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길을 걸은 라이벌
요즘 4월 보궐 선거를 위한 정치인들의 뉴스가 장안의 화제이다. 그들이 내 거는 공약을 보면 마치 새로운 세상이 열리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공약公約이 반드시 지켜지지는 않았고, 공약空約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세상만사 인간의 일이란 누가 적임자냐에 따라 일의 질과 양에 차이가 나는 것을 자주 봐 왔지만,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잘 아는 역사의 라이벌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포은 정몽주(1337~1392, 충숙왕 복위 5~공양왕 4)와 삼봉 정도전(1342~1398, 충혜왕 복위 3~태조 7)이다. 이들은 같은 스승 밑에서 같은 이념을 지향했지만, 종국에는 죽음과 새로운 왕조의 창출이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두 사람이 지향했던 이상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살펴보자.

청년 정몽주
정몽주의 자는 달가, 호는 포은이다. 본관이 영일迎日이고, 영천 출신이다. 어머니가 영천 이씨로 외가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정운관은 성균관 복응재생服膺齋生이었고, 할아버지 정유는 직장동정直長同正이었다. 공민왕 6년(1357) 신군평申君平이 주관한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했고, 24세인 공민왕 9년에 김득배와 한방신이 주관한 과거에서 1등으로 합격했다. 과거에 합격할 무렵인 20대 전후에 사서오경 이외에도 병서를 비롯한 제자백가서를 익혔다.

정몽주가 과거에 합격한 공민왕 9년 무렵은 고려왕조의 대내외적인 변화와 변동이 심한 시기였다. 무신집권기와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토지 분급제, 토지 소유 관계의 변화를 비롯한 경제상의 변동, 사회신분제의 동요,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으로 인한 국토의 황폐화, 원의 간섭에 따른 사회모순의 심화, 원-명 교체로 인한 동아시아 지역의 불안정, 왕실의 권위 실추, 지배층의 무기력과 분열, 정치 기강의 이완 등이 나타났다.

공민왕은 반원 개혁을 추구해 원의 부당한 간섭을 배제하고 고려와 중국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고자 했다. 몽골식 변발과 호복 착용 금지, 정방 혁파, 정동행성이문소 혁파, 쌍성총관부 회복, 전민변정도감 설치 등을 통해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며, 정치·사회·경제의 여러 부문에서 그동안 왜곡되고 변질된 제도를 시정하고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며 민생을 안정시키려는 것이다. 공민왕의 정책은 원의 절대적 간섭과 영향력을 갖는 시점에서 고려의 중흥을 기약하는 적극적이고 개혁적이었다.

이런 시기의 정몽주는 공민왕 11년(1362) 3월 예문검열이 되고, 동 12년 8월 한방신이 동북면지휘도사가 돼 여진을 정벌할 때 종사관으로 참여하게 됐다. 13년 2월에는 이성계와 함께 삼선·삼개를 무찔렀다. 당시에 상제喪制가 문란하고 해이해 사대부가 모두 100일이면 길복吉服을 입었으나, 정몽주는 부모상에 여막廬幕을 짓고 유학의 예에 충실했다. 공민왕 16년 성균관이 다시 세워져 이색·김구용·박상충·박의중·이숭인 등이 성리학을 연구하고 학생을 교육했는데, 정몽주는 성균박사·성균사예·성균사성을 역임하면서 이에 동참했다. 이색은 정몽주의 말이 횡설수설하는 것 같지만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다. 공민왕 21년(1370) 3월부터 22년 7월까지 홍사범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 왔다.

정몽주는 유학자로서 유학적 세계관과 성패론을 견지했고, 유학의 교화론과 이민족 대책을 생각했다. 유학에서는 ‘일치일란一治一亂’ 곧 다스려진다는 의미의 치治와 혼란한 시대인 난亂의 문제가 중요하고, 다스려지지 않은 혼란한 시대를 안정시킬 수 있는 대책이 항상 요구된다고 했다. 그는 유학의 성쇠론, 일치일란을 전제하면서 인심에 순응하는 유교정치를 지향했다.

정몽주의 나이 24세 때 과거시험에서 보여 준 그의 답안에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문文과 형정공수刑政攻守의 무武를 함께 써야 한다는 생각은 정몽주가 40세경인 우왕 3년(1377)에 쓴 「김해산성기金海山城記」에 보다 진전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 글은 우왕 원년 김해가 왜적에 의해 함락되고, 그 후 김해부사에 임명된 박위가 김해를 되찾고 습성을 쌓고 왜구 방비에 주력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서 정몽주는 성을 쌓고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옛날부터 제왕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고, 『맹자』가 ‘하늘의 때는 땅의 이로움만 못하고, 땅의 이로움이 백성의 화합만 못 하다’라고 한 것은 경중과 대소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어느 하나만 택하고 나머지는 버리라는 뜻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인화人和와 지리地理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고 보았다.

