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전상직 한국자치학회 회장·본지 발행인

"시민 운동가들의 이슈 파이팅만 강요하는 '서울형 주민자치'는 반자치적 제도
관료ㆍ정치인ㆍ운동가들 합작… 행정ㆍ재정의 칼로 주민자치 무참하게 학살"

전상직 한국자치학회 회장·본지 발행인
전상직 한국자치학회 회장·본지 발행인

주민자치는 주민의 자치다. 관료가 위에 서는 관치(官治)도 아니고, 양반이 앞서는 교화(敎化)도 아니고, 운동가가 나서는 운동(運動)도 아니다. 주민이 생활에서 수평적으로 상부상조하고 대동을 심화시켜 가는 것이 주민자치다.

주민자치는 이웃을 사촌으로 만든다. 조선의 이웃사촌을 일제는 싫어했다. 마을에 면(面)을 설치해 사촌이 되는것을 막았다. 지금도 관료들은 이웃이 사촌이 되는것을 싫어한다. 주민자치위원들간의 단합조차도 바라지 않는 읍·면·동장이 있으며, 시·군·구 의회는 노골적으로 위원회를 무력화해 주민의 자치는 아직 개념조차도 충실하게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학생운동가 출신의 안희정 전 충청남도지사와 시민운동가 출신의 박원순 서울시장은 주민자치에 일찍이 관심을 가졌지만, 자치가 아니라 운동으로 인식해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특정한 주제로 이슈파이팅을 하던 방식대로 주민을 대상으로 파이팅하는 것을 제도화 했다. ‘충남형 동네자치’와 ‘서울형 주민자치’가 그것이다. 그러나 주민자치는 주민의 생활이다. 이슈가 아니다. 그런데도 안희정과 박원순은 이슈, 즉 의제 선정을 앞세워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파이팅을 진행하고 있다. 주민자치에서는 바로 ‘선무당짓’ 이다.

충남형 주민자치회는 주민들이 동원되고, 위원들이 들러리를 서야만 가능하다. 서울형 주민자치회는 서울시의 혈세로 서울시가 흔들고 운동가가 나서서 주민의 자치는 아예 싹조차 틔우지 못하게 하면서 주민자치위원들은 운동가들의 이슈 파이팅에 동참만 강요받는다. 반자치적인 제도다.


선무당은 귀신은 못잡고 순진한 사람을 잡는다

한때는 반독재 투쟁과 민주화에 앞섰던 이들이 왜 이럴까? 운동가 출신의 안희정 전 도지사와 박원순 서울시장은 민주주의(民主主義)자라기보다는 민본주의(民本主義)자라고 보인다. 민주주의는 민(民)이 주(主)이지만, 민본주의는 민(民)이 본(本)일 뿐이다. 맹자의 사상이면서 정도전의 조선 건국이념이었던 민본(民本)은 시민운동으로는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지만 엄격하게 민주는 아니다. 민주는 민(民)이 주(主)이지 운동가가 주(主)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가 기본이 되는 주민자치에서는, 민본은 자치에 심각하게 반역하게 된다. 양손에 행정과 재정을 쥐고 휘두르는 민본의 칼로 주민의 자치를 무참하게 학살하고 있다. 주민자치는 민주다. 그런 주민자치를 읍·면·동장에 휘하에 구겨 넣은 행안부나 운동가의 관리 하에 두는 서울시는 이제 민본의 굿판을 걷어 붙이고 민주에 충실하라.

주민자치를 잘하려고 하면 관료, 정치인, 이기적인 주민이 불편해한다. 그 정도는 순수하다. 서울시는 불편해 하지도 않는다. 이미 주민자치회를 충분히 무력화 할 수 있고, 주민들을 넉넉히 우민화할 수 있는 서울형 주민자치회라는 제도를 민주당 일색의 서울시의회 도움으로 도입하고 있어 자신이 만만하기 때문이다. 그만만한 만큼의 후유증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주민자치한다면서 주민 빼놓고 자치 없애놓고 앵벌이 들판으로

주민자치는 배타적이다. 수평적으로 배척이기도 하지만 수직적으로도 배타적이다. 다른말로하면 저항이다. 그러므로 저항이 없으면, 그것은 주민자치가 아니다. 일제의 식민지행정에 익숙한 ‘관료’와 정치적인 카르텔에 기반한 ‘정치인’, 주도권을 잡고 나가려고 파이팅하는 ‘운동가’ 등 에게는 주민자치가 매우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주민자치를 위해 한국주민자치중앙회는 관료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운동가들이 극복해야 할 불편을 넉넉하게 제공하려고 한다.

한국 주민자치중앙회를 견제하기 위해 주민을, 이미 경기도주민자치회를 농단한 전력이 있는 사람들과 관변단체로 변절한 시민운동가들이 전국주민자치 연합회라는 조직을 급조해 앞잡이로 세우고, 행정안 전부는 이를 비상식적으로 공식화해 어용화를 시도하는 것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다. 경고 드린다. 어떻게 하든 주민자치는 기어이 주민의 자치로 간다. 자치분권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풀뿌리 자치를 역설했던 문재인 정부에서 주민자치 노정에 주민과 자치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것을 정책과 사업으로 늘어놓아서 주민자치의 역사 앞에 죄인이 되지 않길 바란다. 진영의 포획을 벗어나 한국의 품에서 주민자치를 보면 된다.

자치는 본질이 배타적이다. 그런데도 자치를 협력관계로 단단히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참 어리석다. 주민자치에 충실한 한국주민자치중앙회는 첫째는관료들, 둘째는 정치인들, 셋째는 시민운동가들에게 불편하다. 그러나 불편의 크기 만큼 그들이 주민자치를 잘 못 알고 있고, 잘못하고 있다.

주민자치위원은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은 분들이다. 생업의 근거지에서 행정적으로 우월적 지위에 있으면서 노력봉사와 재정봉사를 강요하는 읍·면·동장의 권력앞에서는 현실적으로는 무력하지만, 알것은 모두 알고 있다. 지금은 누워있지만 때가 되면 바람보다 먼저 일어날 것이다. 주민자치는 바람보다 먼저 눕는풀이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지 머슴과 종으로 삼아서 일로 부리는 것이 아니다.

운동가들이 정치인과 편먹고 ‘주민을 지배·교화 하려는 조선의 양반과 같은 놀음’은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정치인이 ‘운동가를 중간지 원조직으로 유혹·착취하는 것’은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시민운동가들도 ‘중간지원조직으로 정치와 행정에 착취당하는 것’을 그만뒀으면 좋겠다. 더워져 가는 물속의 개구리처럼 진정·필요한 시민운동이 실종될까 두렵다. 하룻강아지는 범이 무섭지 않겠지만, 범은 하룻강아지가 매우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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