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학-공공철학] 량수밍과 향촌건설운동, ‘중국의 마지막 유학자’는 왜 농촌으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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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학-공공철학] 량수밍과 향촌건설운동, ‘중국의 마지막 유학자’는 왜 농촌으로 갔을까
  • 박경철 충남연구원 사회통합연구실장
  • 승인 2021.02.08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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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마지막 유학자’ 량수밍(梁漱溟 : 1893~1988)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 시카고대학 역사학자 가이(Guy S. Alitto)에 의해 “중국의 마지막 유학자(The last Confucian)”로 지칭된 량수밍은 중국의 근대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사상가이자 사회실천가이자 교육자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반서양화 교육을 받았으며 비교적 어린 나이에 사회와 인생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1916년 <究元決疑論>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아 베이징대학 차이위안페이[蔡元培] 교장의 요청으로 베이징대학 인도철학과에서 강의를 했다.

1921년에는 그의 저명한 저서 <東西文化及哲學>을 통해 중국과 서양 문화관을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이 책에서 그는 중국 사회의 위기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공자를 대표로 하는 유학문화의 부흥을 주창해 사회에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그 후 량수밍은 베이징대학을 사직하고 유학의 사회이상을 통해 중국 사회를 개조하고자 1929년 가을 허난촌치학원[河南村治學院]을 설립해 향촌건설운동을 시작했고, 1931년에는 산둥 저우핑현[鄒平縣]에 향촌건설연구원[鄕村建設硏究院]을 설립해 원장을 역임하면서 저우핑현의 향촌건설운동에 매진했다. 그는 명실상부하게 민국시기 향촌건설운동의 대표 인물이 된 것이다(王處輝, 2011, 『中國社會思想史』, pp. 609-610).

그런데 량수밍의 젊은 시절의 궤적을 보면 그가 농촌운동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인다. 어린 시절부터 좋은 환경에서 반서구 문화를 접했으며 사회와 인생의 문제에 깊이 사고하며 불교, 유교, 기독교를 섭렵하고 베이징대학에서 인도철학을 강의했던 사상가가 농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촌으로 들어가 학교를 설립하고 향촌 건설에 투신한 것은 좀 의외라 할 수 있다. 그는 왜 베이징에서의 좋은 환경을 버리고 농촌에서 향촌운동에 투신한 것일까?

중국의 문제는 농촌의 문제
량수밍은 청조 말기와 민국 초기 중국 사회 혼란의 근본 원인을 중국 사회의 ‘문화의 상실(文化失调)’로 규정했다. 그는 당시 중국 사회의 특징을 두 자로 표현을 했는데 바로 ‘散’과 ‘亂’ 두 글자였다. ‘散’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입으로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운 상태인데도 중국인 간에 서로 단합해서 힘을 모으기보다는 서로 분열돼 개인의 이익에만 관심을 두는 소아적인 중국인의 태도를 질타하는 글자이기도 하다. 두 번째 ‘亂’은 신해혁명을 통해 청조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탄생했으나 여전히 중국 내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립하는가 하면 그 외 여러 사회개조의 다른 사상들이 하나의 중심사상으로 통합되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는 데에 대한 질타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는 이처럼 ‘문화의 상실’을 겪고 있는 중국 사회를 개조하는 데는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영국 등 서구의회제도의 도입을 통한 대의제를 도입하고 실행해 옮기려고 했으나 인민의 인식 부족으로 모순만 만들어내고 실패를 겪었다. 그 후 그는 아무리 서양의 좋은 제도가 중국에 들어올지라도 백성들의 의식이 없으면 이러한 제도는 절대 융합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대중 계몽운동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리고 중국 대중의 대부분은 농촌에 있기 때문에 대중계몽을 하기 위해서는 농민계몽이 우선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농촌으로 내려가 향촌건설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이다.

