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공공성의 눈으로 본 영화이야기] 상류층의 인간 사냥 장르 영화와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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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공성의 눈으로 본 영화이야기] 상류층의 인간 사냥 장르 영화와 공공성
  • 김기홍 한성대학교 크리에이티브인문학부 교수
  • 승인 2021.03.26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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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와 정치, 그리고 문화콘텐츠
경제적 양극화에 대한 불안과 불만이 깊어지고 있다. 세계적인 추세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이 주도하는 정보 대중화 사이트 ‘데이터로 보는 우리의 세계’(Our World in Data)는 1800년대와 2017년의 다양한 데이터를 비교한 자료를 게시했는데, 이에 의하면 5세 이하 영유아 사망률은 43%에서 3.9%로 줄었고, 29세에 불과하던 평균 기대수명은 72.2세까지 치솟았다. 1년에도 못 미치던 학교 교육 기간은 평균 8.4년이 됐다. 여러 면에서 지구촌은 발전했으며 살만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최상위 국가와 최하위 국가를 비교한 데이터를 보면 여전히 평등 문제에 있어서 전 인류 차원의 해결과제가 산적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평균 기대수명 부문의 1위 일본과 최하위 시에라리온의 편차는 1.6배이고, 학교 교육 기간 1위인 독일과 최하위 부르키나파소의 차이는 9.4배다.

이 정도 편차는 양반이다. 평균 수입과 같은 경제 부문의 양극화는 유독 심각하다. 스위스 등 선진국과 최하위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편차는 87배에 이른다. 산유국 카타르와 같은 특수한 국가와의 편차는 무려 172배다. 한 인간 평생의 행불행에 돈, 즉 가처분소득과 같은 경제적 요소가 미치는 구조적인 영향은 절대적이다. 어디 가서 눈치 없이 ‘부탄 같은 나라는 가난하지만, 국민은 세계에서 제일 행복하지 않냐’는 식의 얘기를 잘못 꺼냈다가는 욕이나 한 바가지 뒤집어쓰기에 십상이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느냐에 따라, 즉 운이나 ‘팔자’에 따라, 삶이 너무 차이가 난다. ‘도대체 내가 무얼 잘못했기에’, ‘저들은 무엇이 그렇게 잘났기에’라는 식의 불만 표출은 자연스럽다.

각국의 국내 사정도 마찬가지다. 특히 2008년 경제공황의 타격이 컸다. 몇 해 전 월가 점령사태에서 보듯,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던 빈부격차가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추상명사 ‘정의’(justice)도 결국 경제자원 분배의 정도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양극화 문제는 반드시 제도 정치의 실패와 결부돼 다뤄진다.

영화를 비롯한 문화콘텐츠도 상류층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추세를 반영해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대중심리에 영합한 산업적 영리 추구이기도 하고, 예술적 표현의 자연스러운 사회 반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노골적으로 힘 있는 자들이 약자를 억압하고 복수하거나 경제 계층의 관계를 중세적 계급 사회처럼 풍자한 작품도 많다. 주로 회사와 같은 조직에서 상하 관계를 주종관계로 표현하는 경우다. 액션 영화 <베테랑>이나 명작의 반열에 오른 <기생충>과 같은 작품들이 모두 이런 모티프를 담아내고 있다.

명시적인 계급 사다리 비판 영화 외에도, 정치풍자를 통해 ‘지배계급’을 해부하는 작품들도 있다. 영화 <헌트>(The Hunt)는 자극적인 오락과 사회의 ‘계급’ 문제를 액면으로 내건 정치풍자의 경계선에 다분히 의도적으로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흥미로운 영화다. 메이저 영화사 유니버설이 배급했고, B급 공포 장르 영화로 유명한 블럼하우스에서 제작했다.

<헌트>와 인간 사냥
기절했던 젊은 백인 여성 A가 정신이 돌아와 주위를 둘러본다. 숲속이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한 가운데 주위를 둘러보니 웬 남성이 재갈을 물고 걸어가고 있다. 그도 영문을 모르는 눈치다. 따라가 보니 숲으로 둘러싸인 넓은 개활지에 재갈 문 남녀가 열 명 정도 있다. 모두 백인이다.

