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체류자와 영화
불법체류는 적법성의 기준이 명확한 법리적 문제이지만, 거시적으로 보자면 다분히 자의적이어서 덮어놓고 ‘나쁜 것’,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땅에다가 선을 그어놓고 ‘국경’이라고 칭한 다음, 넘어오면 ‘불법’이고 머물기라도 하면 ‘불법체류’ 딱지가 붙기 때문이다. 먼 옛날 유대인을 비롯해 정치경제적 사건에 의한 디아스포라(diaspora)로 떠돌던 수많은 이가 모두 ‘굳이 말하자면’ 불법체류자다. 유목민이나 집시 얘기를 하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든 사람 사는 세상에 떠도는 이들도 있게 마련인데, 법의 돋보기를 들이대고 적법성을 정교하게 따져서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을 논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 따져봐야 할 시기와 대상도 있다.

어떤 경우에도 불법체류자는 ‘국가’와 ‘국민’을 정의하는 데 걸림돌이기에 어느 나라에서나 엄정하게 다룬다. 이들에 대한 시선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아서 혹독한 일을 당하는 경우도 많다. ‘불법체류자’는 그 사람의 신분이 되고 정체가 되며, 그 규정의 뉘앙스는 다분히 부정적이다. 이러다 보니 불법체류자들이 ‘인간’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자주 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인간이므로, 이들의 인권과 인격은 존중돼야 마땅하다. 그러나 불법체류자는 ‘불법’이어서 이들을 옹호하는 접근이 매우 조심스럽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면 다 해결되지 않느냐’는 말은 많은 경우 밑도 끝도 없는 가혹한 언사이지만, 부정하기도 힘든 논리다.

불법체류는 흔한 현상이므로, 이를 소재로 한 영화도 많다. 배달로 연명하는 중국 출신 불법체류자가 겪는 브로커들의 폭력과 삶의 고단함을 그린 베이커(Sean Baker)와 쵸(Shih-Ching Tsou) 감독의 <테이크아웃>(Take Out)이나, 미국에서 아마추어 축구팀을 꾸려 대회에 출전한 남미 출신 불법체류자의 애환을 그린 <일곱 번째 날>(En el Séptimo Día)과 같은 고발성 영화도 있다.

합법적으로 입국해, 비자에 정한 기일이 지나도 출국하지 않아 ‘기술적 불법체류 상태’가 되기도 하지만, 불법체류 자체를 목적으로 국경을 넘는 사람도 많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에서 흔한 현상이다. 대게 할리우드 액션 영화는 불법체류의 브로커들인 폭력조직을 절대악으로 삼아 맞서 싸운다. <시카리오>(Sicario)와 같은 영화들이 대표적이다. 이주자들이 피해자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이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자들의 악행이 너무 끔찍해서, 불법으로 국경을 넘는 행위에 대한 이미지는 폭력이나 형사 범죄와 동일시된다. 이 경우, 불법체류자는 우리와 같이 개체성을 가진 한 인간이 아니라,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다른 특수한 일군의 종족처럼 다뤄진다.

사뭇 다른 분위기의 영화들도 있다. 다문화가정과 불법체류자 2세 소녀들의 우정과 아픔을 그린 독립영화 <세리와 하르>, 군부의 탄압을 피해 아버지와 함께 불법체류자가 된 체스 신동 소년을 그린 프랑스 영화 <파힘>(Fahim)과 같이 불법체류자의 한 인간으로서 개체성을 탐구한 영화도 있다.

주류 백인들의 온정주의라고 비난받을 여지도 있지만, 할리우드에서도 불법체류자를 휴머니즘으로 감싸는 영화를 찾아볼 수 있다. 가령 <비지터>(Visitor)와 같은 영화다. 주연 배우 리차드 젠킨스(Richard Jenkins)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작품이다.

주인공은 사별한 아내와의 추억을 벗 삼아 외롭게 살아가는 중년의 경제학과 교수다. 삶의 의욕이나 새로운 일을 하고자 하는 에너지도 바닥났다. 가기 싫은 뉴욕의 학술행사에 마지못해 참석하게 된 교수는 자신 소유의 아파트에 들어갔다가 화들짝 놀라게 된다. 거기 웬 젊은 중동계 남성과 아프리카계 여성 커플이 살고 있지 않나. 도대체 무슨 일인가 알아보니, 이들은 부동산 중개인에게 돈을 주고 아파트를 빌렸다고 한다. 그 중개인이 사기꾼이었던 거다.

