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주민자치 패러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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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주민자치 패러독스
  • 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 승인 2021.04.0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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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고 봄이 온 것은 아니다.”지금으로부터 2300여 년 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멋들어진 말을 남겼다. 이말은 ‘우나 히룬도’(Una hirundo 한 마리 제비가) ‘논파킷 베르’(non facit ver 봄을 만들지 못한다)라는 라틴어 격언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그리스어 격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권에서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며 따사한 날 하루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란 점을 주지시킨다. ‘윤리학’이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말을 탁월한 인간, 탁월하고 행복한 삶을 원하는 사람에게 귀담아 들으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이어 말한다. 봄이 그러하듯, “탁월하고 행복한 하루나 짧은 시간이 지극히 복되고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어쩌다 운동 한번 했다고 ‘몸짱’이 되는건 아니란 얘기다. 아테네 판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들으며 우리나라 주민자치의 현실을 떠올리게 되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정치인, 말 아닌 행동해야
연세대 학부생들에게 ‘니코마코스’에 대한 열띤 토론을 시킬 때마다 필자는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곤 한다. 그런데 올 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주민자치와 관련해 두 가지 관점에서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첫 번째 데자뷔(déjà vu)는 주민자치에 대한 정치인의 말과 행동이다. 말만 한다고 주민자치의 봄이 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주민자치의 당위성에 대한 정치인들의 말은 행동이 따르지 않는 한 정치적 레토릭(rhetoric)에 그칠 뿐이다.

새해 전후로 주민자치의 실질적 이행에 대한 많은 말들과 약속 그리고 그에 따른 기대와 믿음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쌓여 있었다. 명실상부한 민주공화국이 되기 위해서는 풀뿌리민주주의가 이뤄져야 하며 이를 위해 읍면동의 실질적 주민자치는 필수조건이라는 의견들이 학계와 주민자치 현장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우리나라 읍면동의 수가 3500여개에 이른다는데 실제로는 아무런 자치권이 없는 실정이니 그렇지 않겠는가.

자치권은 우리사회 공동선을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행복이나 민주란 개념이 그러하듯 자치의 권리는 무엇보다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이자 선(善)이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다. 주민자치를 통해 어떤 개인적 이득이 없더라도 그 자체로의 ‘좋음’인 자족인 것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우리가 말하는 자족성으로서의 주민자치는 자기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닌 공동체를 위한 자족성이다. 이렇게 본다면 주민자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것으로서 철학자 칸트의 정언명령(定言命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동향을 보면 행정안전부나 일부 지자체장들에게 주민자치는 정언명령 아닌 가언 명령(假言命令)에 불과할 뿐이다. 창원시의 주민자치조례 개정은 단적인 사례이다.

『월간 주민자치』(2021년 1월호)에 따르면 창원시는 지난 12월 주민자치에 오히려 역행하는 조례를 개정하였다. 전상직 한국자치학회장은 한 마디로 ‘주민자치를 무력화시키는 사태’라고 규정하였다. 비슷한 시기 국회에서 통과된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에서는 주민자치회가 좌절되었다. 지방의원 소환제 도입과 주민의 직접참여권 확대 등의 내용이 담겼다고는 하나 정작 핵심인 주민자치회에 관한 조항은 강제로 실종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국회의원 두 명이 각각 대표 발의한 ‘지방자치법 일부개정법률안’과 ‘주민자치 기본법’안 내용은 주민자치의 본령을 되찾는 길이 참으로 험난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국회의원을 포함한 정치인들 중에 주민자치를 반대하는 사람은 최소한 겉으로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주민자치 관련 인터뷰 내용들을 보면 많은 정치인들이 ‘풀뿌리민주주의는 주민 참여로 완성’되기에 주민참여 확대와 주민자치회 강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주민자치의 철학적이며 실존적인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문제는 당위성 수준의 말에서 그친다는 점이다. 앞서 말한 국회에서 통과되었거나 대표 발의된 법안이 이를 잘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만드는 것이 아니듯 한 두 마디의 옳은 말이 탁월한 정치인이나 지자체주의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제비들을 일상적으로 볼 수 있을 때 봄을 실감하게 되며, 정치인의 말이 주민자치 실현을 위한 일상의 행동으로 이어질 때 그 정치인의 탁월성이 입증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성이 능력(dynamis)의 문제가 아니라 행동(energeia)의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다. 조성진의 탁월성은 피아노 연주에서 나타나며 손흥민은 축구장에 내려와 경기를 할 때 비로소 축구선수가 된다. 주민자치에 대한 국회의원, 정치인들의 진정성과 탁월성은 실질적인 주민자치법안을 마련하고 통과를 위해 팔을 걷어붙일 때 비로소 입증된다. 주민자치의 핵심이 빠진 국회의원들의 발의안들을 보면, 봄은 왔지만 새가 사라져 조용하기만 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연상하게 된다.