개활지 한 가운데는 사람이 들어가고도 남을 커다란 나무 상자가 ‘나를 뜯어봐’라는 듯 떡 놓여 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들 저어하는데, 한 남성이 다가가 용감하게 상자를 뜯는다. 안에 뭐가 있을지 몰라 두려운 남녀는 혼비백산해 숨는다. 열면 폭발하는 부비트랩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상자에는 의외의 것이 들어있었다. 새끼 돼지 한 마리가 튀어나오더니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자세히 살펴보니 상자 안에는 기관총과 권총, 도검류를 비롯한 무기들이 잔뜩 있다. 주변을 살피던 여성 A는 재갈을 푸는 열쇠를 발견하고 모두의 재갈을 벗겨 준다. 남녀는 취향에 따라 무기를 나눠 갖는다.

이런 도입부는 방 탈출형 인간 사냥 장르의 정석이다. <큐브>(Cube)와 같은 영화가 그렇다. 마취 상태로 납치된 한 무리의 남녀가 깨어난다. 죽음의 위협이 있고, 삶의 희망을 주는 단서도 있다.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무리는 수수께끼를 풀며 단서를 따라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하게 된다. 물론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하나씩 죽어 나간다. 대게 마지막에 한 명이 살아남는데, 여자인 경우가 많다. 이 영화의 경우는 미녀 A인 것 같다.

남자 A가 다가와 권총의 안전장치 푸는 법을 가르쳐준다. 잘생겼다. 백인 선남선녀는 은근한 눈빛을 교환한다. 대게 이런 영화에는 주인공 남녀 둘이 마지막에 살아남게 된다. 위험을 겪으며 사랑이 깊어지고, 청소년 관람 불가이기 때문에 눈요기용 정사 장면이 곁들여지기도 한다. 마지막에 남자가 여자를 살리기 위해 희생하며 억지 눈물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

전개될 내용이 대충 짐작된다. 이런 게 장르 영화 제작의 어려움이다. 예상이 되면 재미가 없는 법이다. 그래서 ‘관객의 예상은 깨고 기대는 저버리지 마라’는 시나리오 집필 철칙이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날아온 총알이 여자 A의 머리통을 산산조각내며 상자가 피 칠갑이 된다. 저 멀리 둔덕에 벙커가 있는데, 누군가 거기서 저격을 하고 있다. 주인공인 줄 알았던 금발 미녀는 엑스트라였다.

혼비백산한 여성 B가 개활지를 가로질러 숲으로 도주한다. 빗발치는 총알을 용케 피해 숲에 거의 다다랐을 때 갑자기 여자가 땅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인간 사냥꾼들이 도주로를 예상하고 함정을 파 놓은 것이다. 누군지 알 도리는 없지만, 놈들은 용의주도한 살인마들이다. 정의감 넘치는 남자 A가 총알 세례를 뚫고 용감하게 달려가 다친 여성을 꺼내 부축해서 함께 숲으로 도주한다. 남자 A가 주인공이 확실해 보인다. 그 순간 둘은 지뢰를 밟아 폭사한다. 깜짝 놀라게 된다. 주인공인 줄 알았던 미남 A는 엑스트라였다.

무슨 이런 영화가 다 있나. 내용 전개도 정신이 없지만, 살인을 희화하는 시각 장치와 태도도 불편하기 짝이 없다. 코미디라고 하기에 살해 장면의 묘사가 지나치게 세밀하고, 긴장과 공포를 조였다 늦췄다 하는 잔기술조차 없이 출연자를 허겁지겁 죽여없애기 때문에 본격 호러 장르라고 보기도 어렵다.

저택게이트와 피자게이트
잔인한 인간 사냥으로 여러 사람이 사망했다. 필사적으로 도망가던 나머지 중 남자 둘, 여자 하나가 철조망을 뛰어넘어 달리고 또 달린다. 저 앞에 주유소와 매점이 보인다. 살았다. 일행은 가게로 뛰어들어 주인인 노부부에게 총을 겨눈다. 놀란 노부부는 손주가 있다고 애원하며 돈을 줄 테니 그냥 가라고 하지만, 일행은 그럴 수 없다.

우선 현재의 위치를 묻는다. 미국 남부 아칸소 중 일레인(Elaine) 인근 31번 국도라고 한다. 도망자 사내가 노부부에게 전화기를 빌려 경찰에 전화한다. 인간 사냥으로 끔찍한 살육이 자행되고 있으니 당장 병력을 보내 달라는 말을 곧이들을 경찰은 없을 것이다. 사내는 ‘저택게이트’(manorgate)를 검색해 보라고 소리 지른다.

