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사이야기] 스승을 비판할 줄 알았던 소학동자小學童子 김굉필金宏弼
상태바
[문화-역사이야기] 스승을 비판할 줄 알았던 소학동자小學童子 김굉필金宏弼
  • 이도남 건국대학교 사학과 강사
  • 승인 2021.03.26 13: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조선 시대에는 입주가정교사 제도가 있었다. 학문과 재주는 있지만 신분에 하자가 있는 서얼과 여항인, 또는 과거에 연달아 낙방한 끝에 진출을 포기한 사대부가 생계를 위해 입주 가정교사 노릇을 했다. 학생은 고용주의 자제이므로 함부로 대할 수 없어 꾸짖거나 회초리를 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당연히 학생은 입주 가정교사를 존경하지 않았고, 스승의 권위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전통적인 사제 관계인양 말한다.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널리 쓰이지만, 우리의 옛 기록에는 이런 말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스승을 존경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과거 기록에서는 ‘스승의 그림자’와 비슷한 말조차 찾아볼 수 없다.

원래 중국 당나라 때 쓰인 불교 서적에 “스승을 따라 걸어갈 때는 웃거나 떠들면 안 되고,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도록 일곱 자 남짓 떨어져야 한다[若隨師行, 不得喧笑, 不得蹋師之影, 相距可七尺餘]”라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은 원래 불교의 계율이었던 셈이다.

일본 고전 가운데 『동자교童子敎』라는 책이 있다. 여기에 “제자는 일곱 자 떨어져서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는다[弟子去七尺, 師影不可踏]”라는 말이 있다. 중국 당나라 때 기록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는 것이다.

『동자교』는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책은 가마쿠라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수백 년 동안 어린이용 교재로 널리 쓰였다.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는다’는 말은 자연스레 일본의 속담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 문헌에서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은 해방 직후의 신문에 처음 등장한다. 모두 일본 속담을 인용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은 일본 속담이며,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로 들어와 널리 쓰이게 됐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일제강점기는 교사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다. 무단통치 시기의 교사는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서 수업을 진행했다. 학교가 군대와 다름없던 시절이다. 교육 현장에 회초리질 이상의 체벌이 등장한 것이 이 무렵이다. 학생은 교사를 두려워하고 절대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스승의 그림자도 감히 밟을 수 없는 시절이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일제강점기와 그 뒤를 이은 권위주의 시대의 잔재이다.

스승인 김종직을 통렬하게 비판하다
스승과 제자는 서로 교감하며, 서로 간에 치열한 논쟁을 벌일 수 있어야 함은 굳이 그 유명한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을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스승을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이 우리의 참 스승과 제자의 모습인 것이다.

조선시대 초기 감히 스승을 정면 비판했던 용감한 선비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굉필이다. 김굉필은 성종의 부름을 받고 중앙 정계에 진출한 최초의 사림이었던 그의 스승 김종직에게 시 한 수를 지어 올려 그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道在冬裘夏飮氷(도재종구하음빙)/
霽行潦止豈全能(제행노지개전능)
蘭如從俗終當變(난여종속종당변)/
誰信牛耕馬可乘(수신우경마가승)
도道라는 것은 겨울에 갖옷 입고 여름에 얼음 마심이니,
개면 가고 비 오면 멈춤을 어이 능력 있다 하리.
난초가 만약 세속을 따르면 끝내는 변하리니
소는 밭 갈고 말은 탄다는 말 그 누가 믿으리오.

이 시의 내용을 풀이하자면 다음과 같다. “선생님! 대체 이게 뭡니까? 아무리 추이를 따르더라도 하실 일은 하셔야지요. 날이 개면 길 나서고, 비 내리면 들어앉는 것이야 누가 못합니까? 난초가 세속에 뒹굴면 잡초가 됩니다. 소는 밭을 갈고 말은 사람이 타는 법이지요. 저는 선생님께서 소 등인 줄은 몰랐습니다. 이 눈치 저 눈치 보시며 아무 일도 않으시니 왜 거기 계십니까?” 정말로 신랄하고 독한 비판의 말이었다. 이에 대한 스승 김종직의 답시는 이러했다.

分外官聯到伐氷(분외관련도벌빙)/
匡君救俗我何能(광군구배묘우졸)
從敎後輩嘲迂拙(종교후배조우졸)/
勢利區區不足乘(세리구구부족승)
분에 넘는 벼슬자리 벌빙(伐氷 : 중국에서 경대부 이상의 귀한 가문을 이르던 말. 이런 가문의 상사[喪事]에 얼음을 사용한 데서 나온 말)까지 올랐지만,
임금 바로잡고 세속 구제함 내 어이 능히 하리.
후배에게 못났다는 조롱까지 받게 되니,
구구한 세리勢利일랑 오를 것이 못 되누나.

