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 있는 풍경]

‘마을이 있는 풍경’은 ‘마을’의 속살을 가만가만 들여다보고 소곤소곤 소통하는 코너입니다. 더 없이 가깝고 밀착돼 있지만 적지 않은 이들에겐 대체로 멀기만 한 마을의 이야기를 때론 지직거리고 둔탁한 확성기로 때론 고성능 마이크의 ASMR로 들려드립니다.<편집자주>

 

“집도 없는 남자와 결혼할 수는 없어요”

그녀는 남자의 구애를 거절하기 위해, 혹은 진심으로 ‘집’은 장만해놓은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평소 소신을 굽히지 않기 위해 그렇게 답했는지 모른다. 남자는 대학에서 강의하는 젊은 교수였지만 아직 자기 소유의 집을 장만할 만큼의 재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남자는 상심했다. 그래도 그녀를 놓치기는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꼭 집을 사겠다고 마음먹고 떠난 건 아니지만 청량리에서 버스를 타고 ‘무작정’ 종점까지 갔다. 당시 버스의 종점은 양수리 강가 마을이었다. 강가 마을을 거닐다가 문득 마음이 움직여서 팔려고 내놓은 집이 있는지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다. 마침 작은 계곡 물줄기가 곁에 흐르는 기와집이 하나 나와 있다 했다. 그는 그 집을 사버렸다. 당시 그 동네의 시세보다 훨씬 비싼 가격이었다는 건 한참 후에나 알게 되었다.

남자는 당장 그녀에게 당당하게 구혼했다.

“나 이제, 집 있는 남자요.”

 

 

내가 그 부부의 결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건 나의 ‘무작정’ 드라이브 때문이다. 평일에 하루 휴가를 내고 집에 널브러져 있다가 이렇게 하루를 보내는 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가로 드라이브라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결심은 너무 이례적이다. 사실, 나는 혼자 무엇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니 혼자서는 거의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다. 혼자서 영화를 본 건 평생에 두세 번. 혼자 목적 없이 드라이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강가에 차를 세우고 산 아래 마을로 걸어 들어갔다. 언젠가 한번 와 본 적이 있는 곳 같았다. 그때는 분명 혼자가 아니었겠지.

강을 바라보고 있는 중학교 담벼락을 타고 올라가니 서른 가구 정도가 모여 사는 고즈넉한 마을이 있었다. 예전에야 정말 오지에 가까운 마을이었겠지만 지금은 가까이 전철역도 있고 서울에서 그다지 먼 곳이 아니라 근사하게 지어진 전원주택도 몇 채 보이는 마을이다. 이 정도의 거리라면 서울에 직장을 가진 사람들도 탐내볼 만한 곳이다.

마을 초입에는 시골 마을에서 흔히 만나는 나이 많이 먹은 나무가 대문처럼 지키고 있고 그 나무의 그늘을 누리는 평상이 무심히 놓여있다.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느긋하게 걷고 있다가 너와 지붕을 얹은 소담한 집을 만났다. 그 마을의 어느 집도 담이 없어서 누구나 집을 들여다보며 지나가도 이상한 게 없었지만 유독 그 집은 더 개방되어있다는 느낌이었다. ㄱ자 본체와 바람 길을 내고 나란히 붙어있는 별체로 이뤄진 이 낮은 너와집은 ‘박소재’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내 이름을 발견한 것처럼 반가웠다. 이름 그대로 ‘소박한 집’인 것이다. 바람이 흐르는 길을 따라 너무 자연스럽게 그 집 마당에 어느새 발을 옮겨놓고 말았는데 아무리 담이 없는 집이라도 낯선 사람이 불쑥 발길까지 들여놓은 것 실례였다.

 

 


'무작정' 드라이브로 닿은 마을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안채와 별채 사이의 바람 길목에서 집 주인이 나왔다. 뒤뜰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집주인 부부가 이웃 집 손님을 맞이하듯 편하게 인사한다. 쫓겨나도 할 말 없을 처지에 반겨주는 미소가 너무 고마웠다. 뒤뜰에 마련된 야외 테이블로 안내돼 꽤 긴 시간을 집주인 부부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 집이 두 사람을 결혼하게 만든 그 집이다.

“집도 없는 남자랑 결혼 안 하겠다 했는데 떡 하니 집을 마련해버려서 결혼했죠.”

이제 60이 넘은 나이의 그녀가 갑자기 20대 혹은 30대의 그때로 돌아가 웃으며 남자를 흘끗 곁눈질했다. 집이 아니라 그 결연한 의지가 믿음직해서 결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부부는 젊은 시절 내내 이 집의 방문자로 살았다.