커플은 짐을 싸 나가게 됐으나, 갈 곳이 없다. 외롭기도 하고 딱한 사정을 뻔히 알면서 가난한 커플을 쫓아낼 수 없는 교수는 한동안 그냥 같이 살자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리아계인 남성과 세네갈 출신인 여성은 둘 다 불법체류자다. 그래서 사기 사건에 대해 경찰의 도움도 청할 수 없다.

남성은 젬베(Djembe) 드럼 연주자이고 여성은 보석 디자이너다. 교수는 악기도 배우고 함께 길거리 연주도 하며 시리아 남성과 우정을 쌓아간다. ‘불법체류자’라는 딱지를 떼어놓고 한 인간으로서 남성을 겪어보니, 무엇보다 착하고 좋은 사람이고, 너무나 매력적인 하나의 우주다. 둘은 가족이자 절친이 되고, 교수는 아들 같은 시리아인 덕분에 점점 삶의 활력을 되찾게 된다.

어느 날 남성에게 큰일이 벌어진다. 지하철에서 회전문을 뛰어넘다가 잡힌 것이다. 티켓을 샀음에도 불운이 따랐다. 사소한 일이지만, 불법체류자임이 밝혀져 구금된다. 여성은 피신하듯 친척 집으로 가버린다. 교수는 자신의 인생에 큰 의미가 된 절친의 추방을 막기 위해 전문 변호사를 고용한다. 그러나 일이 녹록지 않다. 불법체류에다가 무임승차로 법규위반까지 덧붙여졌다. 교수는 남성의 어머니가 미시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뉴욕으로 와서 함께 대응하고자 하지만, 그 어머니 역시 불법체류자다. 위험을 무릅쓰고 아들을 위해 뉴욕에 온 어머니는 교수의 아파트에 머물게 된다.

어머니의 남편은 시리아에서 반정부 저널리스트로 활동을 했고, 죽임을 당했다. 아들이 시리아로 추방당하면 연좌제로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아들을 석방하기 위해 분투하며, 둘 사이에도 사랑이 싹튼다. 서로의 아픔을 보듬으며, 인간적인 외로움과 슬픔,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많은 과오와 어리석음, 부족함과 회한, 후회를 함께 나눈다.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부족한 자신이 완성돼가는 느낌을 공유한다.

그런데 불현듯 아들이 시리아로 추방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운명의 못된 장난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찾아 시리아로 가겠다고 한다. 모자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어머니는 떠나야만 한다. 만감의 교차 속에서 그녀를 떠나보낸 후, 교수는 지하철 플랫폼에 홀로 앉아 젬베 드럼을 두드린다. 한때 ‘불법체류자’였다가, ‘인간’, ‘착한 사람’, ‘가족’, ‘친구’, ‘연인’이 된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쓸쓸한 리듬에 담겨 지하철의 괴성을 뚫고 울려 퍼진다.

<나이브스 아웃>과 탐정 이야기
또 한편 소개할 영화는 제임스 본드 역으로 유명한 대니얼 크레이그(Daniel Craig) 주연의 <나이브스 아웃>(Knives Out)이다. 탐정영화다. 기본적으로 오락물이지만, 미국에서의 불법체류가 가진 사회정치적 함의를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미스터리 장르 소설가로 성공해 큰돈을 번 영감이 있다. 으리으리한 저택에 살고 있는데, 여든다섯 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백 살도 훌쩍 넘은 노모가 늘 의자에 조용히 앉아 계시고, 자녀들은 모두 중년에 접어들었다. 딸 하나에 아들 둘이다. 맏딸은 여장부 스타일의 사업가이고, 첫째 아들은 딸 하나를 남기고 젊어서 죽었다. 둘째 아들은 출판사 사장을 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번듯한 백인 중상류층 집안이다.

