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위 : 타자를 받아들이는 몸의 역량
우리는 역겨운 것을 보면 비위가 상한다고 말한다. 비위가 무엇이기에 역겨움과 관련될까? 비위란 비장(지라)과 위를 일컫는 한의학 용어에서 온 말로 일상 속에 자리 잡았다. 한의서에서 위는 음식물을 받아들여 소화를 시키는 곳이고, 비장脾胃은 위가 음식물을 받아들이도록 도와 소화를 주관하는 곳으로 설명된다─이때의 비장이 혈액에서 수명이 다한 혈구와 세균을 제거하는 순환과 면역 관련 기관인 비장(spleen)이냐, 소화 효소와 호르몬을 분비하는 췌장(pancreas)이냐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중요치 않다. 그것이 동물적 신체의 내장이며 소화를 담당하는 내장으로 여겨져 왔다는 점만이 중요하다.

비장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해도 이런 점에서 우리는 비위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비위는 외부에서 몸속으로 들어온 음식물을 받아들이는 소화기관처럼,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을 의미한다. 영어문화권에서 stomach(위) 역시 무언가를 견뎌낼 수 있는지 없는지, 무언가를 봐도 속이 뒤틀리는지 아닌지를 나타낼 때 비위와 유사하게 쓰인다.

이렇듯 우리가 외부의 무언가, 즉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몸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역겨운 것, 더럽고 비위생적인 것, 혐오스러운 것을 보면 비위가 상하고 구역질이 나며 몸이 먼저 반응한다. 그런데 혹시 상한 비위가 역겨움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비위는 병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위생과 도덕의 만남 : 혐오의 형성
비위는 나의 위생관이 허용하는 문턱, 말하자면 위생의 역치(閾値, threshold value)라고 할 수 있다. 역치란 어떤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최소한의 자극의 세기를 나타내는 수치이다. 우리는, 그리고 우리를 이루는 세포들은 역치 이하의 자극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고 역치 이상의 자극에 대해서 비로소 반응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어떤 냄새가 나는 물질의 농도가 특정 농도 이하일 경우 우리는 그 냄새를 맡지 못하는데, 이는 우리 후각의 역치 이하의 자극이라 할 수 있다. 우리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역치는 개별적인 몸마다 다르다. 강아지와 인간의 역치가 다르고, 당신과 나의 역치가 다르다. 인간이 못 맡는 냄새를 강아지는 맡으며 내가 못 맡는 냄새를 당신이 맡기도 한다.

영화 <기생충>을 들여다보자. 동익은 기택이 숨어 있는 테이블 옆 소파 위에서 “선을 넘는” 기택의 냄새를 말하고 기택은 자신의 옷을 들어 냄새를 맡아본다. 기택의 냄새는 동익의 비위의 역치를 넘는 불쾌한 냄새이다. 그러나 동익은 온 집안을 뒤덮었을 기택과 가족들의 냄새를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그 위에서 연교와 애무를 나눈다. 이는 역치를 구성하는 데 있어 심리적 조건이 매우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사는 이 깨끗하고 풍요로운 집에서는 하층 계급의 역겨운 냄새가 날 리 없다는 심리적이고 도덕적인 믿음이 냄새를 지운 것이다. 이렇듯 위생은, 권력의 문제까지도 포함한다. 기택의 위생과 동익의 위생의 차이는 권력으로부터 오고, 권력은 각자의 냄새를 풍긴다.

깨끗함과 더러움, 위생과 비위생을 가르는 데 있어 ‘몸이 먼저’ 반응한다고 할 때 이 몸이 먼저라는 말은 많은 맥락을 담고 있다. ‘역겨움’이라는 우리의 감각은 원초적이다. 원시시대부터 부패한 음식물이나 대소변 같은 오염원의 냄새에 대한 생리적 반응으로서의 역겨움과 혐오, 회피는 질병의 위험에서 몸을 보호하고 살아남기 위해 유리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똥 이야기를 가장 좋아하지 않던가? 영유아가 대변에 대해 가치판단이 없어 보이는 것은 영유아 역시 대변의 고약한 냄새에 대해 얼굴을 찡그리는 등 불쾌한 자극으로 느끼지만, 호기심이라는 다른 기제가 더 강력하기에 그 역겨움을 이기고 대변에 매력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어린아이는 대변에 대해 생리적인 쾌·불쾌 기제에 따라 역겨움을 느끼긴 하지만 어른이 대변에 대해 느끼는 그것보다 훨씬 강도가 약하다.