‘스톡데일’ 아닌 ‘주민자치’ 패러독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비 한 마리’가 불러일으키는 또 다른 기시감은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이다. 주민자치에 대한 정치인들의 낙관적인 정치적 수사(修辭) 때문에, 혹은 진정한 민주적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읍면동장의 직선제 부활이 필수적이란 신념 때문에 혹시 간과하는 것은 없는가 하는 점이다.
코로나19 사례를 들어보자. 지난 1월 세계보건기구(WHO)는 다소 충격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내용의 발표를 하였다. “올해 안에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에 대한 집단 면역이 형성되지는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WHO의 발표에 크게 실망했다. 왜 아니겠는가? “2020년을 리셋하고 싶다”고 할 정도로 지난해는 잃어버린 1년이었다. 새해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코로나19의 먹구름을 걷어내고 찬란한 햇살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름도 생소한 백신들이 언론에 거론되고 국산 치료제 개발 소식이 전해지면서 코로나 해방의 기대와 희망은 더욱 부풀어갔다. 백신 부작용을 우려해 먼저 맞은 사람들의 상태를 봐가며 맞겠다는 다소 배부른, 그러나 합리적인 ‘배짱’을 부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배짱이 후회될 정도로 코로나19 상황은 좀처럼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기대와 희망이 낙관적이었기에 실망과 좌절감은 더욱 크게 다가오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그런 실망과 허탈은 삶의 의욕 상실이나 마지막 남은 생명의 끈마저 놓게 한다.

낙관적 희망을 갖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때론 그런 낙관적 전망에 비관적 결말이 예고되어 있다는 ‘역설’이 존재한다. 이른바 스톡데일 패러독스다(평생학습타임즈 2021년 2월 4일자 필자의 글 인용). 짐 스톡데일은 미 해군 중장으로 예편한 사람이다. 그가 유명해진 건 베트남 전쟁에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격추되어 8년간 포로수용소 생활을 견디고 돌아온 불굴의 스토리 때문이다. 그는 ‘하노이 힐턴’ 전쟁포로 수용소에 갇힌 최고위 장교였다. 수감 생활 중 절반을 가로세로 90㎝, 275㎝ 독방에 갇혀있었고 20여 차례의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그 고통을 극복하고 살아남았다. 전쟁이 끝나자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스톡데일은 미국 최고 훈장을 받고 전쟁 영웅으로 미국인의 존경을 받았다. 1992년 미국 대선에서는 제3후보 로스 페로의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스톡데일의 이야기가 알려진 것은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미국의 저명한 경영학자 짐 콜린스가 저서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김영사, 2005)에서 그의 사례를 분석하였기 때문이다. 짐 콜린스는 위대한 기업으로 성장한 회사의 공통된 특징을 ‘스톡데일 패러독스’라 명명했다.
콜린스는 스톡데일이 지독한 고문과 운명의 불확실성, 지옥 같은 환경 속에서 견뎌낸 비결이 궁금했다. 그의 첫 인터뷰 질문은 이랬다.(p.135) “견뎌 내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아, 그건 간단하지요. 낙관주의자들입니다.” 스톡데일의 답은 이어졌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나갈 거야’하고 말하던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가 오고 크리스마스가 갑니다. 그러면 그들은 ‘부활절까지는 나갈 거야’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활절이 오고 다시 부활절이 가지요. 다음에는 추수감사절, 그리고는 다시 크리스마스를 고대합니다. 그러다가 상심해서 죽지요.”

