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내가 나를 모르는데... 주민자치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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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내가 나를 모르는데... 주민자치의 조건
  • 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 승인 2021.03.16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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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모르는데 / 난들 너를 알겠느냐 /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오래전,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인기리에 방송을 타고 있었던 노래로 기억한다. 꽤나 오래 되었건만 아직도 사람들의 콧노래로 사랑받는 듯하다. 노래 제목인 ‘타타타(tathātā)’는 인도 산스크리트어로 ‘본래 그러한 것’의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 인생살이의 부조리함을 꼬집다가도 그 실존적 부조리를 헛헛한 웃음으로 예찬하고 끌어안는 느낌이 드는 노래이다.

그런데 곡이 흥겹기도 하지만 가사의 의미가 자꾸 생각을 멈추게 한다. 네가 나를 모르니, 난들 너를 알겠느냐고 푸념하는 듯하다. 각자의 입장에서 보면 네가 나를 모른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알지 못한다는 체념에 이를 수밖에 없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그렇다면 남을 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아니 우리는 왜 서로를 알지 못하는 것일까? 노래제목처럼 인생이 ‘본래 그런 것’이라고 헛웃음을 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너무도 중요한 문제임이 분명하다. 서로를 알지 못할 때 일이 제대로 성사될 리가 없다.

주민자치도 마찬가지다. 주민자치가 개인의 삶에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서부터 주민자치 관련 입법이나 운영, 관련 정부부처 공무원과 자치학회와의 관계 등에 이르기까지 문제의 합의를 이루기가 어렵게 된다. 지난해 12월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지방의원 소환제도입과 주민의 직접참여권 확대 등의 내용이 담겨 있어 지방자치를 강화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가야 할 길은 멀다. 실제로 이 법이 통과되기 까지 무려 32년이 걸린 셈이다. 게다가 주민자치회 관련 조항마저 빠져 있다. 주민자치의 이념대로 주민들이 실질적으로 자치의 주체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남(정치)이 모른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여전히 ‘너는 나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모르는 관계일수록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회의를 하면, 상대방은 ‘잘 알겠습니다’ ‘이해합니다’란 말을 의례적으로 한다. 허나 시간이 지나면 그 말이 진심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특히 정치인이나 공무원이 그렇다.한 마디로 이들과는 의사소통은 되었는데 ‘의식소통’은 안 된 것이다.

의사소통은 필수조건이나 충분조건은 아니다. 물론 의식소통이 되기 위해서는 커뮤니케이션은 물론 인지적, 정서적 측면이 조화롭게 뒷받침 되어야 한다. 이들 조건 중 어느 하나라도 결핍될 경우 갈등은 발생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서로 언어는 무리 없이 오고가는데 왠지 티격태격하는 경우가 잦아진다. 연인 사이는 물론이고 가정에서도 부부사이에, 부모와 자식 간에 의식소통의 부재는 불화와 충돌은 물론 심지어는 인륜을 짓밟는 행태마저 불러들인다. 하물며 정치는 말할 것도 없다. 사회생활에서는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간에 한시도 바람 잘 날이 없게 된다. 그 심리적 근간에는 ‘남 탓’이 깔려 있다. 따라서 상대에게 분노하고 원망하며 원한에 사무친 나머지 여러 가지 형태로 복수까지 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러한 선택의 대표적 사례가 고소 고발이다. 언론 기사의 제목이 ‘고소왕국’이 될 정도다. 한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2006년부터 2010년까지 5년 간 고소 고발 건수는 50만 건에 달한다. 법원행정처 통계에 따르면(조선일보 2010년 9월 20일자) 2009년 한 해 동안 소송사건은 634만5천 건으로 국민 1인당 0.127건씩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니 인구가 우리의 2.5배가 넘는 일본보다 민사소송 건수는 거꾸로 2배 가까이 되는 소송왕국이란 기사가 나올 만 하다. 더욱이 소송증가율이 매년 늘어나면서 소송만능주의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게 문제다.

갈등이 없는 사회가 없다는 점에서 이것 역시 ‘본래 그런 것’이라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당장 개개인의 일상이 너무 피곤할뿐더러 국가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손실이 불가피하게 된다. 연구에 의하면 세계 여러 국가들 중 특히 우리나라의 사회적 갈등이 유독 심하다. 세계은행이 국가별 거버넌스지수(WGI)와 지니(Gini)계수를 활용하여 사회갈등지수를 도출(2016년)한 것을 보면 한국의 평균 사회갈등지수는 OECD 29개 국 중 7위에 랭크돼 있다. 주목할 점은 우리나라와 OECD 회원국 평균과의 격차도 매년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갈등의 문제는 돈의 문제와 직결된다. KDI정보센터에 의하면 한국의 갈등지수가 OECD 평균 수준으로만 완화돼도 1인당 GDP는 27%나 증가한다. 갈등의 사회적 비용이 이렇게 막대하다는 것이다.