이러한 김굉필의 신랄한 비판 때문에 스승인 김종직과의 사이가 벌어졌다고 하는데, 이와 같이 그가 스승을 비판할 수 있었던 배경은 『소학』에 제시된 생활규범을 실천하기에 진력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도학 실천 의지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를 바탕으로 개혁정치를 주도한 기호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했다. 조광조라는 도학 정치 사상가가 출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김굉필이 있었던 것이다.

정릉동에서 태어난 개구쟁이 소년, 소학에 심취하다
황해도 서흥을 본관으로 둔 김굉필의 아버지는 유紐이고, 어머니는 중추부사 한승순의 딸이었다. 어려서는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김굉필을 보면 모두 피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개구쟁이 소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어떤 계기로 사뭇 분발해 점차 학문에 힘쓰게 됐다.

김굉필의 집안은 근기 지방의 성남城南·미원迷原 등지에도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주로 영남 지방의 현풍 및 합천의 야로冶爐(처가), 성주의 가천伽川(처외가) 등지를 내왕하면서 사류士類들과 사귀고 학문을 닦았다.
이때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小學』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소학』에 심취해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일컬었고, 이에서 받은 감명을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했더니,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해 자식 구실을 하려 하노니,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라고 술회했다고 한다. 이후 평생토록 『소학』을 독신篤信하고 모든 처신을 그것에 따라 행해 『소학』의 화신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나이 삼십에 이르러서야 다른 책을 접했고 육경六經을 섭렵했다.

김굉필은 수기修己의 대요는 언행을 삼가는 것[謹言行]과 위의를 바르게 하는 것[正威儀]에 있으며, 수기의 근본이 정심·성의에 있으니만큼 수기를 위한 궁행의 요체는 경외를 숭상하는 것[崇敬畏]과 일욕을 경계하는 것[戒逸慾]에 있다고 파악했다. 이러한 수기의 행行이 있은 다음에야 도술을 밝히는 것[明道術], 인재를 가리는 것[辨人才], 정치의 대체를 파악하는 것[審治體], 인정을 살피는 것[察人情] 등의 치인의 대요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수기의 궁행을 의리 실천의 필수 전제조건으로 여기는 점이 학문은 『소학』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 『소학』이 제시하는 생활규범을 실천하는 데 힘썼던 까닭이다.

그리고 그가 살던 시대에는 조선 주자학의 기본문제였던 이발理發과 기발氣發의 문제가 아직 논의되고 있지 않았으나, 그는 이미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세계의 모든 사물 현상이 하나의 정신적인 이로 이뤄졌다고 주장하는 학설)을 간략하나마 다루고 있었다. “천하의 만물은 이理가 있고 분이 있으니, 이理는 만 가지 것이 모여 하나가 된 것이고 분은 가지로 나뉘어도 흐트러지지 않는다”고 해 보편과 특수의 일체성을 강조했다.

한편 “작은 털에도 태극이 갖춰져 있으며 태산이 크다고 하지만 그 역시 하늘이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형이상으로 보면 천지도 또한 일물이 되고 형이하로 보면 사물마다 무극이 된다”고 이일분수설을 설명했다. 그의 이러한 학문은 조광조·김안국金安國 등에 전해져 뒷날 지치주의에 입각한 개혁정치를 주도하게 되는 기호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했다.

평범해 보이지만 치열하게 관직에 임하다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한 김굉필은 장문의 상소를 올려 원각사圓覺寺 승려의 불법을 다스릴 것을 포함한 척불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견해를 피력했다. 즉 원칙에 입각한 정치에 대해 논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이학理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명목의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해 남부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이어서 전생서참봉·북부주부 등을 거쳐, 1496년 군자감주부에 제수됐으며, 곧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좌랑이 됐다.

그러나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됐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학문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썼는데, 특히 조광조와의 만남은 큰 의미가 있었다. 당시 조광조는 17세 살이었는데, 어천찰방魚川察訪(어천은 지금의 평안북도 영변)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왔다가, 인근에서 유배 중이던 김굉필을 찾아가 수학했다.