그는 먼저 현재의 허난성에서 허난촌치학원[河南村治學院]을 설립해 향촌건설운동을 시작했으나 여의치가 않아 1931년 다시 산둥성 저우핑현[鄒平縣]으로 옮겨 그곳에서 향촌건설연구원[鄕村建設硏究院]을 설립해 원장을 역임하며 현 내 농촌지도자를 대상으로 농민교육과 정신계몽 활동을 전개했다. 이 시기에 그는 『中国民族自救之最後覺悟』와 『鄕村建設理論』을 집필해 그의 향촌건설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고 이 책을 교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가 향촌건설연구원에서 특히 강조한 것은 “團體組織, 科學技術”이었다. 즉 농촌발전에 있어 농민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 협력하고 농업생산의 증대를 위해 과학기술을 보급하고 이를 위해서는 우선 금융유통이 전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향촌 건설의 실험구인 저우핑현에서 합작사를 건립하면서 향촌건설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대의제 도입 등 정치개혁 추진했으나 인민의 인식 부족으로 모순만 만들며 대중, 즉 농민 계몽에 투신하게 돼"

협동조합 설립으로 농촌개조
량수밍의 협동조합 설립은 1932년부터 본격화됐다. 1932년 9월 관내에 량저우미면판매합작사[梁邹美棉运销合作社]가 가장 먼저 설립됐으며 이후 각종 합작사가 연속해서 설립됐다. 대표적인 합작사는 크게 6종류로, 즉 량저우미면판매합작사[梁邹美棉运销合作社], 잠업생산판매합작사[蚕业产销合作社], 임업생산합작사[林业生产合作社], 신용합작사[信用合作社], 신용마을창고합작사[信用庄仓合作社], 구매합작사[购买合作社]가 있었다.

구체적인 합작사 설립 내용을 보면, 1932년 말 저우핑현의 합작사 수는 20개에서 1933년에는 25개로 증가했고 조합원도 545명으로 증가했다. 1934년 합작사는 133개로 증가했고 조합원수는 4천446명으로 증가했다. 1935년 말 합작사 수는 336개로 달했으며 조합원은 1만 4천939명으로 증가했다. 이후 실험구는 전체 현의 합작사에 대해 정리정돈을 해 몇몇 불합격 합작사는 취소됐다. 1936년 말 전체 현의 합작사 수는 307개였고 조합원은 8천828호(명), 출자금은 1.24만 위안에 달했다. 그 가운데 규모가 비교적 큰 미면판매합작사는 156개, 잠업생산판매합작사는 21개, 임업생산합작사는 23개, 신용합작사는 48개, 신용마을창고합작사 58개에 달했고 1937년에는 합작금고도 설립됐다.

물론 량수밍은 철학자답게 저우핑현에서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애초 그는 합작을 경제적 접근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향촌건설학원의 조회[朝會]에서 그가 “합작”에 관한 강연을 보면 합작에 대한 그의 철학을 알 수 있다.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통 합작이라고 하면 대부분 경제적인 부분을 가리킨다. 이것은 협의의 합작이다. 이것은 굳이 말을 하지 않겠다. 지금 광의의 합작을 말하려고 한다. 내가 아는 한 친구가 말하길 ‘작은 합작을 하면 작은 성취를 하고, 큰 합작을 하면 큰 성취를 한다. 합작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이 뜻은 깊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경제적 측면만이 아니라 인생의 도리, 사회의 도리이며 이렇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합작을 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가장 필요한 말은 ‘기가 사납지 않고 마음이 통해야 한다[氣要穩, 心要通]는 것이다. 즉 합작의 근본은 교의(情誼)가 상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의가 상통하기 위해서는 먼저 반드시 상대를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교의가 상통해야 비로소 인류의 좋은 생활을 촉진할 수 있다.”  - 梁漱溟. 『朝話: 人生的省悟』, pp. 55-57 -

량수밍의 향촌건설운동과 합작사건설은 순조롭게 되는 듯했다. 하지만 1937년 12월 일본이 산둥반도를 본격적으로 점령하면서 그의 향촌건설운동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향촌합작 운동도 막을 내렸다.

비록 량수밍의 향촌건설운동과 합작사 운동은 일제의 본격적인 대륙 침략으로 약 5년 만에 중단됐지만 저우핑현 실험구에서 추진된 이와 같은 운동은 당시 이 지역 주민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다. 또한, 농촌경제를 주민의 주체적인 역량으로 개혁해 나가려는 운동은 당시 중국 전역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이는 그 이후에도 많은 지식인의 향촌운동 전범[典範]이 됐다.

마오쩌둥의 절친한 친구이자 맞수였던 량수밍
중국 공산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신중국을 세운 마오쩌둥[毛澤東]은 량수밍의 절친한 친구이자 맞수이기도 했다. 마오쩌둥은 후난[湖南] 제1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그의 스승이자 훗날 장인이 된 양창지[楊昌濟]가 베이징대학 교수로 부임하면서 그도 베이징대학에 가 2년간 사서를 한 적이 있다. 이때 마오쩌둥은 량수밍을 만나 깊은 교류를 하면서 중국 사회 개조에 관한 얘기를 나누곤 했다.