정몽주는 유학에 몰두해 인의예지, 『맹자』의 인화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공민왕 12년에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13년에는 이성계 군대의 막료로 여진 정벌에 참여하면서 지리의 중요성을 터득했다. 『맹자』를 통해서 제시된 유학의 교화론 곧 인화를 중시하면서도 성을 쌓고 방비하는 대책인 지리도 등한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다스림에서 인의예지의 문과 형정공수의 무를 함께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확대된 형태로 이해했다. 20대 전후에 유학 경전을 익힌 정몽주는 30대 여진 정벌의 막료로 참여하면서 치도治道와 국방의 문제를 아울러 생각할 수 있게 되는 사상의 성장을 보게 됐던 것이다.

혁명가 정도전
정도전의 자는 종지, 호는 삼봉,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조선 건국의 혁명 주동자는 이성계였지만 한낱 무신에 불과한 그를 움직여 조선을 건국하고 조선을 새로운 왕조답게 만든 인물은 바로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술에 취하면, “한고조[漢高祖, 유방]가 자방[子房,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자방이 한고조를 이용했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했다는 것을 유방과 장량의 관계에 빗대어 말하곤 했다.

『태조실록』에 실려 있는 정도전의 졸기卒記에 의하면 정도전의 외조모는 승려와 여종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 외조모는 우씨의 첩이 됐고, 그 딸이 정도전의 어머니였다. 정도전의 처 역시 첩의 소생이었다. 그래서 정치적인 갈등이 있을 때마다 정도전은 반대 세력에게서 출생의 비밀이 끊임없이 소환되곤 했다.

정도전의 부계도 원래 한미한 향리 집안이었지만, 그의 아버지 정운경은 형부상서의 벼슬까지 지냈고 『고려사』 열전 양리전良吏傳에도 실려 있다. 지방 토호의 향리가 이 정도의 벼슬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시대였고, 정도전 또한 출생성분으로 봐서 벼슬길에 오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에는 상대적으로 신분의 유동성이 많아 정도전이나 그의 아버지도 사회적 진출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정도전은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등과 함께 유학을 배웠다. 스승인 이색이 대사성이 되는 바람에 순탄하게 벼슬길에 올랐으나, 우왕 즉위 이후 권신이었던 이인임의 미움을 받아 전라도 나주군의 거평부곡으로 유배됐다. 여기서 그는 일상적으로 농부·승려·은거 인사 등을 만나면서 민심의 동향을 접할 수 있었다. 그가 조준과 함께 권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토지개혁을 단행하게 되는 배경에는 당시 농민의 고충을 알고 있었던 탓도 있었다.

그 뒤 유배가 완화되면서 삼각산 아래, 부평, 김포에서 서재書齋를 열고 제자를 키웠지만, 권세가들의 방해로 집이 뜯기는 수모를 당하다가 유배 생활 9년 만에 당시 함경도에 있던 이성계를 찾아갔다. 이때 이성계는 동북면도지휘사로 있었다. 이성계의 호령이 엄숙하고 군의 대오가 질서 정연한 것을 보고 정도전이 은근히 말했다. “참 훌륭합니다. 이런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못 하겠습니까?” 이때 이미 정도전은 이성계의 군대로 쿠데타를 꿈꾸고 있었다고 보인다.

위화도 회군 이후 정도전은 이성계의 최측근으로써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최고의 권력자가 됐다. 고려의 유신들을 모두 처단한 정도전에게 정치적 시련이 닥친 것은 국내가 아니라 국외에서였다. 정도전은 위화도 회군 이후부터 요동遼東 정벌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에 위기를 느낀 명나라는 정도전을 제거하려 했다. 핑계는 당시 명나라에 보낸 표전문表箋文이 경박하다는 것이었고 표문의 작자로 정도전을 지목해 명나라에 들여보내라고 했지만, 정도전은 이 표문의 작성에 개입한 적이 없었다. 명나라의 황제까지 정도전을 ‘화의 근원’이라고 극언하게 된 데는 정도전의 요동정벌론이 그 배경에 있었다.

정도전은 병을 핑계로 명나라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지만, 요동정벌 계획은 더욱 적극적으로 행하게 됐다. 정도전은 강비의 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내세워 이방원 등과는 대립했는데, 요동 정벌을 위한 군사력 강화를 빌미로 왕자와 공신들이 장악하고 있던 군사 지휘권을 박탈하는 사병 혁파를 단행했다. 이에 반발한 이방원 일파의 역습으로 살해당하고 말았다.

