공적 가치의 토대가 타자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라면, 도덕 규범이야말로 공공성의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동서양 고전은 진실과 정의에 다가가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도덕 규범임을 강조한다. 플라톤이 도덕적으로 조화된 사회야말로 정의를 실현하는 첩경이라 주장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근대 철학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철학자의 예수’라는 별명을 가진 합리주의 철학자 스피노자(Spinoza: 1632~1677년)는 『에티카(Ethica)』에서 인간이 스스로 성찰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절제함으로써 무지를 넘어 실체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겸손’이라고 제안했다. 그는 겸손에 대해 “인간이 자기의 무능과 약함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슬픔”이라고 정의한다. 한마디로 타자를 존중하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동양 고전도 다르지 않다. 유교적 전통은 사회를 개조하기 위해 인간 본성을 의지적으로 확충하고 도덕성을 높이는 방법을 제시한다. 치국治國은 수신修身의 연장선상에서 인식되고 있었고, 따라서 규범에 대한 교육은 그 사회의 정치적 지반을 공고화하기 위해 매우 필요하고도 중요한 일이었다. 아이들의 초등교육서인 『소학小學』에서도 예·의禮·義와 함께 염·치廉·恥을 특별히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를 요약하면, 정치가 공공성을 실현하는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도덕 규범에 토대를 둬야 하고 또 도덕에 의해 규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근대 정치학은 권력의 문제를 도덕과 분리하는 데서 출발한다. 도덕은 공적 영역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데 방해가 되는 만큼 공적 영역은 도덕으로부터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는 인식이 등장한 것이다. 정치를 도덕이 아니라 권모술수權謀術數로 규정한 마키아벨리가 그 인식을 정형화했고, 그것이 그를 근대 정치학의 기원으로 꼽는 이유이다.

뻔뻔함 : 도덕의 붕괴
공공성의 실현을 위해 도덕을 복권시킨 사람은 바로 독일의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이다. 그는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을 민주적으로 재구조화하기 위해 소통의 규범을 강조한 바가 있다. 그에 따르면 공공성의 기반은 바로 소통의 규범이다. 권력과 돈이 지배하는 우리 사회를 공적 방식으로 통제하고 재구조화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소통의 규범이고, 그 규범이 진화하면서 인간 사회의 새로운 진보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낙관한 바 있다.

그러나 지금 세계가 보여주고 있는 도덕 규범의 붕괴, 분열에 대해 하버마스는 과연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하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도덕 규범을 정치·시장권력을 공적가치에 걸맞게 재구조화하기는커녕, 오히려 반대로 이들 권력에 의해 무력화되거나 분열해체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결과는 비단 미국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결코 덜하지 않다. 이 같은 양상은 주로 정치사회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권력투쟁을 위해 도덕 규범을 내팽개쳐버리는 것은 물론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한 데 따른 결과이다. 정치적 의사결정을 주도해왔던 ‘정치적 도의’나 최소한의 규범은 사라진 지 오래다. 어떤 정치적 사안이든 검찰과 법원으로 끌고 갔고, 그 결과는 다름 아닌 ‘정치의 사법화司法化’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제는 정치에 어떤 문제해결 능력도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오직 법의 판단에 의지해야 하고, 대통령을 비롯한 의원들의 운명도 검찰과 사법의 결정에 목을 내놓아야 하는 결과가 됐다.

이런 이유로 ‘정치적 도의’ 대신 ‘뻔뻔함’이 난무한다. 대통령 탄핵에도 그 지지 세력들은 아무런 성찰 없이 과거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과거의 행적과 언행과 정반대의 주장을 내던지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들의 정치적 행위와 주장에 대해 시민은 호감은커녕, ‘뻔뻔하다’고 생각한다.

시민은 그 ‘뻔뻔함’이 비단 정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본다. 검찰총장마저 선택적 수사를 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고 생각한다.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주요 정치적 선택을 수사하는 것은 물론, 대통령이 결재한 징계에 대해서도 가처분 신청을 하는 등의 뻔뻔함을 보여주고 있다고 야유한다. 상식과 규범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검찰 권력의 자의적 행사는 이제 뻔뻔함 마저 넘어서고 있다고 본다.

진보는 도덕적인가
여당도 ‘뻔뻔하다’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도덕성을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는 진보 집권 세력을 두고 ‘뻔뻔하다’고 한다면 다소 의외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들에 대해서도 ‘뻔뻔하다’고 힐난하는 것일까. 일련의 성추문 사건과 같은 도덕적 문제 때문일까?
아니다. 사실 그 속에는 경고의 의미가 들어있다. 과거의 진보 규범들이 여전히 유의미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그것이 점차 기득권화돼 가고 있다는 경고이다. 외견상 도덕과 역사적 정당성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외면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권력 극대화에만 매몰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다수를 대결 전선에 동원하면서 그 뒤에 숨어 시민의 일반의지와 무관한 자신들의 정치적 기득권만 강화하고 있다는 이유이다.

