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 있는 풍경’은 ‘마을’의 속살을 가만가만 들여다보고 소곤소곤 소통하는 코너입니다. 더 없이 가깝고 밀착돼 있지만 적지 않은 이들에겐 대체로 멀기만 한 마을의 이야기를 때론 지직거리고 둔탁한 확성기로 때론 고성능 마이크의 ASMR로 들려드립니다.<편집자 주>

내 어릴 적 겨울은 늘 사랑채의 얼콰한 흥분과 함께 소환된다.
나는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몇 년 다녔고 나머지 학교생활은 서울에서 보냈지만 학창시절의 모든 방학은 부산 외가에서 지냈다. 방학의 기억은 모두 그 배경이 부산 동래구의 작은 농촌 마을이다. 외가 마을의 이웃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었고 외지에서 흘러 들어온 몇 가정을 제외하면 친척관계인 씨족 마을이었다.

씨족 마을이란 말할 필요 없이 그 공동체성이 얼마나 끈끈하겠는가. 각 가정마다 일 년에 5~6번 있는 제사가 수십 번으로 기억되는 이유도 그 끈끈함의 결과다. 제사를 드리는 가정뿐 아니라 제사가 끝난 후 나누는 음식으로 인해 모두가 함께 제삿날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제사는 어김없이 자정이 넘어야 진행되었다. 제의가 끝나면 여러 개의 광주리에 제사음식을 나눠 담는다. 그리곤 그 한밤중에 친척집으로 배달을 간다. 머리에 광주리를 하나씩 이고. 나도 10살 즈음부터는 배달자의 몫을 감당했던 것 같다. 어느 집에 무슨 제사가 있는지 다 알고 지내니까 그날은 잠들지 않고 기다리신다, 최소한 며느리 한 명쯤은. 그래서 직접 드리는 제사뿐 아니라 늦은 밤 받아 든 제사음식을 먹는 모든 과정이 제사처럼 기억 돼 외가에서의 나날은 무수한 제사의 연속 같이 느껴진다.

일 년 5~6번 제사가 수십 번으로 기억되는 이유
다소 경건한 제사의 기억 대척점에는 겨울 밤 외갓집 사랑채에 모여든 여인들의 시끌벅적한 모임이 있다. 모두 할머니들이었다고 생각된다. 젊은 며느리들은 참석하지 않는 자리였으니까. 일찍 어두워진 밤이 한참 더 깊어질 즈음에 할머니들이 몰려들었다. 완고한 남자들의 세상, 게다가 경상도 부산. 일 년 내내 자기주장을 담아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던 여인들이 당당한 새 얼굴로 와서는 자정을 넘겨가며 소란스러웠다.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각자 의견을 내는 소리가 방문을 넘어 왁자했다. 술과 안주가 늘 준비돼 있고 어찌나 유쾌한 대화들이 오고 가는지 그대로 겨울 밤 여인들의 파티였다.

사실, 그 매일 밤의 파티는 정월대보름날의 ‘지신밟기’를 준비하는 모임이었는데 말하자면 운영위원회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들여다봐도 ‘지신밟기 운영위원회’라기 보단 그들만의 아라비안나이트가 아니었나 싶다. 지신밟기라는 하나의 연극을 마을이라는 무대에 올리기 위해 콘티를 짜고 동선을 정리하고 대사를 준비하는 회의체였는데 그 과정자체가 그녀들에게는 회포를 풀고 숨은 재능들을 마음껏 발산하는 매일 밤의 파티였던 셈이다. 일 년을 묵묵히 농사와 살림살이를 살아낸 그녀들에게 축복처럼 주어진 시간이었다.

평소에 술 마시는 모습을 보인 적 없는 외할머니는 매일 밤 발그레하게 취하셨다. 주사까지는 없었던 걸 보면 우리 할머니는 술이 꽤나 센 분이셨던 듯하다. 가끔 그녀들의 사랑채에 기어들어가 끝까지 깨어있지 못하고 할머니 무릎에서 잠들어버리곤 했는데 그때 그 자리에서 마음껏 매력을 뿜어내던 여인들은 내가 평소에 보았던 그 할머니들이 더 이상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할머니들은 ‘그녀들’이 되었고 며느리로, 아내로, 어머니로 살아갈 때와 또 다른 자아가 풀어헤쳐졌다. 깊숙이 감춰져 있던 소극적인 그러나 진짜의 그녀들이 서사가 되어 서로에게 나눠졌다. 그녀들은 재기발랄 했고 자기 주도적이었으며 아이디어가 풍성했다. ‘지신밟기’를 어떻게 흥행시킬지 너무 잘 알고 있는 기획자이자 연출가이고 배우이며 의상디자이너이자 음악가들이었다.