국내의 정치적 대립이 정도전을 죽음으로 몰았지만, 그의 꿈이나 정치적인 소신은 다른 정적들과는 달랐다. 그는 좁은 국내를 벗어나 요동 땅을 경략經略하려는 큰 꿈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복종해야 할 왕권을 오히려 견제하는 재상宰相 중심의 정치체제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의 정치·경제·종교·문화·군사 등 여러 방면에 걸친 관심을 보여 주는 문집 『삼봉집』은 그가 결코 권력에만 눈이 먼 정치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상과 현실
젊은 정몽주는 고려사회가 당면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이후 그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던 고려 말의 사회는 정상적인 왕조 체제로 되돌리기에는 어려운 현실이었다. 반면 정도전은 젊은 시절에는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났지만, 무장 이성계를 만나면서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이들이 같은 이념을 지향했지만, 종국에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고려 후기 성리학을 이상으로 한 사대부는 이색·정몽주·이숭인 등과 조준·정도전·윤소종 등을 주축으로 하는 세력으로 갈렸다. 전자는 무너져가는 고려를 지키려고 했고, 후자는 무너져가는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 왕조를 세우려고 했다. 즉 한쪽은 고려왕조를 지키려는 ‘수성파 사대부’로, 다른 한쪽은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창업파 사대부’로 나누어졌다.

우선 이들에게는 정치·경제 운영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 수성파 사대부는 기존의 인재 등용법인 음서제蔭敍制와 좌주문생제座主門生制에 찬성했다. 이들은 좌주를 중심으로 문생을 세력화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확대하는 데 이용했다. 반면 창업파 사대부는 음서제와 좌주문생제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정도전은 좌주문생 관계를 “공적인 선발로서 사사로운 은혜로 삼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또한 경제제도 특히 토지제도를 어떻게 다룰까 하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이는 이들의 경제적 기반과 무관하지 않았다. 수성파 사대부는 상대적으로 경제생활이 윤택했던 반면, 창업파 사대부는 같은 지배층으로서 그에 상응하는 경제적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다.

"개혁을 위해 각자 대의를 내세우고 수성과 창업으로 대립했던 역사적 사례 선거에 앞서 되짚어보고 교훈 얻어야"

이 시기 사대부가 정치 현장에서 두 파로 나뉘게 된 것은 사상적 차이도 있었다. 이들은 유학자로서 성리학을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성리학에서 제시하는 질서를 지향했다. 원래 유교의 예禮를 구성하는 원리는 혈연관계를 중시하는 친친親親과 인위적인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존존尊尊이라는 두 측면이 있다. 친친은 혈연을 매개로 한 가족관계 중심으로 사회관계를 설명하고 혈연에 의한 인정이나 사사로운 정감을 중시한다. 존존은 혈연보다는 인위적이고 이차적인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사회관계를 설명하고 공공성을 강조한다.

수성파 사대부는 혈연을 매개로 하는 가족 중심의 인간관계를 중시했다. 즉 국가의 공적인 관계 혹은 군신 관계보다는 혈연을 매개로 한 부모와 가족관계가 우선이었다. 이는 대의大儀보다 사적인 인정을 강조한다. 이에 비해 창업파 사대부는 성리학을 통해 국가의 공적 관계와 사회적 명분을 중시했다. 이들은 『춘추春秋』의 ‘대의는 부모와 자식 관계에 앞선다’라는 명분을 ‘선’으로 내세우면서, 사적인 인정에 치우치는 것을 ‘악’이라 해 공적 의리를 중시했다.

이러한 사상적 차이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군신관君臣觀과 현실 정치의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수성파 사대부는 절대적인 군주관을 견지했다. 사회적 관계는 의리로 맺어졌기 때문에 의리가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그러나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이다. 따라서 혈연관계로 대비된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절대 불변의 인간관계가 되므로 영원하고 변경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이들이 많은 문제점을 보면서도 결국 고려왕조를 부인하지 못하고 충신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창업파 사대부는 성리학의 대의명분에 충실했다. 이들은 ‘대의’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혈연적이고 사적인 가치관을 비판했다. 과거 춘추시대의 역사적 사례를 통해 신하의 왕위 찬탈에 관한 시시비비를 가리고 엄정하게 평가했다. 군주는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대의명분에 합치될 때만 정통이며 충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교 경전에 나오는 천명사상이나 맹자의 역성혁명론을 역설하고, 왕이 존립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를 논의의 초점으로 삼았다. 결국, 고려왕조를 부정하는 논리가 여기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역사의 결과론적으로 보면 창업파 사대부의 선택이 옳았다고 할 수 있지만, 죽음으로 간 이들이 선택한 길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앞서 청년 정몽주의 정치에서 추구했던 개혁적 성향이 고려 말의 현실에서 왜 왕조의 수호자로 탈바꿈했는지,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끝내 새로운 세계를 열었던 정도전의 선택에서는 과연 어떤 고민이 있었을까?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초지일관初志一貫’ 즉 초심을 잃지 말라는 교훈을 많이 듣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정치가들에서 초심을 잃지 않은 자가 과연 누구일까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한다.

신안식 가톨릭대학교 인문사회연구소 연구교수
신안식 가톨릭대학교 인문사회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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