나이가 들수록 역겨움이 강해지는 것─그리고 호기심이 약해지는 것─은 학습의 효과이다. 학습 과정에서 대변의 불쾌한 냄새는 양육자의 찡그린 표정과 “에잇, 지지, 더러운 거야, 만지면 안 돼”라는 표현, 대소변 가리기 교육을 통해 점차 강력한 역겨움과 혐오의 감정으로 발전한다. 이처럼 역겨움은 원초적 감각일 뿐 아니라, 학습을 통해 강화되고 구성되는 사회적 감정이자 문화이다.

사회적인 도덕관념은 나의 몸의 쾌·불쾌, 즉 위생관에 영향을 미친다. 심각하게 비도덕적이고 폭력적인 사안을 마주했을 때 속이 울렁거리고 구역질이 나는 신체 반응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는 정상적인 도덕을 벗어나는 것에 역겨움을 느낀다. 이로써 우리는 법을 만들고 범죄자를 처벌해 사회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회의 도덕은 언제나 ‘정상적’인가? 도덕 관념에 의해 완전히 구성되는 상상적 역겨움이 있다. 특정 집단, 특히나 약자와 소수자들에게 덧칠되는 비위생적 이미지와 질병의 이미지가 그것에서부터 온다. 정상적인 사랑의 형태,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 정상적인 주거의 형태, 정상적인 노동의 형태, 정상적인 옷의 형태, 정상적인 몸의 형태를 학습해온 사람들은 그 규격을 벗어난 이들에게 더러움을 투사하고 역겨움을 느끼며 그 감정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는 혐오의 대상이 비위생적이고 자연적으로 역겹기 때문에 혐오하는 것이기보다, 그들이 신봉하고 있는 정상 도덕을 벗어난 대상에 대한 도덕적 적개심이 만들어낸 혐오다. 도덕에 의해 일반화되고 표준화된 위생관이 타자에 대한 혐오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타자를 배제하느냐 포함하느냐 하는 문제는 위생의 문제다.

그가 실제로 더러운지, 냄새가 나는지는 상관이 없다. 나의 위생관은 사회적으로 설계되며, 실제로 그렇게 반응하게 되고, 내 몸의 반응을 믿으며 혐오를 정당화한다. 몸에서 그렇게 알레르기 반응이 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역겨운 건 어쩔 수 없다고. 그러나 나의 혐오는 정말 나의 것인가? 나의 역겨움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타자의 존재는 자연을 거스르는 것인가?

우리의 질병 : 타자에 대한 소화불량
코로나보다 무서운 질병은 혐오일 수 있다. 앞서 비위는 타자를 받아들이는 몸의 역량, 즉 타자에 대한 소화 능력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혐오는 타자에 대한 소화불량이라는 질병이다. 혐오의 역치는 공감의 역치, 소화의 역치와 반비례한다. 혐오하는 자는 혐오의 대상을 꼭꼭 씹어 소화하고 해석할 수 없기에 혐오한다.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것을 이해하고 해석하려 하지 않고, 역겨움을 근거 삼아 경계선 밖으로 내팽개쳐버리는 것이다.

영화 <방랑자>는 논두렁에서 신분증도 없이 발견돼 목격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경찰에 의해 자연사로 결론지어지는 모나의 시체를 보여주면서 시작되고 그가 죽기 직전 몇 주의 삶을 보여준다. 모나는 비서 일이 싫고 모여 사는 게 싫으며 길에서 마시는 와인이 좋아서 ‘지붕도 법도 없이(sans toit ni loi)’ 떠돌아다니는, 길에서 사는 자이다.