생일 다음 날 아침, 가정부가 모닝커피를 준비해 작가 영감 작업실에 들어가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영감이 목을 칼에 베인 채 피를 흘리며 소파에 널브러져 죽어있는 것이다. 추리 장르 영화에서 시체를 발견하며 시작하는 것은 흔한 일인데, 대게의 경우 발견한 여자가 온몸의 힘을 목청에 모아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면서 관객의 주의를 끈다.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려 와장창 깨지게 만들어 긴장을 증폭하는 수법도 관습이다. 이 영화는 다르다. 가정부는 놀란 나머지 아슬아슬하게 떨어뜨릴 뻔한 커피잔에 더 신경을 쓰며 “이런 젠장!”이라고 조용히 신음을 지른다. 살인 추리극에 코미디가 가미됐다.

셜록 홈스나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 혹은 영화는 워낙 유명해서 누구나 한편쯤은 접했을 법하다. 이들 이야기의 상당수가 먼저 범죄 현장을 보여주고, 추리를 통해 범죄 수법과 범인을 밝혀내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런 스타일을 후더닛(whodunit) 스토리라고 한다. ‘누가 저질렀나’(who has done it?), ‘누가 범인인가?’라는 뜻으로, 내용의 전개 방식도 용어 그대로다.

사람이 피를 흘리며 죽었으니 경찰이 나타날 때다. 고인이 유명인이어서 경위 직급 형사와 직원이 배치됐다. 우선 스스로 목을 그은 자살 사건임을 전제하고, 가족을 하나씩 불러 조사를 한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사망 사건 전후를 재구성한다. 경찰 수사에 발끈하는 가족 구성원이 등장하면서 긴장을 슬슬 고조시킨다.

무능한 경찰 대신 천재적 탐정 주인공이 나타날 시점이 바로 여기다. 후더닛의 전형이다. 셜록 홈스도 레스트레이드 경감의 무능 덕분에 빛을 발한다. 응접실에서 가족을 하나씩 불러 앉혀 면담 조사를 하고 있는데, 경찰 뒤쪽 창가에 누군가 햇볕을 등지고 무게를 잡고 앉아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슬퍼서 이런저런 아버지 이야기를 두런두런하게 되는데, 사건과 관련 없는 이야기가 나오면 여지없이 그 사내가 차임벨을 ‘따릉!’ 울려서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다. 조사받는 가족들이 차례로 인상을 쓰게 된다.

“저건 또 뭐야? 당신 누구요?”
“진실의 관찰자입니다”

탐정은 등장하자마자 가족들의 진술에 숨겨진 거짓을 알아채고, 그들의 면면을 파악한다. 영화는 사건 당일의 일에 대한 진실과 가족들의 거짓 진술을 교차로 보여주며,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관객에게 암시한다.

사랑하는 맏딸의 남편인 사위는 아내 몰래 외도를 일삼고 있다. 출판사 사장인 아들은 베스트셀러인 아버지의 원고를 받아 편하게 책을 판매하는 것 외에 하는 일이 없고, 무위도식에 대해 온 가족의 시기와 비웃음을 사고 있다. 죽은 첫째 아들네 며느리는 남편에 대한 사랑 때문인지 시아버지의 재산 때문인지 재가하지 않고 가족 모임을 악착같이 챙기며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가는데, 손녀 학비 좀 보태 달라고 시아버지를 속여 5, 6억 원을 받아 자기 주머니에 챙겼다.

멀쩡해 보이던 집안의 식구들은 아버지 재산에 빌붙어 살아가는 그저 그런 인간군상들이었다. 편하게 살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거행될 수백억 원대 상속유산 배분을 인생 재도약의 계기로 삼고자 하는 금수저 2세, 3세들이다.

불법 이민자와 미국 중상류 백인의 정치의식
이제 사건의 숨겨진 실마리를 풀 결정적인 열쇠 캐릭터가 등장할 차례다. 대게, 범인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는 못했으나 살인 사건 현장을 숨어서 지켜본 목격자라던가, 고인이 과거에 원한을 산 일을 알고 있는 동업자 같은 이들이 배치된다. 숨겨둔 아들이나 옛 애인일 수도 있는데, 이들이 범인인 경우도 왕왕 있다. 이 영화에서는 소설가 영감의 건강과 일상을 돌봐주는 개인 간호사 마르타다. 경찰 조사에 응하라는 전화를 받고서 마르타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는데, 순진하게 생긴 젊디젊은 여자의 표정에 화면이 클로즈업을 통해 각별하게 신경을 쓰는 것을 보니, 이 사람이 범인인가 싶기도 하다.

