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보다 어려운 혁명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고 한다. 개혁은 그 대상과 주체가 혼재돼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반면, 혁명은 피아 구분이 명확하다. 비유컨대 지난 2016년 박근혜 탄핵이 혁명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물론 혁명이라 하기에는 너무 질서정연하게 진행됐다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시민의 수준 높은 참여방식이 만든 결과였다. 그럼에도 ‘대통령 탄핵’이 가진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면 혁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혁명이 폭풍처럼 지나가고 막상 제도개혁으로 들어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개혁은 주체가 곧 그 대상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결국,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면, 개혁은 성공하기 힘들다. 박근혜 탄핵 과정에서는 모두가 동의할 것 같았던 여러 개혁안도 막상 구체화에 들어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자기 스스로 개혁하기보다 저항하는 일이 일상화된다. 개혁이 정체되거나 유보되기도 한다. 검찰개혁이 바로 그랬고, 부동산정책도 마찬가지였다.

진정 모두가 개혁을 바랄까
부동산 문제는 이 같은 이중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영역이다. 부동산 소유자가 일정 부분 포기하지 않으면 부동산 가격의 안정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 가격 상승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결국 부동산의 소유자들이다. 공급이 제한된 만큼 일반적인 수요공급 법칙이 적용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부동산 소유자들이 부동산 시장에서 더 우월적 지위를 갖고 있어 추상적 수요공급만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부동산 소유자들도 부동산 가격 상승을 우려한다. 그리고 그 상승 원인을 제공한 정부를 비판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들 모두 진정으로 부동산 안정을 바라는 걸까? 그러나 세부적으로 들어야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부동산 가격 상승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닐까?

다주택 소유자들이 특히, 더욱 그렇다. 부동산 가격이 오를 경우, 자신이 거주하는 주택 외에도 처분 가능한 자산 가치가 훨씬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들은 부동산 가격 상승을 즐기면서 동시에 정부정책을 비판할 수 있다. 이들은 부동산으로 정치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이익도 얻고 정치투쟁도 하고 있다. 양수겸장兩手兼將인 셈이다.

가장 미묘한 것은 1주택자들이다. 부동산 가격 상승에 분명히 반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깔고 살아야 할 자신의 주택 외에 처분할 자산이 없는 만큼 부동산 가격 상승이 특별한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자식 세대가 짊어져야 할 주거비용을 생각하면 부동산 가격 상승이 새로운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1주택자들도 꼭 그렇기만 할까? 부동산 가격 상승을 어떤 경우에도 반대한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아마도 1주택 소유자들이야말로 가장 이중적 태도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부동산 가격 안정을 가장 바라고 있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부동산 가격이 오르기 시작하는 순간, 태도가 돌변한다. 부동산 가격을 잡지 못하는 정부를 비판하면서도, 은근히 부동산 가격 상승이 가져오는 자산 가치 증가를 즐거워한다. 비록 깔고 사는 집이지만, 그 가격이 오르는 것에 꼭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명목적으로는 분명히 부동산 가격 안정을 희망하지만,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이익동기가 작동할 경우 그것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좋은 명분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개혁주의자들은 어떤 현실적 맥락보다 명분을 앞세우기 마련이다. 개혁을 주장하는 진보주의자들도 공식적 명분과 도덕이 개혁의 주요한 동력이라 생각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현실적으로 매우 복잡다단한 상황임에도 도덕적 명분을 앞세워, 또는 도덕적 명분에 동의하는 시민의 여론을 동력으로 개혁을 밀어붙이고자 한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개혁을 추진했던 경우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역사적으로도 그와 같은 사례들이 적지 않지만, 특히 김대중 대통령 이후 민주개혁 정부가 추진했던 여러 개혁안이 대부분 그러했다. 교육, 국방, 의료, 법조, 언론 등 수많은 제도 권력들에 대한 개혁이 추진됐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도 바로 같은 이유에서였다. 도덕 명분만으로 개혁이 성공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부동산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부동산에 관한 한 시민의 이익욕망을 제어하지 않고서는 안정화시킬 수 없다. 사실 정부의 정책은 시민의 욕망과 충돌할 수밖에 없고, 또 그 욕망을 제압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그럼에도 단순히 도덕적 명분으로 부동산정책을 수립했다면, 그것은 전제 자체를 잘못 설정한 것이다.

따라서 많은 전문가는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시민의 이익동기와 욕망에 충실히 부응하는 게 정책의 기본 전제가 돼야 한다는 의미이다. 시민의 이익동기가 실현될 수 있도록, 즉 부동산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욕망이 충족될 수 있도록 충분한 공급을 하되 어설픈 도덕적 명분으로 시장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다.