조광조는 개국공신 조온의 5대손으로 훈구 계열 출신이었지만, 김굉필에게 성리학을 전수받음으로써 중종대 사림파의 영수가 될 수 있었다. 김굉필은 유배 중이었음에도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해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김굉필은 평안도 희천에서 2년 뒤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됐다. 대한민국 생태수도를 지향하는 남도 순천은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순천만과 우리나라 국가 정원 제1호, 삼보사찰 송광사, 낙안읍성 등 명소가 많은 곳으로 널리 알려진 고장이지만, 일찍부터 영남과도 무관하지 않은 도시다. 바로 그 인연은 대구 출신의 문신 김굉필의 혼령이 깃든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김굉필은 젊은 시절을 보낸 대구에서는 이렇다 할 제자를 두지 못한 데 비해 호남에서 유학을 크게 일으켰다. 최산두, 유계린, 윤신, 최충성, 유맹권 등이 제자들이고 김인후, 유성춘, 유희춘 등은 제자의 제자들이다. 특히 호남에서는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되고 필암서원에 모셔진 하서河西 김인후는 김굉필의 제자 최산두를 사사師事한 인물이다.

한편 김굉필은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 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중종반정 뒤 연산군 때에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면서 도승지에 추증됐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게 됐다.

그 뒤 사림파의 개혁 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 구축과 인재 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돼 김굉필의 존재는 크게 부각됐다.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 결과 1517년(중종 12) 정광필鄭光弼·신용개申用漑·김전金詮 등에 의해 학문적 업적과 무고하게 피화됐음이 역설돼 다시 우의정에 추증됐고, 도학道學을 강론하던 곳에 사우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됐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김굉필의 문인들이 피화되면서 남곤南袞을 비롯한 반대 세력에 의해 김굉필에게 내려진 증직 및 각종 은전에 대한 수정론이 대두됐다. 당시의 이 같은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뒤 김굉필을 받드는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 건의가 계속됐다.

그리해 1575년(선조 8) 시호가 내려졌으며, 1610년(광해군 2)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해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됐다.

학문적으로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했다. 그러나 김종직을 사사師事한 기간이 짧아 스승의 후광보다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와 교육적 공적이 더 크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도동서원 앞 은행나무는 알고 있지 않을까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에는 김굉필의 위패를 모신 도동서원이 있다. 그곳에는 가을의 전설처럼 온몸을 노란 잎으로 온통 장식해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는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수령 약 440년 정도의 은행나무다.

흔히 학자수學者樹라 불리는 은행나무는 공자가 은행나무 단壇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해 서원마다 심겨 있다. 이 은행나무의 이름은 ‘김굉필은행나무’이지만 사실 김굉필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 그의 외손자인 한강 정구가 도동서원을 세우면서 심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여러 노거수 은행나무가 있지만 이곳 도동서원의 은행나무는 조금 특별한 자태를 지니고 있다. 겉늙어 보인다는 점이다. 가지는 아래로 쳐져 바닥에 닿아 있고 몸통은 온통 상처투성이로 줄기에서 나온 팔들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받침대를 놓아두었다. 아마도 김굉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듯해 은행나무는 김굉필의 마음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원래 도동서원은 김굉필金宏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568년(선조 1) 비슬산 기슭에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는 이름으로 창건됐다.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604년(선조 37)에 지금의 위치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재창건하고 ‘보로동서원甫老洞書院’이라고 이름하고, 김굉필의 위패를 모셨다. 1607년 ‘도동’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됐으며, 1678년(숙종 4)에 정구鄭逑를 추가 배향했다.

경내의 건물로는 김굉필과 정구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원내의 여러 행사 및 학문의 강론장소로 사용한 중정당, 유생들이 기거하던 거인재·거의재 외에 수월루·환주문·내삼문·장판각·고직사 등이 있다.

이 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없어지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매년 2월과 8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2019년 7월 6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16~17세기에 건립된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돼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도동서원의 묘미는 수월루 앞 18계단을 오른 후 아담한 환주문을 지나 북향으로 지어진 중정당 석축의 디테일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모습은 어디에 견주어도 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도동서원의 자연미는 마치 김굉필이 무오사화에 연루돼 귀양살이와 은둔 생활을 하는 동안에 궁궐의 조정을 멀리하고서, 한가롭게 평화로운 전원생활을 즐기고 있을 때 읊은 시조 ‘삿갓세 도롱이 닙고’와 닮아 있다.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입고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호미를 들고
산으로 들어가 밭을 바삐 매다가 나무 그늘 아래 누웠더니 (어느새 잠이 들어)
목동이 소와 염소를 몰고 와 (그 울음소리가) 잠든 나를 깨우는구나.

이도남 건국대학교 사학과 강사
이도남 건국대학교 사학과 강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