저택게이트는 소셜미디어에 떠도는 인터넷 음모론이다. 한적한 모처의 저택에 좌파 엘리트 부자들이 모여 사람을 사냥해 죽인다는 내용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음모론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믿음과 영향력이다. 누군가 제기한 황당한 ‘썰’을 사용자들이 퍼 나르기 시작하고 윤색이 거듭되면서 ‘썰’은 ‘설’이 되고 ‘사실’이 돼 믿는 사람이 생겨난다. 그리고 금세 댓글과 해시태그를 연료로 가상세계에서 활활 타오르게 된다. 소셜미디어의 화염은 금세 현실 세계로 옮겨붙게 돼 있다.

인간 사냥의 대상이 된 희생자들의 공통점은 저택게이트 음모론을 인터넷에 게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보복으로서 실제 인간 사냥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사냥을 하는 부자들은 누구인가?

노부부는 사내에게 실수로 발사될 수도 있으니 총을 좀 치우라고 말한다. 사내는 자신이 평소에도 총을 일곱 자루나 다루고 있으니 실수로 오발할 일은 없다고 말한다. 그때 노파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묻는다.

“왜 총을 일곱 자루나 가지고 있죠?”
“누군가 나를 쏘면 정당방위를 할 헌법적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죠.”
“그렇다면 당신에게 총을 쐈다는 그 사람들도 똑같은 정당방위를 행사하는 것 아닌가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반란 후에도 설탕이 있을까요?”

너희도 총질을 하고 있으며, 상대방도 자기방어를 위해 총을 쏘는 것이므로 살해가 정당하다는 말이다. 너희들이 무언가 원인 제공을 했기 때문에 상대방이 화가 나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죽을 짓을 했으니 죽으라는 말이기도 하다. 노부부는 본색을 드러내고 세 사람을 살해한다. 이들은 범인, 즉 인간 사냥꾼 중 일부였다.

이 모든 사달은 좌파 엘리트들 몇 명이 메신저를 통해 주고받은 대화에서 비롯됐다. 대기업의 중역과 CEO 등 경제적 상류 계층인 이들은 허물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친한 사이다. 노부부도 그 멤버다. 그중 하나가 웃자고 ‘저택에 가서 개탄스러운 인간들을 여럿 도륙하는 것보다 유쾌한 게 어디 있겠어’(Nothing better than going out to The Manor and slaughtering a dozen deplorables)라는 문구를 올린다. 악성 루머 겸 음모론을 응용한 친구 간의 농담이었다. 누군가 이들의 대화를 유출했고, 삽시간에 인터넷을 통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면서 나름 유명인사였던 이들은 모두 사회적으로 매장당한다.

이들 좌파 엘리트 멤버들은 모여앉아 복수를 다짐한다. 인터넷에 말도 안 되는 가짜 뉴스와 부당한 비난을 일삼은 이들 중 우파들을 색출해 마취를 시켜 납치한 후 사냥을 하는 ‘진짜 저택게이트’를 획책한 것이다. ‘너희 우파들이 좌파 엘리트의 은밀한 인간 사냥을 원한다면, 좋다! 실제로 해주마! 단, 너희들을 상대로’라는 식이다. 주유소 매점에서 살해당한 일곱 자루 총을 가진 백인 사내는 총기 소지 반대론자인 좌파 엘리트 부부의 적대자다. 납치당한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백인이며, 백인우월주의자가 주류인 소위 대안 보수(alt-Right) 지지자들이다. 인간 사냥꾼들인 좌파 엘리트들은 ‘정치적 올바름’의 논리로 무장한 위선적인 부유층이자 냉혈 살인마로 그려진다.

영화라지만, ‘좌파 지배계급의 인간 사냥’이라는 저택게이트 설정은 너무 억지스럽고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딱 짚이는 것이 있다. 2016년 트럼프와 클린턴의 선거 유세 기간 중 ‘피자게이트’(Pizzagate)라는 음모론이 퍼지며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미국 민주당 유력인사들과 특정 레스토랑이 결탁해 납치와 아동 성착취를 일삼는다는 식의 황당한 내용이었다. 당연히 클린턴을 흠집내는 데 사용됐었고, 실제로 이런 음모론을 진심으로 믿은 우파 지지자들도 꽤 있었던 모양이다. 영화의 ‘저택게이트’ 설정은 피자게이트를 비롯해 비뚤어진 데다 저급하기까지 한 현실 세계의 정치 공방에서 아이디어를 가지고 온 듯하다. ‘게이트’ 음모론에 입은 상처를 복수하려는 듯 보이기도 한다.