여기서 정치 이야기가 나온다. 정확하게는 백인 중상류층 가족들의 정치에 대한 인식과 위선이다. 사망 사건 전 회상 장면에서, 아버지의 재산 덕분에 호의호식하는 주제에, 가족들은 비싼 위스키를 들이켜며 고급 저택의 아늑한 거실에 앉아 보수와 진보로 나눠 정치 논쟁을 일삼으면서 입으로 세상의 옳고 그름을 모두 재단한다. 당시 대통령은 트럼프여서 자연스럽게 그 얘기가 나온다.

“나도 트럼프가 싫어요. 완전 또라이(asshole)잖아. 그래도 우리나라에 필요한 또라이라구.”
“세상에나! 그렇겠죠! 독일에도 1930년대에 그런 또라이가 있었죠.”
“같지 않다니까, 또 시작이네!”

불륜남 사위와 시아버지 책 팔아 잘 먹고 잘사는 둘째 며느리는 보수다. 뷰티 사업가 행세를 하면서 시아버지에게 생활비 꼬박꼬박 받아먹고, 그것도 모자라 학비 명목으로 사기를 쳐 뒷돈까지 챙긴 첫째 며느리는 진보이다.

“트럼프 모자 벗고 주위를 좀 둘러봐요. 거리가 나치로 차고 넘쳐나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우린 우리 고유의 생활방식과 문화를 잃어 가고 있어요. 멕시코인들이 몰려오고 있잖아요.”
“동서! 진심이야?”
“저 인종차별주의자 아니니까 그 말씀 마세요!”
“그렇겠지. 인종차별주의자 아니시겠지. 국경 넘다 걸린 사람의 아이들을 철장에다 가둬놓는다고. 그건 나치 수용소야!”

보수 불륜남 사위가 못 참고 나선다.

“어허! 수용소가 옳다는 말은 한 적 없어요. 아이들이 아니라, 부모가 잘못한 거라는 얘기지.”
“자식들이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라는 게 잘못이라구요? 그게 미국의 본질 아니에요?”
“부모들이 불법으로 넘어온 게 잘못이란 얘기에요. 사실이잖아. 미국은 미국인들 거잖아요.”
“손가락질하지 마세요!”
“안 되겠네. 마르타 어디 있어?”

난데없이 마르타가 소환된다. 아버지 곁을 온종일 지켜주는 도우미다. 근무시간은 길지만, 병원에서 간호사로 많은 환자를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편하고, 넉넉히 돈을 줘서 벌이도 나쁘지 않다. 지병 있으신 노인네 시간 되면 주사 놔드리고, 약을 안 먹겠다고 어리광부리면 마누라나 딸내미처럼 잔소리해서 먹인다. 바둑 같이 두며 놀아드리고, 영감님 글 쓰실 때 뒤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는다. 이러다 보니 영감에게 없어서는 안 될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식구들도 노인네 돌봐드리는 데 신경 안 써도 되도록 해주니 마르타가 고맙다.

그런 마르타는 중남미 출신이다. 실은 그녀의 어머니는 불법체류자다. 가족 대화를 엿듣고 있자니 멕시코 불법 이민자 이야기가 나와 뜨끔하고 있었는데, 좀 와보라고 한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게 된다. 그나마 직장을 잃어버릴까 봐 어머니가 불법체류자라는 사실을 영감님 이외의 가족들에게 숨겨온 터다.

20대 초반의 중남미 여성으로, 착하고 순박하고 겁 많은 눈망울의 처자 마르타는 벽난로 앞에 서서 법정에 끌려 나와 자기 변론을 해야 하는 죄수 처지가 됐다. 소파에 기대앉은 백인 가족들의 흥미진진한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된다. 무얼 말하라는 걸까? 불법 이민자를 옹호하면 불법을 옹호하는 사람이 돼 버리고, 역시 너도 같은 부류였다는 말을 들을지 모른다. 불법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 우리 안에 갇힌 멕시코 어린이들의 참혹함을 외면하는 ‘나치’의 앞잡이로 내몰릴지 모른다. 이도 저도 아니면, 순혈 백인이 아닌 중남미 출신이 미국에 있어서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도대체 무얼 말하라는 걸까?