"다양한 갈등이 파괴가 아니라 발전의 추동력이 되기 위해선 사회의 규범이 제대로 작동해야"

진보에 대해 ‘뻔뻔함’을 느끼는 핵심적 이유는 ‘무능함’이라는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보가 주로 평등, 인권과 같은 민주적인 규범을 강조했다면, 보수는 주로 효율성과 유능함을 강조해온 것은 사실이다. 미국 카터 대통령이 보여준 도덕주의 정치의 무능함은 이런 테제를 뒷받침해주는 주요한 근거였다. 시민도 한국 민주진보정치 세력에 대해 유능함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민주적 규범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그들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유능함을 다시 요구하는 것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요구는 보수의 경제적 효율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민주적 규범에 따라 우리 사회를 효과적으로 개혁할 것에 대한 유능함이다. 시민은 지금의 집권 진보 세력은 시대적 과제에 대한 고민과 성찰 없고 그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진정성도 없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 또한 부재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 같은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진보적 슬로건에 안주해 자신들의 권력 챙기기에는 매우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에 대해 ‘뻔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도덕 규범의 영역은 단순히 개인의 윤리적 삶을 구성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도덕 규범에는 ‘시대적 통찰’과 그것을 ‘실현하는 능력’까지 포함하고 있다. 지금의 정치에 대해 ‘뻔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개혁에 대한 진정성과 유능함을 상실한 그들이 새해 벽두부터 ‘사회통합과 대통령 사면’을 들고나와 사이비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같은 무능함을 감추기 위함일 것이다.

트럼프 현상만의 문제일까
미국에서 트럼프 현상은 이제 상수가 됐다. 트럼프를 통해 미국 백인 저학력 저소득층은 정치적으로 결집했고 트럼프의 제스처로 문화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트럼프의 뻔뻔한 행위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이런 현상이 실체화된 배경에 미국 진보의 역할은 없었을까?

미국 민주당은 주로 흑인과 히스페닉 등 사회적 소수자들을 대중적 기반으로 하는 정치 세력이다. 하지만 그 상층부는 미국 사회의 엘리트들로 구성돼 있으며 미국 사회의 거대한 기득권을 구축하고 있다. 그들은 새로운 문제 상황에 대한 해결방안을 갖고 있지 못한 채 과거의 진보적 슬로건에 안주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거치면서 미국의 새로운 빈곤층으로 전락한 백인 저학력 저소득층들은 기존의 진보적 정책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이 트럼프에 의해 동원되면서 기존의 정치전통과 규범을 위협하고 있다.

"시대적 통찰과 실현하는 능력 없이 과거의 슬로건만 되뇌는 정치에 새로운 취약계층의 반발은 커져"

소위 한국 20, 30대의 보수화도 마찬가지이다. 민주화는 새로운 엘리트를 기반으로 정치적 상상력을 공급한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들의 상상력은 과거에 머물러 ‘새로운 문제상황’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과거의 정치 슬로건만 반복하고 있고, 그것은 자신의 정치적 기득권만 강화시켜주는 결과만 가져오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20대, 30대는 과거에 겪어보지 못한 ‘문제상황’에서 새로운 취약계층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기존의 진보정치 세력의 의제들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뻔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를 두고 일부 보수 언론들은 ‘보수화 현상’으로 동원하기도 한다.

‘세속화의 역설’의 교훈
미국의 피터 버거(Peter L. Berger, 1929∼2017)는 ‘세속화(Secularization)’를 예리하게 의제화한 종교사회학자이다. 세속화를 일종의 ‘문화전쟁’으로 규정한 그는 기존의 세속화 이론이 가진 예외적 상황을 통해 ‘세속화의 역설’을 설득력 있게 분석해낸 학자이다.

그간 세속화 이론은 종교가 근대적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소멸되거나 또는 세속적 방식으로 재편될 것으로 예견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오히려 종교는 세속화 이전의 상태로 다시 부활하는 현상이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종교와 세속의 대립은 물론, 종교 사이의 전쟁이 기존의 이념전쟁을 능가할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에 대한 피터 버거의 분석은 흥미롭다. 세속화가 새로운 엘리트를 생산하는 것은 물론, 이들이 새로운 기득권을 형성하게 됐다. 반면 하위문화에 속해있는 대중들은 자신들의 소외를 벗어날 수 있는 정치사회적 수단을 갖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이 다시 회귀의지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종교이고, 그것이 다름 아닌 오늘날 종교의 부활이라는 ‘세속화의 역설’을 가져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오늘날 규범의 위기, 더 나아가 빈곤의 보수화를 설명하는 데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해석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진보 세력이 민주주의를 진척시켜온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인권과 평화, 그리고 민주적 가치를 바탕으로 사회의 진보를 추동해온 정치 세력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사회경제적 약자는 물론 20, 30대의 새로운 취약계층은 오히려 보수화되고 있다. 진보정치의 주요 정책 대상인 이들이 오히려 보수화되는 역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세속화가 새로운 엘리트와 기득권을 만들어 낸 것처럼, 진보를 추구해온 정치세력도 새로운 엘리트들의 기득권을 구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엘리트의 상상력으로 더 이상 새로운 취약계층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들은 기존의 진보에 대해 새로운 문화투쟁을 전개한다. 기존의 진보의 도덕 규범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 빈곤은 진보가 아니라 오히려 보수로 달려가고 있다. 세속화의 경우처럼 기존의 정치사회적 약자와 20, 30대들은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하고 파시즘적 우상을 향해 달려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우상을 통해 기존의 도덕 규범을 파괴하고 사회정치적 대결을 심화시켜 갈 것이다. 오늘날 공공성 위기의 진단이 ‘진보의 빈곤’에서 찾아야 하는 이유이다.

김창호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김창호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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