그런데 중국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서로 달랐다. 마오쩌둥은 당시의 중국 사회를 마르크스의 계급모순론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주도하는 혁명을 통해서만이 중국 사회를 개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량수밍은 중국은 오랫동안 향신[鄕紳]문화의 전통이 존재했기 때문에 중국의 유교적 전통문화와 질서를 중시하면서 정신과 의식 개혁을 통해 중국 사회를 개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둘 간의 논쟁은 결국 마오쩌둥의 농민혁명이 승리하면서 결론이 났지만 이러한 논쟁은 신중국 성립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량수밍은 마오쩌둥과 막역하게 얘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건국 이후 두 사람은 중국의 개혁에 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량수밍은 마오쩌둥의 정책에 관해 크게 비판했다. 그 쟁점을 보면, 중국은 농민의 힘으로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는데 건국 이후에는 공업화와 도시화를 우선 추진하면서 농민을 또다시 소외시켰다는 것이다. 특히 대약진운동 시기 농촌의 피폐화로 비공식적으로 약 3~4천만 명의 사람들이 기아로 사망했다. 이 때문에 량수밍은 마오쩌둥의 성급[性急]주의와 성과주의, 즉 단기일 내에 서구를 따라가거나 추월하려는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 후 두 사람은 사이가 멀어지고 문화대혁명이 발생해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량수밍은 훗날 역사학자 가이(Guy S. Alitto)와의 인터뷰에서 농민계급 주도의 공산혁명이 완수되고 새로운 국가가 건설됐으면 그가 주창했던 향촌건설운동 방식을 통한 농촌 개조가 가능했음에도 이를 실현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량수밍의 향촌 건설 정신을 잇는 원톄쥔[温铁军] 교수와 제자들
중국런민[人民]대학 농업 및 농촌발전학원 원장을 역임한 원톄쥔 교수(温铁军 : 현재 푸젠 농림대학교 농촌재건대학 학장이자 신농촌건설연구소 최고 책임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 3농 문제 전문가다. 그는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산업화와 공업화 우선 정책에 밀려 주목을 받지 못했던 중국의 3농 문제의 심각성과 중요성을 1985년경부터 학계와 정계에 지속적으로 피력해 3농 문제를 국가적 핵심의제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가 말하는 3농 문제는 농업, 농촌, 농민 문제의 순서가 아니라 농민, 농촌, 농업 문제라고 주장한다. 즉, 오늘날 신중국의 성립도 농민의 적극성의 발로에서 완성된 혁명이라고 평가한다. 따라서 중국은 농민 문제가 우선이고 농촌과 농업 문제는 여기에서 파생된 문제라고 본다. 이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농민의 생계문제 해결이 가장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톄쥔 교수는 중국의 근대화 과정은 농업을 희생으로 하는 급진적 산업화, 공업화의 자본축적 과정으로 규정하고 그 과정에서 국가의 부는 어느 정도 성장했을지 모르나 도시와 농촌의 심각한 빈부 격차는 산업화된 중국을 위협할 만큼 심각한 사회문제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그는 3농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중국의 발전은 어렵기 때문에 문명사적인 전환을 요구하는 향촌건설운동을 주창했다. 그는 중국농업은 구조적 특성상 서구와는 달라 순환농업이 중시돼야 하며 토지의 집중화와 규모화에 반대한다. 그리고 제3세계 농업연구를 통해 빈곤 문제의 근원이 농업과 농촌 문제에 있음을 직시하고 3농 문제 해결을 통해 도시의 빈곤 문제 해결의 가능성도 모색하고 있다.

그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학교 내 <鄕村建設中心>을 설립하고 학생들과 함께 지농운동[支農運動]을 전개하며 합작사 보급에 앞장서고 베이징시 외곽에 량수밍향촌건설학교를 설립해 농촌 현장에서 활동 예정인 많은 청년에게 향촌 건설의 이론과 실천 방법 등을 교육했다. 그는 또한 2012년 12월 쓰촨성 소재 시난대학[西南大学]에 설립된 향촌건설학원[鄕村建設学院]의 집행원장을 맡고 향촌건설운동을 이끌 청년지도자들을 육성했다. 이 학원에는 옌훙궈[晏鸿国] 등 다수의 중국 향촌건설운동 선구자의 후예들이 참여하고 있다.