흥미롭게도, 백인 가족은 마르타의 출신지를 저마다 다르게 알고 있다. 사위는 마르타가 우루과이에서 왔다고 말한다. 손자는 마르타가 브라질에서 왔다고 한다. 맏딸은 에콰도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저 ‘사람’ 마르타의 정확한 국적과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미국 말고 딴 나라 출신’이라는 것만 중요하다. ‘딴 나라’ 중에서도 유럽이나 캐나다, 호주 같은 백인 나라가 아니라, 가난하고 범죄가 들끓는 ‘중남미 촌구석의 어딘가’라는 것만 의미가 있다. 불쌍하고 착한 마르타는 ‘그런 데서 온 여자애’일 뿐이다. 벽난로 앞으로 호명되고 소환된 ‘그쪽 출신 여자애’ 마르타는 죄의식과 곤혹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쭈뼛쭈뼛 아무 말도 못 하고 엉거주춤 서서 커다란 눈망울만 굴릴 뿐이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백인과 불법체류자
명탐정은 수사를 진행하는데, 그가 보기에 자살이라고 보기에 석연찮은 일이 한둘이 아니다. 가령, 사망 당일 밤 맏딸은 ‘쿵’ 하는 충격음이나 삐거덕거리는 나무계단 소리에 세 번이나 깼다고 한다. 큰며느리는 그 소리에 아버님 방에 찾아가 괜찮으신지 보기도 했다. 그날 저녁 망나니 큰손자와는 크게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도 했고, 사장인 둘째 아들과도 언쟁이 있었다. 그런데 가족들이 교묘하거나 어설프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뭘 숨기는 걸까? 이 사건에는 밝혀내야 할 거짓과 기만, 비밀이 분명히 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생일잔치를 마친 날 밤 마르타는 자정 퇴근 전 영감님과 바둑을 뒀다. 영특한 마르타에게 지게 생긴 영감은 어리광을 부리며 바둑판을 엎어버린다. 늘 그랬던 모양이다. 그게 ‘쿵’하는 소리였다. 마르타는 영감에게 주사 100㎎을 놔 드리고, 가족 접대로 고생한 하루의 보상으로 소량의 진통 모르핀도 주사하려 했다. 모르핀은 마약이니 조심해서 다뤄야 하고, 마르타는 신경 써서 관리를 잘해 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방금 주사한 약이 원래의 약 케토를락(ketorlac)이 아니라 모르핀이었다. 모르핀 100㎎이면 10분 내로 뇌가 멈추고 사망하게 된다.

경악한 마르타는 의약품 가방에서 유일한 희망인 날록손(naloxone) 주사를 찾는다. 마약류 과다 투약 시 생명을 살리는 아편제 길항제여서 모르핀을 다루는 간호사들이 필수적으로 가지고 다니는 약이다. 미스터리 작가인 영감은 오히려 재미있어한다.

“그거 효과적인 살인 수법이네. 그러니, 누가 약을 바꿔치기해 놓으면 확실히 죽는 거 아냐. 적어 놨다가 소설에 써먹어야지.”

그런데 이게 또 웬일인가. 늘 가지고 다니던 그 주사약이 가방에 없다. 절망에 빠진 마르타는 눈물을 흘리며 허둥지둥 구급차를 부르려 한다. 그런데 실성을 한 것인지, 뭔가 곰곰이 생각하던 영감은 전화를 못 걸게 방해한다. 이미 시간이 흐르고 있고, 10분 내로 구급차가 올 확률은 없다. 다급한 마르타는 가족에게 알리러 뛰어간다. 영감이 발을 걸어 마르타를 넘어뜨린다. 두 번째 ‘쿵’ 소리였다.

“지금 뭐 하시는 거에요? 미치셨어요?”
“마르타, 이미 늦었단다! 내 말 잘 들어! 내 엄마는 아직 불법체류자야. 이게 네 잘못이 돼 버리면, 네 엄마도 들키고 결국 국외로 추방당하게 돼. 네 가족은 다 흩어지게 되겠지.”
가족과 헤어진다는 말에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내던 마르타의 눈이 더욱 커진다.
“그렇게 둘 순 없잖니.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하렴. 마지막으로 날 위해, 네 가족을 위해.”
“어떻게 하라는 건데요?”