‘개탄스러운 인간들’
영화의 나머지 부분은 ‘여자 람보’급 전사가 등장해 예의 좌파 엘리트 인간 사냥꾼들을 모두 처치하는 B급 액션스릴러로 전개된다. 사람 죽이는 솜씨가 얼마나 뛰어난지, 여주인공 베티 길핀(Betty Gilpin)은 2021년 비평가의 선택 슈퍼 어워드 시상식(Critics’ Choice Super Awards)에서 액션영화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정치적 알레고리를 따지다 보면 의외로 현실 정치와 연계해 해석할 여지가 많은 작품이다. 가령 전체 영화의 사건을 추동하는 방아쇠가 된 ‘개탄스러운 인간들’이라는 표현이 그렇다. 역시 2016년 대선 유세 과정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트럼프 진영을 공격하며 썼던 표현이다.

“뭉뚱그려 얘기해 보자면, 트럼프 지지자의 절반은 제가 말하는 한 바구니의 개탄스러운 인간들입니다. 맞죠? 그들은 인종차별주의자이고 성차별주의자이며 동성애 혐오자, 외국인 혐오자, 이슬람 혐오자들입니다. 이름 붙이자면 더 많겠지요. 불행하게도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트럼프는 그런 사람들을 부추깁니다.”

이 발언은 역풍을 맞았다.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부도덕함을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부당하게 뒤집어씌워 모욕을 주었다는 것으로, 이후 트럼프 지지자들은 저항의 의미로 ‘저는 개탄스러운 인간입니다’(I am Deplorable)라고 써진 티셔츠를 입고 다니기 시작했다. ‘개탄 인간’ 역풍은 확산됐고, 반민주당 우파 결집 효과까지 가져왔다. 결국, 당시 트럼프 진영이 승리했고, 클린턴은 나중에 이 발언이 패배의 한 원인이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선거 후 제작된 인간 사냥 장르 오락 영화에 ‘개탄스러운 인간’이라는 표현이 다시 등장한다. 시기적으로도 가볍게 쓸 수 있는 용어는 아니었다. 미국에서 리버럴이라고 불리는 일군의 좌파 엘리트들이 ‘개탄스러운’ 우파들을 납치해 끔찍하게 살해하고, 납치당한 사람 중 하나가 살아남아 좌파 엘리트들에게 무시무시한 폭력을 선사한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의미 해독에 열을 올릴 만하다. 비평가들의 의견도 분분하다. 어떤 이는 평범한 영화로 평가했고, 정치풍자를 높게 평가한 사람도 있다.
영화 개봉 직전에는 논란이 너무 커지면서, 트럼프 당시 대통령까지 나섰다. <헌트>에 대해 가장 신경질적 반응을 보인 사람 중 하나였다. 2019년 8월 그는 트위터에다 다음과 같은 글을 게재했다.

“할리우드 리버럴들이야말로 최상위 레벨의 인종차별주의자입니다. 그것도 엄청난 분노와 혐오로 말이죠. 그들은 스스로 ‘엘리트’라고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엘리트가 아니에요. 사실은 그들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실제 엘리트입니다. 곧 개봉될 영화(헌트)는 혼란을 야기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지네들이 (영화로) 폭력을 만들어내고서 남 탓을 하려고 합니다. 진짜 인종차별주의자이지요. 우리나라에 매우 해롭습니다.”

이 영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좌파 지지자의 입장에서, ‘개탄스러운 인간들’의 명시적인 대상인 백인우월주의 우파와 트럼프 지지자들을 제거하고 싶은 욕망을 영화를 통해 상징적으로 ‘안전하게’ 해소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피상적인 해석이다. 우파 지지자의 입장에서 좌파 엘리트들의 위선의 탈을 벗기고 피해와 가해를 망라하는 폭력 장면을 통해 상상적인 윤리적 응징을 가했다고 볼 수도 있다. <내이셔날 리뷰>(National Review)와 같은 우파 잡지는 실제 이런 논조의 비평을 하기도 했다. 이것 역시 피상적인 해석이긴 하다.

