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은 영국이 선진국이다. 고고학적 유물은 이집트가 더 많다. 촌스럽고 좀 억지스럽게 갖다 붙인다. 영국이 이집트보다 더 부유하고 강한 나라다. 이것을 고고학적 유물을 가진 것보다 고고학을 가진 것이 더 세다는 말로 바꿔볼까? 유물은 보이고 만져진다. 지식과 이론으로 체계화 된 고고학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보이고 만져지는 것보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을 가지는 것이 더 실속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학’은 ‘지식’과 ‘이론’이 특정한 대상과 방법으로 묶인 것이다. 여기서 지식과 이론의 힘을 알 수 있다. 유물은 구체적이자 현상적이다. 지식과 이론은 구체적이고 현상적인 것들을 설명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구체적이고 현상적인 것들을 갖는 것보다 그것들을 설명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 더 높다. ‘학’을 가졌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높은 수준의 설명 능력을 가졌다는 말과 같다. 이해해야 설명할 수 있다. 설명하는 능력은 바로 통제 능력으로 연결된다. 통제 능력은 영향력으로 발휘된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접촉하는 세계를 둘로 나눠서 본다. 하나는 구체적인 세계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이고 현상적인 것들을 설명하는 세계다. 영향력과 통제력은 설명하는 것들에게 더 크게 있지 설명되어지는 것들에게 더 있지 않다. 설명을 기다리는 것들을 우리는 구체적이고 현상적인 것들이라고도 하는데, 그것들에 접촉할 때 인간은 ‘감각’을 사용한다. 설명하는 능력이 발휘되어 만들어진 세계, 즉 지식과 이론의 세계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추상의 세계다. 이 세계를 접촉하는 인간의 능력을 사유라고 한다. 당연히 사유의 능력이 감각 능력보다 세다. 보이고 만져지는 세계를 다루는 능력보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세계를 다루는 능력이 훨씬 더 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세계를 다루는 높이에서 감각을 사용하여 무엇인가 만드는 활동이 기능이다. 무엇인가 만드는 일이 사유의 높이에서 일어나는 활동은 기술이다. 여기서 과학적 사유가 개입한다. 그래서 기술과학이나 과학기술이라는 말은 성립해도 기능과학이나 과학기능이라는 말은 성립하기 어렵다. 당연히 기술을 가진 사람이 기능적인 높이에 있는 사람보다 더 세다. 기능적 삶은 과학(기술)적 삶을 이길 수 없다. 감각의 단계에서 쾌락을 만드는 일을 예능이라 하고, 사유의 높이에서 쾌락을 만드는 일을 예술이라 한다. 예술의 단계에서 즐거움을 생산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은 예능에서 그러한 사람을 압도한다.

지식과 이론과 원리와 법칙들은 대개 예술과 친하고, 현상에 직접 접촉하는 감각의 능력은 예능과 친하다. 즐거움을 예술보다는 주로 예능에서 찾는 데에 습관이 된 사람이 원리나 법칙이나 이론적인 높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할 수는 없다. 예능에 젖어서는 창의성이나 독립성이나 하는 것들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창의성이 잘 발휘되지 않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똑같은 의미에서, 기능적인 삶의 태도로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삶을 구가할 수 없다고 말해도 된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세계만 진짜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세계를 없는 세계 취급하면 자유와 독립과 같은 높은 단계의 것들을 가질 수 없다. 바로 종속적 단계다. 이런 단계에서는 ‘따라하기’에 빠진다.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단계에서 ‘따라하기’로 살던 우리가 지금 이 단계에서 가져야 할 사명이 한 단계 더 상승하는 일이라고 할 때, 그 말의 구체적인 의미는 기술(과학)과 예술과 사유의 단계로 상승한다는 말이다. 이제 그 단계에 있는 덕목들이 그 아래 단계의 덕목을 누르며 사는 도전에 나서야 한다.

진시황의 중국 통일은 변방의 작은 나라가 어떻게 발전하여 제국까지 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당시 혼란에 쌓여 있던 전국(戰國) 시기에는 모든 나라들이 다 ‘개혁’에 몰두한다. 철기의 발명을 계기로 새롭게 형성된 생산 방식의 변화가 야기한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어떻게 효율적으로 적응하느냐가 관건인 시대였다. 이것이 당시 ‘개혁’ 바람의 진상이다. 그들은 이것을 '변법’이라고 불렀다. 당연히 변법에 누가 먼저 성공하느냐가 누가 먼저 패권을 갖느냐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진나라를 포함하여 거의 모든 나라들이 기존에 했던 일을 이리저리 바꿔보고, 또 더 열심히 해보고, 관리나 백성들을 다그쳐도 보고, 제도를 수선해보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도해보고 하는 것들로 그 시대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승부가 갈리는 일대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진나라에서 전혀 다른 차원으로 그 시대를 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상앙 의 출현이다. 상앙은 개혁의 핵심을 ‘신뢰’의 회복에서 찾는다. ‘신뢰’가 없이는 어떤 개혁도 이뤄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그 이전에는 있어 본 적이 없는 이벤트를 한다. 성문 밖 남문에 나무를 박아 놓고, 그것을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는 적지 않은 상금을 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백성들은 나라에서 하는 말이라면 이미 시큰둥해져서 어떤 말도 믿지를 않아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상앙이 상금을 다섯 배로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한가한 사람이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장난삼아 그 나무를 옮겼고, 상앙은 정말로 거금을 상으로 주었다. 이렇게 되자 백성들은 상앙이 다른 재상들과는 다르게 본인이 말한 것은 그대로 지킨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 때부터 상앙의 변법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매우 효율적으로 시행되어, 변방의 작은 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대업을 이룰 수 있는 개혁의 길로 착실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나무를 옮겨 신뢰를 세운’(徙木立信) 것이다.