역설로 번역되는 패러독스(παράδοξος)는 그리스어 접두사인 ‘파라(παρά)’와 명사 ‘독사(δοχα)’의 합성어이다. ‘독사’는 진리를 뜻하는 ‘에피스테메(episteme)’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단순한 ‘개인적 의견[私見]’을 말한다. ‘파라’는 ‘~을 넘어(beyond)’, ‘~과 별도로(apart from)’란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패러독스는 개인적 의견[생각]과 별도로 또 다른 반대되는 생각이나 의견이 공존함을 뜻한다. 스톡데일은 패러독스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건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결국에는 성공할 거라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눈앞에 닥친 현실 속의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하는 겁니다.”

주민자치, 현실 속 냉혹한 사실들
코로나19와의 싸움은 결국에는 성공할 것이란 낙관적 믿음은 필요하다. 그래야 지금의 비정상을 견디어 낼 희망이 있지 않겠는가. 허나 그와 동시에 WHO의 발표대로 ‘백신의 생산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인내심이 필요하며 백신 접종이 이뤄지는 동안에도 마스크 착용, 사회적 거리 두기, 손 씻기와 같은 예방 수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전상직 회장이 표현한대로 주민자치를 위한 “샅바싸움”(주민자치 2021년 2월호)이 결국에는 성공할 것이란 믿음은 필요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제비 한 마리’처럼 정치인들의 정치적 수사 혹은 주민자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분들의 신념과 노력만으로 주민자치의 봄이 온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스톡데일의 역설처럼 눈앞에 닥친 현실 속의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하고 타개해 나가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 ‘냉혹한 사실들’이란 무엇일까? 주민자치의 역사는 그 사실을 어렵지 않게 말해주고 있다. 6.25전쟁 속에서도 꽃피운 읍면의회 및 읍면동장의 직선제가 이승만 독재체제, 4.19혁명, 5.16 군사쿠데타에 직면하면서 어떠한 부침을 겪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니체의 말을 빌리면 주민자치는 “그 누구에게도 기적의 선물처럼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민주화나 주민자치는 이를 억누르는 정치권력이나 정체(政體)에 대항할 시민의 세력이 형성되지 않는 한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역사가 보여주는 ‘냉혹한 사실’이 바로 이것이다. 시민세력은 쿠데타가 아닌 시민들의 계몽된 의식으로 형성됨은 물론이다. 주민자치에 대한 계획적이며 치밀한 교육의 시급함이 냉혹한 현실이다.

정치인, 행정가들이 유혹에 빠지기 쉬운 패배주의적 주민자치 의식은 눈앞에 닥친 또 다른 현실일지도 모른다. 우리사회는 1987년 민주항쟁을 거쳐 2017년 촛불시민혁명을 딛고 일어선 현재에도, 과거 독재의 유습인 읍면동장 임명제를 시행하고 있는 아이러니 속에 있다. 채진원 교수가 지적한대로, 최근 읍면동장 주민추천제는 임명제보다는 진전된 형태이기는 하나 1950~60년대 주민들이 경험했던 읍면동 직선제에는 턱없이 미달하는 것이다.(주민자치 2020년 11월호) 물론 ‘직선제’에 등 돌리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허나 교육의 관점에서 볼 때 일종의 ‘학습된 무기력’이다. 정치인, 행정가들의 과거의 지식과 경험이 현재의 의식과 사유방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다.

혹시라도 주민들에게 자치의 임파워먼트(empower ment)를 부여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나 불신이 아직도 웅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말 그대로 시대착오적이다. 이런 의구심을 합리화시키려는 듯 외국에서 성공한 제도를 우리문화에 이식하는 것을 경계하는 논리를 들이대기도 한다. 소위 ‘제도이식론’의 경계는 부분적으로 설득력을 지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해보지도 않고 지레 겁을 먹는 패배주의적 사고가 아닐 수 없다. 기술의 변화는 눈에 보이지만 인간의 의식이나 가치관은 보이지 않게 변화한다. 정치인, 행정가들은 학습화된 무기력에 빠져 있는 반면 주민들의 의식은 이미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주민자치는 반드시 성공한다는 뜨거운 믿음은 필요하다. 동시에 눈앞에 닥친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하는 차가운 머리가 요구되는 것이 바로 지금이다.

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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