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는 일에서 재미를 붙이는 일로
우리는 지금, 팬데믹에 갇히면서 자신을 둘러싼 불요불급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깨닫게 된다. 이 상황이 멀쩡하다고 착각했던 우리 모두는 무언가 불편을 감수해야만 하는 생활 속으로 몰아 세워지고 있다. 이제 이 불편이 어디서 오는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무엇인가에 막히고, 기존에 당연시했던 일을 꺼리게 하는 사람이 돼 버린 사태로부터 이해된다.

이제 이렇게 각성해 눈을 떠 보면, 주위에 ‘우리’라고 결코 부르지 않았던 장애인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들은 원래 장애-가려 막히고, 꺼리는 대상으로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굳이 장애인이라 부른다. 왜? 이 단어를 의심하지 않으면서 살고 있나? 일단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살고, ‘우리’라고 부르며 살아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야만 한다.

장애인 생활 활동 지원 시설 ‘NPO 법인 달과 바람과(이하 달과 바람과)’의 고민이자 활동을 살펴보자. 사람에게 자신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물어본다면, 각양각색의 답이 나올까? 아니면 지나치게 평범해서 서로의 필요를 서로가 너무 쉽게 확인해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필요불가결한 것은 아니지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채, 단지 있으면 즐겁고 기쁜 것일까? 일반적인 복지시설의 개념과 다른 지향성을 갖고 실천하려는 ‘달과 바람과’는 그런 ‘불요불급한 일, 쓸데없는 일’에 눈을 크게 뜨고 있다.

장애인과 접하는 동안 ‘재미를 붙이는 일’을 소중히 하고자 한다는 이 단체-‘달과 바람과’는 틀에 얽매이지 않은 발상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만들기 시작한다. 심신장애인의 생활 활동 지원 시설 NPO법인 ‘달과 바람과’는 2006년 11월에 고베현[神戸市] 아마가사키시[尼崎市]에서 설립됐다. 복지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면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일’에 관심을 두기보다 “함께 하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 방식을 고민했다. 결론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는 행동을 서로 격려해 보는 것이었다. 왜냐고? 이 단체는 이 질문을 스스로 하고 스스로 답한다. 그것이 재미있으니까!

재미를 느끼고자 하는 욕구는 사람의 사람다움을 드러내고, 지켜내는 ‘일’ 중 하나이다. 재미란 유희 충동을 채우는 ‘일’로부터 비롯된다. 충족 그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유희 충동, 즉 일상적인 일탈을 향해 정서의 변환이 뒤따른다는 확신을 과정으로부터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에서 우리는 재미를 “재미있다”면서 말하고 느끼는 것이다. 재미는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이며, (수준과 정도의 한계-경계 안에서) 정서적 수용에 타당하도록 수행하고 있는 ‘일’의 차원으로부터 재미가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놀러 가자’라는 말을 쉽게 한다. 이 노는 일이 재미와 관련 있기 위해 ‘놀고자 하는 욕구’가 일상적 일탈과 맞물려 있어야 하는데, 이때 일탈이란 일상이라는 순환적 생활 태도에 틈을 만들어 주는 계기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재미는 그 틈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 틈은, 비장애인보다 장애인 스스로가 그 틈에 대해 말할 때 쉽게 재미와 연관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답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장애인들의 일상에 일탈을 스스로 말하고 수행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든다면 그들은 비로소 ‘놀러 가자’를 실행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어떻게 이 일관된 연관적 일탈을 수행하도록 프로그램을 운영할 것인가? 예술적 사고가 필요한 부분이 바로 이 시점과 지점에서 발휘돼야 한다.