영감의 의도는 자신이 자살한 것으로 처리하고, 마르타를 용의 선상에서 배제시키는 것이다. 베스트셀러 미스터리 작가인 영감은 경찰들의 수사 방식을 잘 안다. 그는 마르타에게 식구들이 보이게 소리를 내 인사하며 퇴근을 한 다음, 차를 타고 나가다가 보안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위치에 주차하고 다시 돌아와 저택 벽을 타고 올라와 방으로 돌아오라고 한다. 그런 다음 자신의 가운을 입고 1층으로 내려가 흐린 유리 너머로 가족들에게 자신이 아직 살아있는 듯 보이고 나서 벽을 타고 몰래 빠져나가 귀가하라 것이다. 그러면 알리바이가 완벽해진다는 것이다. 심약한 마르타가 도저히 해낼 것 같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엄마와 헤어지지 않으려면 해야만 한다. 이렇게 해서 마르타는 명탐정이 게슴츠레한 눈을 뜨며 사건을 파헤치는 중에도 용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과 백인의 나라 미국
과도하게 보이지만, 영감은 죽는 순간 친손녀 이상으로 아끼는 마르타에게 인생의 마지막 선의를 베풀려 한 것이다. 그러나 ‘과도한 선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유산상속이 결정되는 결말 부에서, 놀랍게도 영감은 저택을 비롯해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을 마르타에게 모두 상속하는 유서를 남겼음이 밝혀진다. 이를 통해 후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간명하다. ‘이제 아비에게 빌붙어 얼치기 귀족 행세하던 건 그만하고 너희들이 각자 스스로 노력해서 잘 살도록 해라’이다. 더 간단하게는 ‘정신들 차려’이다.

가족들은 ‘노인네가 노망이 나도 정도껏 해야지 수백억 전 재산을 불법체류자 딸내미에게 다 넘기다니, 받아들일 수 없다’며 협박을 위주로 한 갖은 수를 쓴다. 모두 허사였다. 새 주인 마르타는 저택의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집을 잃어버린 후손들은 마당에서 이제 귀족이 된 마르타를 멍하니 올려다보는 상징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영화의 가족은 미국 전체 주류 백인사회의 축소판이다. 공고한 보수 기득권이었던 과거의 미국 주류 백인사회는 1960년대 이후 크게 변모했다. 리버럴이 주류에 가세하고, 교조적 기독교 바탕의 보수는 일정한 조정을 받았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 공공시설 등에서 인종차별이 법적으로 정당했던 나라가 얼마 지나지 않아 보편적 인권이 전 사회적 기저 철학이 된 나라로 변모했다. 실행에 반동적 저항이 따르고, 폭력과 모순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미국의 인권은 앞으로 나아가는 듯 보였다.

영화는 현재의 미국 주류 백인사회의 정치적 인식과 도덕의 조화가 파탄에 이르렀음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과거의 사회갈등, 보혁갈등 속에서 전투적으로 피어난 정치철학은 국가의 도덕적 유산으로 승화되지 못했다. 곧 사라질 것으로 기대됐던 인종차별과 폭력, 저항과 폭동이 지난 몇 년간 미국을 뒤덮었다. 살해를 포함한 폭력적 수단으로 의회를 점령하는 백인 정치집단이 생기기도 했다.

특히 코로나 상황을 맞아 아시아계 등 유색인에 대한 ‘묻지마’식 폭력 사태가 지속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불법체류자는 저항이나 보호 요청이 힘들어 폭력에 더욱 심각하게 노출돼 있다. 미국의 한국 동포 중 불법체류자는 16만 명에서 25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백인 주류는 폭력에 대해 조장이나 교사, 방조나 방기로 일관할 뿐, 국민을 뭉치게 만들어 도덕과 질서를 회복하는 대안이나 철학 제시에 완전히 실패했다.

영화는 미국이 한때 모두가 이방인이고 불법체류자였던 시절이 있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마르타는 거짓말을 생각하면 구토를 하는 독특한 캐릭터다. 선한 마음과 정의로운 새로운 이방인이 미국 주류의 도덕의 성에 새로운 주인이 됐고, 한때 유산 상속 대상 1순위자였던 위선자들은 빈손으로 쫓겨났다. 영화는 이를 통해 미국 사회에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정신들 차려라!’

김기홍 한성대학교 크리에이티브인문학부 교수
김기홍 한성대학교 크리에이티브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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