난들 너를 알겠느냐
민영뉴스통신사 뉴스1이 빅데이터 분석업체 타파크로스와 함께 분석(2020년 6월)한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우리사회의 5개 갈등인 이념, 빈부, 노사, 세대, 젠더와 관련된 데이터 1억9천만 건 이상을 수집해 분석한 결과이다. 예상대로 한국 사회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으며 확대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이념 간, 그리고 빈부 간 차이에서 발생한 사회적 간극이 한국 사회 전반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주된 요인임이 드러났다. 무엇보다 정치적 이념과 관련해서 특정 정치 집단이나 단체를 대표하는 인물의 사생활 문제와 젠더 연관 범죄 등으로 인해 부정적 담론이 확대 재생산된 것으로 나타났다.

갈등의 심화와 확산은 개인과 집단 내에 웅크리고 있던 이기적인 사회적 충동들을 부추긴다. 새삼스러운 뉴스는 아니지만 코로나19 방역과 관련한 갈등은 일상이 되고 있다. 특히 정치성향과 종교적 예배문제로 인한 갈등이 주를 이룬다. 또 갈등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유언비어나 음모론이 뒤를 잇는다. 감염병 확산 초기에는 방역에 대한 음모론이 나돌더니 백신이 보급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백신관련 음모론이 동굴 속 박쥐처럼 날개를 퍼덕이고 있다. 최근에는 어느 개신교 선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시설 방문자들의 집단 바이러스 감염에다 진단검사마저 기피하는 행태가 사회적 공분을 사고 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대표 선교사란 사람이 신도들에게 한 설교 내용이었다. 언론 보도를 보면, 설교 내용은 한 마디로 “코로나 백신을 맞으면 그들의 노예가 된다”는 주장이다, 말이 설교지 밑도 끝도 없이 음모론을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 말인즉슨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 사태의 배후에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등 특정 세력이 있다는 것이다. 뉴스를 찾아보니 새로운 내용도 아니고 작년 초부터 SNS를 통해 유포된 음모론을 퍼다 나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빌 게이츠가 타깃이 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2015년 TED 강연에서 한 말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그는 청중에게 “앞으로 수십 년 안에 천 만 명 이상 죽게 된다면 그것은 전쟁 때문이 아니라 전염력이 강한 바이러스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음모론자들은 과거 빌 게이츠의 말과 코로나19와의 인과관계를 엮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논리성은 물론이고 상식의 수준에서도 허접하기 이를 데 없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음모론이 교회신도들과 교회 밖 사회와의 심리적 분단의 철책을 쌓는다는 점이다.  

코로나19와 살아가듯 현실적으로 갈등과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다. 갈등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갈등자체는 한 사회가 살아 움직이며 약동하는 표징이자 발전을 향해 나아가는 역동성을 의미한다. 불가피한 긴장(inevitable tension)인 것이다. 반대로 갈등이 없다는 것은 정체를 의미하며 비판적 성찰에 기반 한 발전의 추동력이 결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문제는 갈등수습이나 조정이 잘못 되었을 때 파괴적 방향으로 흘러가는 데 있다. 허나 갈등은 인지, 정서, 행위 등의 차원에다 주관적이며 객관적인 상황이 연계되기 때문에 갈등의 복합적인 매듭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무엇보다 먼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남 아닌 ‘자신을 아는 일’이다.

"무엇보다 먼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남 아닌 ‘자신을 아는 일’이다"

니체, ‘내가 나를 아는 게’ 먼저
네가 나를 몰라도 오해와 갈등이 생긴다. 난들 너를 알겠느냐 체념을 해도 마찬가지다. 두 경우 모두 결국은 ‘남 탓’이다. 갈등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투사(投射)의 기제는 당장은 속편할지 모르지만 갈등이나 분노를 더욱 부채질한다. 그런 사람일수록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누구나 ‘나는 내가 잘 안다’고 생각했다.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발표된 유네스코의 들로(Delors) 보고서(1996)는 전 세계적인 갈등과 분열 현상이 인류 스스로를 자멸시킬 수 있을 정도로 극대화되었음을 지적한다. 반면에 교육은 그런 사태를 완화시키는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보여 왔다고 반성한다. 따라서 21세기 학교교육이나 성인교육에서는 타인과 더불어 사는 법을 학습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주목할 점은, 갈등을 최소화시키고 해결하기 위한 첫 걸음이 타인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자신을 아는 교육이라는 점이다.

19세기 독일의 천재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니체도 이를 간파했다. 니체에 따르면 갈등의 출발은 ‘네가 나를 모르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모르는데’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저서 「아침놀」에서 인간이 배워야 할 학문의 전부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단언한다. 이어 그는 「도덕의 계보」 첫 문장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을 탐구해 본 적이 없다.”

삶과 학문의 전부라는 ‘자신을 아는 일’을 제쳐두고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어 니체는 말한다. 마치 개미의 일상처럼 “우리는 무언가를 ‘집으로 가져가는’ 단 한 가지 일에만 진심으로 마음을 쏟으며” 살고 있다. “그 외의 삶, ‘자신을 탐구하는 일’ 따위에 ‘누가 진지하게 마음을 쓰겠는가? 아니면 그럴 시간이 충분하겠는가? 우리의 마음이 거기에 가 있지 않고, 우리의 귀조차 거기에 가 있지 않은 것이다”라고. 갈등을 슬기롭게 조정하면서 사회의 역동성을 살리기 위한 필요조건을 니체는 제시하고 있다. 실질적인 주민자치제의 성공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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