원톄쥔의 향촌 건설 이념은 중국의 근대화 초기 향촌 건설을 통한 새로운 중국 건설을 모색했던 량수밍의 향촌 건설 이념과 맞닿아 있다. 원톄쥔은 그의 향촌 건설 이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향촌건설운동은 농업, 농촌의 문명이 공업화에 의해 파괴된 상황에서 농업, 농촌, 농민에 의한 자기회복을 어떻게 돕는가 하는 운동이다. 우선 그들을 낙오자로 보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 따라서 그것은 농촌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로 다른 사상 중에서 어떻게 하면 바람직한 인류문명의 발전을 재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단순한 농업보호가 아니다. 우리가 하려고 하는 향촌 건설이라는 것은 문명의 재건이고, 담론의 재건이며, 사상의 재건이다.”    - 『녹색평론』, 제87호(2006, 3-4), p.50 -

서구식 의회와 선거제도의 도입으로 중국정치체계를 개조하려고 했던 당초 의도와는 달리 중국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민의 의식개혁을 통해 중국 사회를 개혁하려는 일념으로 직접 농촌에 투신해 향촌건설학교를 설립하고 교육문화, 과학기술, 합작조직의 세 가지 기본 틀로 향촌건설운동을 전개한 량수밍의 향촌 건설 이념은 위와 같이 원톄쥔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량수밍과 같이 원톄쥔 또한 향촌 건설 이념의 실천 방안으로 세 가지 기본방향, 즉 농민의 조직화, 인민의 생계 향상, 문화의 다원화와 다양화를 제시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원톄쥔은 농민의 조직화에 관심을 두고 향촌건설운동을 추진했다. 량수밍과 마찬가지로 원톄쥔 역시 원자화된 중국 소농으로는 정치적 교섭력이 극히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농민의 조직화가 우선시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조직화의 구체적 예시로 합작사운동, 노년협회, 부녀회를 제시했다. 나아가 사회단체와 정부와 교섭이 가능한 이들 농민조직화를 기초로 양심적인 지방자치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두었다. 이러한 목표는 저우핑현을 향촌 건설에 있어 하나의 실험구로 삼아 농민교육, 문화회복, 농민합작을 통해 상향식 자치정부를 이룩하고자 했던 량수밍의 목표와 대부분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량수밍 정신을 이어받아 추진되는 함께 사는 생태농업이 시사하는 바 커"

중국 농촌에서 량수밍의 향촌 건설 정신을 잇는 청년들
중국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는 농촌(향촌)이다. 중국은 아편전쟁과 개화기 이후 무너지는 중국을 재건하기 위해 많은 량수밍, 옌양추 등 많은 지식인이 농촌으로 들어가 향촌 재건을 위해 향촌건설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후 서구와 일제의 침략, 급격한 공산화, 그리고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급작스러운 개혁개방으로 사실상 농촌은 방치된 상태였다.

이후 1990년대 들어 원톄쥔 교수 등 지식인들이 다시 량수밍의 정신을 이어받아 향촌건설운동을 시작해 중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지금은 량수밍과 원톄쥔의 향촌건설운동에 찬동하는 많은 청년이 현재 농촌으로 내려가 중국 향촌 재건에 나서고 있다. 특히, 향촌건설운동에 투신한 많은 청년은 기존의 생산주의 농업, 규모화 농업, 농민이 필요 없는 농업이 아니라 자연과 생태를 살리고 농촌과 도시가 함께 사는 생태농업을 실천하고 있다.

원톄쥔 교수의 향촌 건설 제자들은 현재 중국 전역으로 내려가 2천여 개의 사회생태농업(CSA : 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농촌 마을로 내려가 협동조합을 만들고 생태환경농업을 실시하고 도시소비자와 농민이 교류하는 이러한 운동은 현재 시진핑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생태문명 건설의 밑바탕이 되고 있다. 21세기, 서구 물질문명과 경제성장의 패러다임에서 자연과 사람이 상생하고 순환하는 생태문명 건설의 방향으로 량수밍의 향촌건설운동은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팬데믹(pandemic)과 기후위기 시대, 행태와 자연, 식량안보와 농촌공간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 량수밍의 향촌 건설 사상과 실천은 시간이 더할수록 빛을 발할 것으로 생각된다.

※ 이 글은 필자의 “근대 이후 중국 향촌문제와 지식인의 논쟁: 합작사운동을 중심으로”(2014). 중국지식네트워크(4) 논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수정·보완한 것이다.

박경철 충남연구원 사회통합연구실장
박경철 충남연구원 사회통합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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