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지 석탑
언제 흐트러진 모습이던 가/ 바람서리[風霜]에 시달리고/ 인간에 시달리고/ 기억도 흔적도 없이/ 지나온 세월/ 드러난 육체는 고사하고/ 목뼈[頸椎]까지 바람 들던/ 지난 세월 아픈 추억들/ 찬란한 백제 역사를/ 고이 간직하고 살아왔건만/ 아무도 관심 없었던 시절/ 거년에 무식한 왜놈들/ 수선한답시고/ 횟가루로 물들이던/ 고통도 있었다/ 그리고 천 4백 년 지나/ 망가진 척추 세우고/ 너덜너덜한 살점/ 하나둘씩 꿰매는 / 봉합수술 시작된 지 20년/ 누더기 헌 옷에 황등黃登 돌/ 새 옷 이어 한 점 두 점 입혀지고 나니/ 비록 예전 몸 아니지만/ 이제 걸을 수 있어/ 살 것 같구나/ 다시 시작해야 할 천 4백 년/ 아니 2천 년이라도/ 살아 숨 쉬어야 한다/ 백제인 숨결과/ 익산사람 정성이 만났으니/ 함께 울고 웃으며/ 몇천 년이라도/ 이 땅 지켜내야 한다.

필자의 제6 시집에 게재된 ‘미륵사지 석탑’이라는 시이다. 익산하면 보석이 그리고 이리역에서 국수 한 그릇 말아먹던 때가 생각난다. 익산은 본래 백제시대 금마저金馬渚로 불리었으며 고려 충혜왕 때에 원元의 순제 기씨 황후의 외가가 있는 지역으로서 이를 높여 만백성에 덕을 베푸는 인물이 배출된 고장이라는 이유로 익益자를 넣어 익주益州로 불리다가 1413년 익산군으로 개칭됐다. 일제 강점기 이후 호남선 등 철도가 개통되면서 1949년 이리시가 승격돼 익산군과 분리됐다가 1995년 도농통합에 따라 익산시로 개칭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익산을 보려면 먼저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를 음미해야 한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두고/ 서동 방을 밤에 뭘 안고 가다’ 이상이 고려시대 승려인 일연이 저술한 「삼국유사」에 게재된 서동요의 전문이다. 이 4구체 노래(향가)는 백제에서 신라로 간 서동이 이 노래를 퍼뜨려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를 부인으로 맞았다는 유래가 담겨 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고도古都 익산
미륵사 창건 설화에 의하면 ‘무왕과 왕비(선화공주)가 미륵산에 있는 사자사로 가는 도중 연못 속에서 솟아오른 미륵 삼존불을 만나 이를 모시기 위해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일단 미륵사지에 도착하면 광활한 가람 면적에 놀란다. 무려 400만 평이라 하니 쉽게 상상이 안 된다.

639년 건축된 백제시대 최대 사찰이라고 알려진 미륵사지는 비록 1천400여 년이나 흐른 세월만큼이나 동탑과 서탑 그리고 갖은 풍우를 견디고 버텨 온 당간지주 등 몇몇 유물과 기단석만 찾는 이를 맞아 주지만, 미륵산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가람 배치는 균형과 대칭, 보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미륵사지의 가람 배치는 삼탑삼금당 방식의 삼원식三院式이라고 한다. 중앙에 목탑이 있고 좌우 양쪽에 서탑과 동탑이 위치해 있고 동서남북으로 회랑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만약 건축물이 지금 제자리에 위치에 있었다면 우리는 엄청난 감동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사실 미륵사지는 조선조 폐사 이후 농경지와 잡초에 묻혀 위대한 역사가 세월에 묻힐 뻔했다. 미륵사지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따라 풍기는 모습이 사뭇 다르다. 봄에는 경내 연둣빛으로 피어오르는 잔디 향연에, 여름엔 짙어진 주변 나무들과 조화를 이룬다. 가을빛이 물들어가고 겨울을 맞다 보면 우뚝 선 동탑과 미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서탑의 웅장함이 돋보이는 풍광을 만난다. 잔디밭에 묻힌 문화재가 많아 최근에 설치된 야간 경관조명이 그 여백을 채워준다.

다행히 2020년 1월 미륵사지 현장에 그렇게 고대하던 국립익산박물관이 개관되면서 그간 객지로 떠돌던 익산의 백제유물들이 드디어 한곳에 자리 잡게 돼 방문객을 맞고 있다. 특히 서탑 해체 작업 중 발굴된 사리장엄과 금제장식을 보노라면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즉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백제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특히 2001년부터 해체보수와 정비를 통해 18년만인 2019년 정비가 완료된 서탑은 국내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한국 석탑 모태로 꼽히며, 수리과정에서 옛 부재와 황등석을 결합하는 등 부재 1천 6백여 개를 조립해 그 정교함과 위용에 반하게 한다. 이런 것들이 모여 미륵사지가 ‘2020년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된 바 있다.

또 하나 익산에서 백제 왕도를 보려면 왕궁리 유적을 가봐야 한다. 익산이 사비시대 백제의 두 번째 수도였음을 볼 수 있는 곳이다. 1989년부터 발굴 작업을 거쳐 28년 만에 왕궁의 전체적인 면모가 밝혀지면서 묻혔던 백제 수도 역사를 다시 쓴 것이다. 주변 지역보다 좀 높은 위치에 있는 이곳은 궁궐담장, 건물지, 낙차를 두어 자연스럽게 흐르게 한 곡수로曲水路로 이어지는 후원後苑, 공방 그리고 왕궁리 유적에서만 나온 화장실 유적으로 구성된 왕궁이었던 것이다. 분명 서동 무왕과 선화 왕비는 왕국후원을 거닐며 동쪽의 왕실사찰인 제석사를 바라보며 왕실의 무궁함을 기원하고 북서쪽에 위치한 자신의 태생지 마룡지와 오금산五金山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그리워했을 것이며 멀리 보이는 용화산을 바라보며 미륵을 빌어 국태민안을 빌었을 거다. 왕궁리 유적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정교한 오층석탑에서 맞는 해돋이와 해넘이다.

우리나라에서 통상 고도古都라면 경주, 공주, 부여 익산을 꼽는다. 고도는 옛날 수도이면서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궁궐이 있어야 하고 둘째 궁궐을 지키는 산성이 있어야 한다. 셋째 왕실을 보호하는 사찰이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왕릉이 있어야 한다. 익산이 이 네 가지를 갖추고 있어 이런 면에서 의미가 있다.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이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백제왕도 익산을 둘러보다 보면 곳곳에 고대 역사가 도도하게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머리를 식히고 싶은 날은 익산행 열차에 몸을 한번 실어 보라.

김철모 시인, 정읍문학회장
김철모 시인, 정읍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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