‘신뢰’는 동양에서 흔히 ‘인’(仁), ‘의’(義), ‘예’(禮), ‘지’(智) 등과 함께 거론되는 오덕(五德)이다. ‘신’(信)을 포함한 이것들은 활을 쏘고, 창고를 살피고, 결재를 하고, 전투를 하는 등과 같은 구체적이고 기능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그런 기능들을 지배하는 상위의 힘이다. 구체적이고 기능적인 일이 신뢰와 같은 상위의 힘에 지배를 받을 때, 그 효율성은 그러지 않을 때보다 훨씬 크다. 기능적인 일들이 신뢰 등과 같은 상위의 힘에 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효율성도 떨어지고 혼란스럽다. 기능에 갇혀 있으면 신뢰를 좋은 말이라고 여기기는 하면서도, 실제로는 ‘아직은 아닌 것’ 혹은 ‘귀찮은 것’ 또는 ‘현실적인 효율을 직접 생산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간주하곤 한다.

하지만, 진나라의 예나 그 이웃 나라들의 예에서 보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신뢰’가 크고 작은 일의 성취나 나라의 부강에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 눈이 낮으면 기능에 빠지고, 눈이 높으면 근본이 발휘하는 실질적인 효용을 안다. 눈이 낮으면 효용성은 기능에만 있는 것으로 안다. 눈이 높으면 효용이 없어 보이는 것의 효용을 안다. 이것이 도가(道家) 류에서 말하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의 한 경지다. ‘도’나 ‘맥락’이나 ‘신뢰’나 ‘독립’이나 하는 것들은 보이지 않은 것들이다. 그래서 눈 낮은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무용’(無用)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기능적인 거의 모든 것들은 다 이런 것들에 의존한다. 결국 ‘대용’(大用)을 이루게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 면에서는 한계에 갇혀 있고, 어떤 면에서는 혼란스럽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가진 번민과 지식과 사유 능력은 나를 그렇게 생각하도록 한다. 근본적으로 우선 해결되어야 할 몇 가지 가운데 가장 시급한 것은 신뢰의 회복이다. 지식인, 법관, 정치인, 식당주인, 운전기사, 농부, 어부 등등 사회 전반에 ‘신뢰’가 무너졌다. 이젠 신뢰 같은 것은 없이 사는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한가하게 철학 공부나 하며 사는 사람 눈에는 근본이 무너지고 있는 느낌이다. 최고 높은 단계의 정치에서도 너무 쉽게 자기가 한 말을 전혀 지키지 않는다. 말을 지키지 않는 것은 원칙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여기서부터 ‘개혁’의 동력은 크게 손상을 입는다. 원칙을 지키지 않은 것은 바로 ‘기능’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원칙보다 기능이 더 커 보이는 한 ‘개혁’은 흔들린다. 기능에 의존한 채, 개혁을 이룬 예는 없다. 기능적 정치, 즉 정치 공학을 운전하는 일은 가능해도 정치 자체의 복원은 힘들다. 정치 공학으로는 이 사람을 저 사람으로 바꾸고, 저 사람을 이 사람으로 바꾸는 일은 가능하다. 또 이 진영이 저 진영을 대체하거나 저 진영으로 이 진영을 대체하는 일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이 새 세상처럼 보이지만, 새 세상이 아니다. 정치처럼 보이지만, 아직 진짜 정치는 아니다. 헌 세상의 다른 얼굴일 뿐이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은 신뢰를 가지고 보이고 만져지는 기능을 압도할 수 있는 성숙이 필요하다.

동양의 옛 선현들은 높은 단계의 삶을 지향할 때, 다 ‘도’(道)를 추구했다. ‘도’는 보이고 만져지는 것들을 잠시 포기하며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은 세계로 쉼 없이 상승하고 또 상승하다가 어느 극점에서 마주칠 수 있다. 그래서 ‘도’는 이름도 없고(無名), 형태가 없다(無形).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보이기도 하고 만져지기도 하는 만사만물 가운데 ‘도’의 지배를 빗나가는 것은 없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은 단계의 최 극점에 있는 “‘도’에 접촉하면, 세계의 맥락과 흐름에 통달할 수밖에 없다. 세계의 맥락과 흐름에 통달하면, 이리저리 저울질을 제대로 해서 정확한 판단과 시의적절한 정책을 펼 수 있다. 그러면 누구도 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知道者必達於理,達於理者必明於權,明於權者不以物害己, ‘장자’·‘추수’)  ※광주일보 게재 칼럼을 전재하였습니다.

최진석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최진석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저작권자 © 더퍼블릭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