모나를 만났던 이들은 자기 나름의 소화 능력대로 모나를 해석한다. 눈빛이 공허한 방랑자, 예쁘긴 했던 히치하이커 아가씨, 방갈로가 철거되는 줄도 모르고 천사처럼 자던 사람, 냄새나고 꾀죄죄한 더러운 여자, 자기가 가고 싶은 곳에 가는 자유로운 사람, 약쟁이, 캠핑객, 노숙자, 일하기 싫은 게으름뱅이, 도둑, 보기와 다르게 고등 교육을 받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아이, 완전한 자유를 택했지만 완벽하게 외로운 사람, 남자에게 진정한 사랑을 받는 부러운 여자, 헤픈 여자,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 모나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자연사한 것으로 공식 처리됐다. 멋대로 떠돌아다니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그대로 얼어 죽은 모나의 죽음은 자연사, 자연스러운 죽음일까?

그는 그를 만난 사람들에게 흔적을 남겼다. 사람들은 자신의 역치를 벗어난 모나에 대해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무언가로, 인간의 외부로 차치한다. 공동체의 범주에 정착할 수 없는, 우리의 건강한 경계를 침입해서는 안 되는, 그저 외부자이자 방랑자로. 그러나 그 존재를 알아 버린 이상 삶은 불편해진다.

계속해서 그의 더럽고 환한 얼굴이 떠오른다. 아무리 바깥으로 밀쳐내려 해도, 그 존재를 알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는 끊임없이 내 머릿속과 마음속을 침범하며 휘젓고 돌아다닌다. 방랑자로서 삶의 방식 그대로. 우리는 스스로 소화할 수 없는 음식물을 그저 뱉어버린다. 그리고 더러움을 없애려, 역겨움의 흔적을 지우려 입을 헹군다. 그러나 입속과 혀에 닿았던 그 맛과 냄새는 절대로 잊히지 않는다.

"우리가 규정한 정상적인 것을 벗어났다고 적개심과 혐오의 대상으로 판단하는 것이 언제나 정당성이 있고 올바른 것인가"

코로나 확진자들을 방랑자라고 할 수 있을까? 각자의 사정으로 돌아다니다 병에 걸리고 사회에 병을 전파한 확진자들에 대한 ‘정당한’ 비판으로 포장되는 혐오는 공동체의 소화 능력 바깥으로 내던져진 사람들을 숨게 만들었다. 혐오는 혐오를 당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혐오하는 자들에게도 피해를 주는 것이다.

혐오의 유일한 긍정성은 그것의 배설이 주는 비이성적 쾌락뿐이다. 뇌과학에서의 한 연구에 따르면 혐오를 느끼는 뇌의 부분이 강해지면 이성적 판단을 하는 부분인 전두엽은 활동성이 떨어진다고 한다. 혐오가 강해질수록, 우리의 합리성은 마비되는 것이다. 확진자의 직업, 거주지, 나이, 성별, 인종, 국적, 성적 지향, 종교 등의 정보에 대한 집착과 비난은 공개처형에 대한 두려움을 더욱 강하게 하고 방역 공동체 안으로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떳떳하면 뭐가 무섭냐’, ‘그러게 떳떳하게 살아라’라는 식의 반응이 왜 우리 공동체를 코로나의 위험에 더 취약하게 만드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는 본래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이다. 그는 나의 어찌할 수 없는 무능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에 불편하다. 그러나 내 무능력을 투사한 혐오는 내 안을 맴도는 타자의 냄새가 진해질수록 나의 지성을 무력하게 하고, 견고한 듯 보이는 사회의 안전벽은 정상성의 경계 안팎을 방랑하는 유령들과 그 유령을 쫓는 비이성적 몸뚱이들로 인해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 균열의 틈바구니로 온갖 바이러스들이 들락거린다.