직접 대본을 쓴 작가들은 좌파, 우파나 특정 정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터넷 문화에 대한 풍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헌트>의 기획 단계에서 잠정적인 가제가 ‘공화당 나라와 민주당 나라의 대결’이라는 의미의 <Red State vs. Blue State>였다는 사실에서 보듯, 이런 구성의 영화가 정치 논란을 피해갈 수는 없다. 그래서 힐러리 클린턴의 ‘개탄스러운 인간들’ 논란에 의한 대선 실패를 그를 지지했던 사람의 입장에서 개탄하는 영화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할리우드는 물론 캘리포니아 전체가 늘 진보에 몰표를 던지는 지역이고 보면, 영화 제작자가 우파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개탄스러운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저기 버젓이 있는데, ‘개탄스러운 인간들’이라는 말을 쓴 것이 빌미가 돼 너무 큰 대가를 치렀다. 영화도 이 용어를 쓴 것이 빌미가 돼 우파의 ‘게이트’ 음모에 휘말려 대기업 CEO에서 쫓겨난 좌파 엘리트 여성의 분노를 그리고 있다. 민주당 지지자의 2016 대선에 대한 자기 파괴적인 복기로 해석할 여지는 충분하다.

영화는 어중간한 열린 결말로 마무리되는데, 위에 언급한 가능성을 모두 적당히 널어놓고 관객에게 취향대로 골라서 분노하면서 즐기라고 말하는 것 같다. 논란을 일으킬 목적으로 보혁 정치갈등 코드를 전용한 혐의도 있다.

<헌트>와 오웰의 <동물농장>
좌·우파 현실정치적 접근에 함몰돼 해석에서 소외된 장면이 있다. 마지막 시퀀스다. ‘여자 람보’ 주인공은 좌파 엘리트 여성을 살해하고 나서, 그 여자의 드레스를 입고 그 여자가 아끼는 1907년산 최고급 하이직 샴페인을 들고서 그 여자의 전용기를 타고서 귀향한다. 이 고급 전용기는 한때 엘리트 여성이 자기 친구들을 태우고 최고급 오세트라 캐비어를 접대하던 자가용 비행기다. 그때 입으로는 ‘정치적 올바름’의 논리로 철저히 무장해 있던 좌파 엘리트 친구는 스튜어디스가 캐비어를 먹어본 적이 없음을 조롱하고, 조리가 불가능한 기내에서 지중해 스타일의 무화과 곁들인 구운 야채나 생선요리를 요구하며 “염병!”이라고 짜증을 내던 사람이었다.

엘리트를 제거하고 그녀의 옷을 입고 기내에 마련된 그녀의 왕좌에 앉은 ‘여자 람보’도 스튜어디스에게 묻는다.

“캐비어 먹어봤어요?”
“아뇨 저는 먹으면 안 되거든요.”
“이제 되니까 앉아서 마음껏 먹어요.”

그리고 샴페인을 병째 들이킨다. 이게 어떤 샴페인이냐 하면, 1차대전 당시 니콜라이 2세에게 가던 배가 독일 잠수함에 침몰당해 함께 수장됐다가 최근 해저 드론으로 건져 올린 엄청난 물건이다. 가격도 한 병에 3억 원이다. ‘여자 람보’ 주인공은 그 샴페인을 들고 벌컥벌컥 ‘병나발’을 부는 것이다. 무엇엔가 홀린 표정으로 보던 스튜어디스가 맛이 어떠냐고 묻자 주인공이 대답한다.

“우라지게 좋네요!”

살인자가 부자를 죽이고 도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혁명의 성공을 상징한다. 주유소 매점 노파가 우파들을 죽이기 전 했던 대사 “반란 후에도 설탕이 있을까요?”(Will there be sugar after the Rebellion?)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프티 부르주아지(petite bourgeoisie)를 상징하는 몰리(Mollie)라는 암말이 했던 대사다. 영화는 <동물농장>의 소품들을 잔뜩 가져다 쓰고 있다. 오웰의 소설은 인간이 동물농장을 방만하게 운영하자 굶주린 동물들이 반란을 일으켜 인간을 축출하고 자신들의 ‘공화국’을 만든다는 설정이다. 주도 세력은 돼지다. 그러고 보니 개활지 한 가운데 놓여 있던 상자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온 게 돼지였다. 알고 보니 그 돼지의 이름이 오웰이다. 인간 사냥꾼들은 사냥 대상자들에게 소설의 등장인물 이름인 모지스(모세), 윔퍼, 복서 등의 별명을 붙여놓기도 했다.