우리의 틀 안에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 없어야
‘달과 바람과’의 프로그램을 통해 좀 더 실감 나는 사례를 보도록 하자. 장애인들에게 공중목욕탕을 이용하는 ‘일’은 기존 복지회관의 중요한 프로그램으로 정착돼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목욕을 재미와 연관지어 ‘놀러 가’듯 ‘목욕-놀이’를 하는 경우와 비교해 보면, 그들에게 목욕은 일상적 시간표에 짜인 복지서비스의 ‘일상적 일’이 됐다는 사실에 놀라워할 수밖에 없다. 그들도 우리 모두처럼 목욕 그 자체를 “재미있는 일”로 원하지 않을까? 왜 이 쉬운 질문을 우리는 하지 못했을까?

‘달과 바람과’는 이 목욕-재미를 프로그램으로 운영한다. 이제 장애인들에게 ‘쓸데없는 일’로 보였던 목욕 그 자체의 놀이라는 의미를 동네 공중목욕탕에서 우리 모두와 함께 하는 ‘일’은 바로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 우리의 일상의 틈 안으로 우리 모두를 초대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이런 단순한 발상 안에는 무척 중요한 공공예술적 사유 방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 우선 함께 하는 사람들이 사유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집단지성이라는 용어로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지성이라는 무거운 용어보다 함께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새로운 사유 방향을 찾는 일로 이해해 보자. 그렇다면 전통적으로 한 사람의 고유한 발상(아이디어라고 쉽게 부름)과 개인의 수고와 재능으로부터 결과물이 도출된다는 전통적 예술관으로는 이 함께 사유한다는 사태를 설명할 수 없다. 문제는 단순할 정도로 바로 이 부분에서 시작된다.  

또, 적은 인력이 이 행동에 참여하고 다양한 외부의 협력관계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점이고, 바로 이런 공공예술적 사유와 동일한 행태를 ‘달과 바람과’가 보여주고 있다. 그 이유는 ‘함께’에 참여하는 사람이 군중群衆으로까지 비현실적 행동 패턴으로 번지는 무용한 지경에 이르는 우愚를 실천단계에서 적절하게 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 지나치게 이상적인 논리를 펴면서, 결코 실행할 수 없는 덕담 차원의 결론을 마치 전문가의 소견처럼 말하곤 한다. 하지만 공공예술적 사유란 실행할 수 없는 것을 지향하지 않으며, 탁상공론卓上空論에 머무는 어리석음을 더 이상 예술과 유관한 어떤 것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공예술이란 함께 생각하고 관계 형성을 통해 그 사유를 지금-여기 우리의 삶 안에서 실천하는 ‘일’과 직접적 연관을 통해 드러난다.

우리는 함께 생각하기라는 공공예술적 사유 방식에 따라 여러 장애-비장애의 관계로부터 다양한 삶의 욕구를 예술적 행위로 이끌어낼 수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가령 서로 가까이 다가가기, 이 단순한 욕구는 인간 본연의 관계에 대한 욕구이다. 따라서 장애-비장애를 이미 그렇게 용어로 구별하고 있는 사회 전반의 인식에서 솔직하게 생각의 출발점을 잡아 본다면, 우리 모두라는 의미에서 장애를 두고 벌어져 있는 두 집단이 서로 다가서려는 모임은 절대로 필요하다. 이것이 하나의 문화여야 함에도 여전히 새로운 문화로 보인다면, 우리 사회는 무책임한 지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꼴을 자임하는 셈이다.

하고 싶은 일을 직접 말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가가려는 모임을 프로그램으로 운용해 보자. 그것을 굳이 문화-예술 교육 운운할 이유는 없다. 그 필요-욕구는 함께 요청돼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 다가섬을 유지할 수 있을까? 매주 차 한 잔 나누어 마시는 자리를 정기화하는 프로그램은 어떨까? 함께 동일한 취미활동을 하는 모임을 만들고 유지해 보는 ‘일’은 어떨까? 지역과 유관한 시와 소설, 에세이 등을 낭독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소박한 독서회는 어떤가?