‘할머니들’이 ‘그녀들’이 되는 그 밤들의 광경
‘할머니들’을 ‘그녀들’로 만들어준 것이 마을이다.
마을은 사람을 품는다. 서로서로 연결돼 그들의 숨은 에너지를 일깨운다. 그 에너지를 받아준다. 왜냐면 그들 삶의 서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지신밟기에서도 여지없이 그 서사는 작동했다. 처음으로 합류한 젊은(?) 할머니에게 타이틀 롤을 맡겨 의욕을 불어넣어주고 축복과 지지선언을 해주는 것이 그런 서사의 힘이다. 그 최연소 할머니가 살아낸 날들을 잘 알고 있고 앞으로의 삶도 만만치 않음을 알기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나는 대학 졸업 후 40년 가까이 일하고 있다. 일터가 여러 차례 바뀌었다. 처음 20여년은 광고대행사에서 일했고 그 후 기업의 마케팅 부서에서 주로 고객을 연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지금 근무하고 있는 ‘CNCITY에너지’에는 평생 이 회사에서만 근무하신 분들이 꽤 있다. 기업의 서사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다. 함께 오래 근무한 사람들끼리는 눈빛만으로도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서로 위안이 된다. 좋은 시절 어려운 시절 다 함께 겪어냈기 때문이다.
지난날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마을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때로는 회사가, 때로는 동호회가, 때로는 교회가, 때로는 학교가 마을을 대신해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서사를 받아주고 자신의 삶을 나눠주고 그 맥락 속에서 상대를 관계하는 그런 새로운 마을이 필요하다"

유명인과 결혼했다가 이혼한 일반인(?) 남자가 있다. 그는 대기업에 다닌다. 이혼 이후로 그는 세상을 두려워했다. 세상을 몹시 불편해했다. 자신은 원래 일반인이었던,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일반인인 사람인데 세상에 얼굴이 ‘팔렸다’. 세상에 나가면 누구의 남편이었던 남자, 그러나 이제 이혼한 남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너무 부당했다. 그 이름을 가진 남자는 자신과 별로 상관없는 존재같이 느껴졌지만 세상은 그를 그리 불렀다.

그래서 그가 가장 평온함을 느끼는 곳은 회사라고 한다. 결혼 전의 그를 알았고 결혼 중의 그를 알았고 이혼 후의 그를 여전히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안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삶의 서사를 아는 사람들, 같이 지켜본 사람들, 그래서 유명인의 남편이 아니라 ‘그’라는 본질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 없이 자신을 맡길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을의 공동체적 힘 점점 사라져...대안적 마을 필요
마을이 가졌던 공동체적 힘을 점점 잃어가는 시대이다. 대안적 의미의 마을이 필요하다.

때로는 회사가, 때로는 동호회가, 때로는 교회가, 때로는 학교가 마을을 대신해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서사를 받아주고 자신의 삶을 나눠주고 그 맥락 속에서 상대를 관계하는 그런 새로운 마을이 필요하다.

정월 대보름에는 온 마을이 떠들썩했다. 집집마다 다니며 소리를 하고 춤을 추고 각 가정이 기다리며 준비한 음식을 나누었다. 우리는 지신밟기 공연(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공연이었다. 그녀들의 삶이 녹여지고 버무려진 한 바탕 거나한 공연)을 하루 종일 따라다녔다. 어둑해진 후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꽃처럼 아름다웠다. 발그레한 뺨은 술기운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지난 한 해 동안의 애환을 풀어놓고 뜨겁게 달궈서 모두 승화해 날려버림으로 무결한 존재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무결한 존재는 다시 한 해를 살아낼 힘을 얻고 아내의, 며느리의, 어머니의 자리로 돌아가 그 역할을 묵묵히 감당해 낼 것이다.

박소원 씨앤씨티에너지 마케팅 이사
박소원 씨앤씨티에너지 마케팅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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