진보, ‘효능감’이 없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직면할 파멸적 결과를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부동산 공급은 제한돼 있고, 소수가 과점함으로써 가격을 임의로 조정할 수 있다면 한 사회 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어렵다. 일하지 않고도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이유만으로 풍족한 삶을 살 것이고, 따라서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빈부격차가 문제인 것은, 사회적 통합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 사회적 규범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브라질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부자는 철책으로 처진 울타리 안에서 무장한 경비원이 지키는 저택에 산다. 외출할 때는 중무장한 경호 차량을 앞세워야 한다. 오히려 자유로운 것은 절대다수의 빈민이다. 철책 밖 빈민촌에는 아이들이 웃음이 넘쳐난다. 하지만 이들은 부자를 존경하지 않는다. 1개 중대 정도의 강도들이 부촌에 들이닥쳐 모든 집을 뒤져 귀중품을 유유히 들고 사라지거나 중무장한 무리가 은행을 통째로 털어버리기도 한다. 아무도 잡히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물론 부동산 문제가 모든 불평등과 사회적 범죄의 유일한 원인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시민의 이익동기와 욕망에만 영합해 개혁을 추진할 수는 없다. 그것은 곧 우리 사회의 파멸을 가져올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추상적인 도덕적 명분만을 믿고 개혁을 추진하기에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도덕적 명분만 믿을 경우, 부동산 가격 상승을 막지도 못할 뿐 아니라 결국에는 정치적 실패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개혁의 ‘효능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효능감’이 가장 예민한 부분이 1주택자들이다. 이들이야말로 부동산 시장에서 중요한 행위자들이다. 이들이 개혁의 도덕 명분을 믿고 자신들의 이익동기를 제어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집단에게 ‘효능감’을 느껴야 한다. 정부의 개혁이 효과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기대감과 함께, 결국에는 자신의 이익도 크게 침해되지 않는다는 전망을 보여줌으로써 이 집단을 개혁에 동의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도덕은 유능함을 포함한다
‘진보는 도덕’, ‘보수는 유능함’으로 대별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이제 더 이상 유의미하지 않다. ‘보수가 유능하다’라는 전제는 부정당한지 오래다. 과거 개발독재의 신화를 우려먹던 방식으로 보수는 더 이상 유능함을 보여줄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사태를 악화시켜 위기를 가중시키기도 했다.

문제는 진보이다. 우리 사회 보수가 더 이상 대안이 되기 어려운 마당에 진보가 우리 문제를 해결할 처지이다. 그럼 진보는 우리 사회 문제를 개혁할 수 있을까. 아쉽게도 긍정적으로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도덕 명분이 하나의 동기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문제해결의 완성일 수는 없다. 설령 혁명적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이후 제도 하나하나 개혁해나가는 과정에서는 더 이상 도덕 명분에만 매달릴 수가 없다.

국민은 지난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에 무려 180석이라는 압도적 승리를 안겨줬다. 물론 보수의 대안부재 탓도 있지만, 진보의 개혁에 대해 현실적 능력을 더 많이 부여해주고자 한 것이었다. 의석수가 현실적 능력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민으로서는 진보가 유능함을 갖도록 힘을 보태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능함이 제고된 것은 아니다. 검찰, 부동산 등 중요한 개혁과제가 효과적으로 처리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회피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개혁에서 ‘효능감’을 보여주지 못한 결과 민심이반 현상이 나타났지만, 이들은 ‘사회통합’ 의제로 핵심을 회피하려 했다. 물론 그 결과는 더 많은 지지율 하락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아레테(Arete)’에서 배워야 할 것들
원래 도덕은 개인의 윤리적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도덕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한 것이었다. 물론 윤리학과 사회과학, 도덕과 정치가 엄격하게 분리된 오늘날 도덕에 문제해결 능력까지 요구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같은 이분법은 자칫 우리 현실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장애를 만들 수 있다. 윤리와 도덕을 고립시키고 현실적 문제해결 능력을 무력화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의 ‘덕(Virtue)’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인식조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소크라테스에서 ‘덕’에 해당하는 것이 그리스어 아레테(Arete)이다. 아레테는 소크라테스에서 어떤 종류의 ‘탁월함’, 즉 ‘참된 목적 실현을 위한 최상의 우수성’을 의미한다. 물론 다소 목적론적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도덕은 ‘개인의 윤리적 상태’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진보를 자처하는 집권 세력에 무엇보다 도덕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이들이 공공성에 부합하는 어떤 결과를 내놓을 때만, 그리고 개혁의 효능감을 보여줄 때만 개혁은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적 문제해결과 구별된, 도덕적 명분에 집착하기도 한다. 진보가 도덕적 명분을 가장 큰 자산으로 삼고 있는 만큼, 보수 또한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것이야말로 진보에 가장 위협적인 공격 수단이 되기도 한다. 즉 진보가 가장 집착하는 ‘도덕’의 울타리에 가두고 공격하는 셈이다.

시대적으로 진보를 자칭하는 정치 세력에 문제해결이 맡겨진 것은 틀림없다. 문제는 시대적 명분과 도덕이 아니라 해결능력이다. 효능감을 갖지 못한 진보개혁은 더는 시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이를 빗겨나 ‘사회통합’을 말하는 것은 사이비 의제이다.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진보를 자처하는 정치세력 또한 시민으로부터 곧 외면받게 될 것이다.

김창호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김창호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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