지역마다 제 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공공시설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위한 장소 제공, 시설활용의 행정적 서비스를 지원한다면, 함께하는 일이 공허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복지’와 ‘재미있다’는 일견 대극점에 있는 듯한 두 요소를 한 곳에 합쳐질 수 없다는 인식을 우리는 왜 가지고 있는가? 복지는 그저 좋은 일이라는 차원에서 머무는 ‘일’이자 행정 단위의 서비스라는 형식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가?

각자의 삶에서 본질적인 복지(福祉, welfare)는 ‘행복한 삶’을 지시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편편片片한 각자의 것으로 치부돼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결코 서비스를 통해 얻어지는 것일 수 없으며, 주고받는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복지란 각자의 인간다운 인간적 삶의 중요한 요소이자 지향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원적 욕구라는 측면에서 재미처럼 복지 또한 본래적 욕구라 할 수 있기에 재미와 복지는 결코 이원화돼 분별되는 용어로 삶 안에서 취해질 수 없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달과 바람과’의 시작은 분명 지역 내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는 발상으로 시작한 프로그램을 통해 스스로 성장해간 지역의 생활문화로 정착하고 있다. 이는 복지와 장애인과 관련한 일을 하는 사람을 하나의 사회적 관계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인간적 행위와 욕구 그리고 그것을 위한 ‘우리 모두’의 의미로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 있다’고 말하며 가능한 한 진입 문턱을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낮추는 것을 의식하고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운용했기 때문이다.

결국, 복지-행복을 추구하는 삶에 대한 이해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즐기는 이벤트로 응축된 프로그램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도달하게 됐다.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것은 지역 라디오 방송을 구성하고 여기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위트를 정식 시간대에 독립 방송 프로그램으로 운영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획들로부터 생겨난 변화는 ‘장애인들이 하고 싶은 일들을 직접 말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애와 비장애의 벽을 허무는 실천의 조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많은 일을 스스로 이미 포기한다. 안타깝게도 “사실”이다. 그것도 무척 강한 확신을 가지고 이미 단절이라는 경계선 안에 머문다. 그런데 비장애인 또한 마찬가지 형국의 삶을 산다. 스스로 이미 차단의 벽 앞에서 확신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 ‘장애인은 안 돼요’ 하면서 우리는 서로 자신에게 진짜 필요한 요구조차도 하지 못한 채로 살고 있다.

여기서 진정 ‘우리 모두’와 ‘함께 산다’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살피는 일은 그래서 공공예술적 사유의 방식과 닮아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공공예술의 전환적 사고 역시 바로 이 부분에서 재차 발견하게 된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 간절한 요구는 바로 ‘잘 안 돼도 괜찮으니 해볼까’ 하며 조금씩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이 보여주는 ‘일’이다. 그래야 그러한 일들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든다.

장애-비장애의 사이에서 우리의 실천은 단순한 두 가지 조건에서 ‘갖춰져 있음’으로 시작하고 그 자체가 곧 성취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첫 번째, 재미없다고 생각되면 그만둬도 좋다. 그만두는 이유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다. 자주 오지 못한다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다. 오고 싶을 때 오면 된다는 행동 지침이 그것이다.

둘째, 실천 단위를 사업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전국적으로 체인점을 1천 개 정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이 체인-연결망으로부터 또 다른 삶의 행태가 나타날 수 있다. 이를 위해 비즈니스(사업)의 차원으로 생각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 사회는 이를 위해 행정 서비스를 준비해 놓았다. 사회적 협동조합 또는 사회적 기업이 바로 그 지원책 중 하나이다.

지역 방송과 문화향유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전용 카페가 가능할 것이고, 사회적 약자(barrier-free, 노령화 인구까지 포함하는 의미)를 위한 의상실과 재활용 목공실 또한 체인점의 가능성을 가진다. 이를 브랜드로 설정해 본다면, 세상에서 가장 돋보이는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섭 아트컨설턴트
이섭 아트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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