생태적 위생 : 우리의 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따라서 위생은 내 몸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나의 몸과 타자의 몸 사이, 나의 도덕과 타자의 도덕 사이, 나의 생명과 타자의 생명 사이의 관계와 해석의 역량 문제다. 전염병은 우리의 취약한 이 관계와 해석력을 공격한다. 인간이 관계 맺기 없이 살 수 있는 동물이었다면 전염병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맺고 있던 관계들을 다시 생각해야 하고 새로운 관계 맺음을 통해 코로나라는 암호를 해독해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내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타자의 몸을 더럽히는 삶을 살아왔다. 야생에 대한 인간의 침입, 공장식으로 사육되고 도축돼 문 앞까지 배송되는 고기들, 탄소와 폐기물을 내뿜는 각종 기계, 썩지 않고 타지도 않는 일회용품과 쓰레기, 머리카락부터 발톱까지 씻는 온갖 세제, 땀에 젖은 배송 기사들과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콜센터 직원들.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코로나라는 질병은 우리가 품거나 배제하고 있던 가치들의 비자연성과 비위생성을 낱낱이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전염병이 유행하는 주기가 점차 짧아지고, 피해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우리가 편리하게 누려왔던 삶의 꼴[生態] 덕분이다. 바이러스의 전염 속도와 범위는 인간과 상품의 이동 속도와 범위에 비례한다. 서식지를 빼앗긴 야생동물로부터 왔을 코로나는 우리가 간편하고 빠르고 이기적으로 맺었던 값싼 관계를 타고 퍼져나갔다.

임시 휴업을 하게 된 인류로 인해 자연이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다들 기억할 것이다. 대기 오염이 가장 심각한 인도에서 30년 만에 히말라야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됐고 베네치아 운하가 맑아져 바닥에 붙어 있는 물고기가 보였다.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미국 해양대기청은 대기 중 이산화탄소 평균 농도 관측 결과, 이동 제한이 한창이었던 2020년 5월이 인류 역사상 가장 높았다고 발표했다. 중국 북부의 이산화질소 배출량이 유례없이 줄었음에도 초미세먼지 농도는 오히려 높아졌다는 연구도 있다.

"획일화된 혐오의 위생에서 생태적 위생으로 전환할 때"

우리가 지금껏 더럽혀온 것들이 고작 몇 달 만에 깨끗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삶의 꼴[生態] 자체를 바꿔야 할 때다. 타자에 대한 착취 없는 생산과 소비, 생명 간의 공존을 위해 진화하는 기술, 공동체의 소화 능력을 높이기 위해 대화하는 정치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혐오의 위생에서 생태적 위생으로의 전환이다.

우리의 비위를 건강하게 하고 해석의 역량을 높이는 생명력 강화로서의 위생. 이는 결국 인간의 자기인식과 연결돼 있다. 인도의 물리학자이자 생태주의자인 반다나 시바는 소비자가 됨으로써 우리의 몸이 작아졌다고 말한다. 텃밭을 일굴 수 있고, 바느질을 할 수 있고, 집을 지을 수 있는 우리의 손은 상품을 주문하는 용도로만 사용된다. 몸의 역량이 축소될수록 세계를 소화하고 해석하는 우리의 비위 역시 왜소화된다.

몸은 정직하다고들 하지만 사실 몸은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다. 우리는 늘 맡는 냄새와 늘 먹는 맛, 늘 보는 몸을 느끼며 살아가고 그것을 벗어난 대상에 대해 혐오를 느낀다. 사회적 도덕관념에 따라 개인의 위생관은 일반화되고 감각은 획일화된다. 내 몸이 온전히 나만의 것인 것 같고 가장 사적인 것 같지만, 나의 몸은 사회 안에서 구성되는 구조물이다. 내 몸의 반응이 과학적으로 관측될 수 있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실재 같지만, 그 관측된 반응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주관적이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수많은 요소가 개입한다.

몸은 이처럼 모든 구성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모든 생성의 원천이기도 하다. 내 몸을 구조가 생산하는 온갖 찌꺼기들을 저장하는 처리장으로 만들 것인가? 혹은 계속해서 시작되고 새로워지는 창조와 살림의 장으로 만들 것인가? 모든 전환은 이 물음에서 시작돼야 한다.

성민교 서강대학교 철학과 석사
성민교 서강대학교 철학과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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