좌파 엘리트들이 ‘여자 람보’에게 붙인 별명은 스노볼(Snowball)이었다.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스노볼은 혁명을 설계하고 시행하다 공동 대장이었던 나폴레옹에게 축출당한 돼지 캐릭터다. 혁명 브레인이자 이상주의자다. 오웰의 의도상 돼지 나폴레옹은 스탈린을 상징했고, 스노볼은 레온 트로츠키였다. 도대체 이 여성 살인마가 트로츠키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사이비 알레고리로 보인다. 그러니까, 무언가 숨겨놓은 메시지나 정치적 함의가 있는 척을 하기 위해 특별히 오마주한 것도 아닌 유명한 문학작품을 소품만 차용해 그 권위를 빌려온 것이다.

다른 해석의 가능성도 있다. 대단히 적극적이고 과감한 해석이 필요하다. <동물농장>에서 혁명을 통한 평등사회 구현 실험은 지배 세력인 돼지들이 인간을 대신한 독재자로 등극하면서 실패하게 된다. 좌·우파 유권자들은 선거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정파가 집권하면 이상이 실현되는 ‘그날’을 맞이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 기대는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무산된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관료정치와 같은 갇힌 체제하에서 선거는 권력의 나들목이나 회전문의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그 나물에 그 밥일 뿐, 양극화나 빈부격차와 같은 궁극적인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는다. 민중들은 기존의 정치 시스템의 한계를 절감하고 피로를 느끼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우리 편과 적의 재설정이다. 스탈린의 관료주의 소비에트를 ‘타락한 노동자 국가’로 비판하다 추방당하고 암살당한 이상주의자 트로츠키는 ‘여자 람보’로 환생해 상상적 복권을 이뤄냈다. 그는 좌파와 우파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죽이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자본의 주인은 하늘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원래 주인’과 같은 것은 없다. 트로츠키는 알고 있다. 좌파에는 우파가 적이고, 우파에는 좌파가 적이라는 설정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분리해서 지배하라’ 식의 대중 기만이었다. 좌·우파를 망라하는 기득권층, 권력층, 부유층이 적이다. 현대판 귀족들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진화해, 혹은 배배 꼬이고 또 꼬여서 이런 시각을 만들어 내었다.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지금 부족한 것은 재화의 절대량이 아니다. 타도의 방법을 고민하는 해묵은 혁명론도 필요 없고, 획기적인 분배 방식의 행정공학적 변화도 아니다.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하나’를 고민하는 담론과 대담한 상상력이다. ‘영원한 혁명’을 통한 지속적인 변혁을 요구했던 트로츠키의 복권은 동물농장 혁명의 상상적 재도전 의지를 상징한다. 트로츠키를 상징하는 스노볼도 상상력이 빈곤해서 실패했다. 반란 뒤에 설탕이 있냐는 말의 질문에 스노볼은 달콤한 가짜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중독적 탐닉이자 허위의식으로 낙인을 찍고 따끔하게 혼을 냈었다. 동물농장에서 새롭게 혁명을 해볼 수 있다면 트로츠키는 설탕과 같은 개인적인 욕망을 올바름의 이름으로 억눌러 결국 획일화에 의한 관료주의 구축을 돕기보다, 사적인 의미와 가치 추구의 영역으로 수용해 유연하고 지속 가능한 혁명을 했을 것이다. 좌·우파 체제를 전복시킨 ‘창조적 파괴’ 이후 주인공이 마시는 ‘우라지게 좋은’ 샴페인의 맛은 반란 이후의 설탕의 맛인 거다.

통상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나 다윗과 골리앗식의 약자와 기득권 대결 구도로 설정됐던 기존의 영화와 달리, 폭력적 오락영화지만 기존의 좌·우파 이분법 구도에 독특한 균열을 낸 <헌트>는 빈부격차, 양극화와 같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화석화된 문제와 해결 단위로서의 현실 정치 체제의 구조적 궁합과 같은 평소 해보지 않던 상상적 해석을 부르는 흥미로운 영화다.

김기홍 한성대학교 크리에이티브인문학부 교수
김기홍 한성대학교 크리에이티브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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