“도시에서 일을 가지고 살았으니 이 집의 주인으로 살 수 없었어요. 주말이나 휴가 때 와서 쉬어가고 관리하며 방문자로 살았죠. 그래도 이 마을 사람들 모두 다 잘 알아요. 돌아가시고 자녀들이 팔아버린 집들도 있지만 자녀들이 계속 관리하며 마을 주민으로 연을 이어가고 있어요. 저희는 은퇴하고 드디어 진짜 집 주인이 되었습니다. 잠깐 들르는 사람들은 주인이라고 보기 어렵죠.”

도시에서 계속 살아도 좋았을 텐데, 예전처럼 주말 방문자로 살아도 좋았을 텐데 왜 이 마을로 은퇴하게 된 걸까?

“이상한 얘기지만 들꽃 때문에요.” 그녀가 안채 뒷길, 별채 사잇길에 제멋대로 피어있는 들꽃에게 시선을 돌렸다. 집을 두르고 있는 듯 들꽃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피어있었다.

“주말에나 와볼 수 있으니까, 그것도 매 주말 와볼 수도 없으니까 이 집에 와 보면 들풀들이 늘 제멋대로 자라있어요. 처음엔 잡풀을 뽑고 좋아하는 꽃도 심고 가꿔보려 했는데 사실 이 집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더라고요. 어느 날 바람이 불고 들풀들이 바람에 몸을 맡겨 흔들리는 모습을 지켜보았어요. 그들이 생명으로 느껴지더라고요. 저항하지 않고 그냥 바람에 몸을 맡겨서 눕고 일어나고 흔들려요.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요. 이 집의 주인으로 그들이 즐겁게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 땅에 뿌리 내린 들풀들이 자연스럽게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너무 아름답고 경이로워 보였어요.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동안 어깨 힘 많이 들어가 있는 삶을 살았거든요. 경쟁적으로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고. 그런데 이 마을에선 아무도 어깨 힘주지 않아요. 긴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서로를 내보이고 속속들이 다 알게 되었으니까 어깨 힘주거나 피곤하게 살 필요 없잖아요. 저 들꽃처럼 그냥 좀 자연스럽게 살자 싶어서 서울 생활 정리하고 이리로 들어왔어요.”

 

 

들꽃처럼 자연스럽게 마음을 주고받는 마을

바람에 몸을 맡긴 들풀들을 보려면 나도 몸을 낮추어야 한다. 그들과 같은 키 높이에 맞춰 마당에 낮게 쭈그리고 앉아보았다. 이름도 알 수 없는 많은 작은 꽃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들꽃들의 움직임은 단지 바람에 의한 물리적 작용만이 아니었다. 바람에게 대답하고 반응하고 노래하고 춤춰 보이고 마음을 보내는 몸짓 같았다.

‘마음을 주고받음’ 딱 그런 느낌이다.

“마음을 주고받는 정경을 이 집의 들풀에서 발견한 것이지만 사실 마을 전체가 마음을 주고받는 자연스러움으로 가득하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오듯 이곳으로 돌아왔어요. 저희는 이 마을의 주말 방문자였지만 조금씩 조금씩 평생에 걸쳐 어깨에 무거운 것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는 관계로 성장했죠. 처음 집을 사놓고 서로를 내보이고 받아들이는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게 우리를 자연스럽게 했죠.

이 부부, 너무 감상적인가? 이 마을이 그렇게 특별하다는 것인가?

아니다, 어디에나 있는 마을이다. 우리가 어깨에 무거운 존재감을 잔뜩 올려놓고 거래하듯, 경쟁하듯 이웃을 상대하려 하지 않는 한, 있는 그대로를 열어 보이며 자연스럽게 살기로 결심한다면 어디나 그런 마을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마을이 할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있는 그대로를 내보이며 자연스러워질 결심을 할지의 여부에 달린 것이다.

그 집과 부부의 이야기를 알게 된 후로 가끔 나도 ‘무작정’ 드라이브를 그 마을로 향한다. 그곳에는 소 십여 마리를 키우는 노부부가 살고 있고 아름답고 소소한 정원에서 가드닝을 가르치는 중년의 남자 가드너가 워크숍을 운영하고 있고, 들꽃들을 말려 차를 만들어 내오는 찻집 여주인도 있고 이웃과는 거의 소통을 하지 않는 대 저택의 가족도 있고 이제 막 새롭게 모던 주택을 지어 도시에서 이사 온 젊은 부부와 자녀도 있다.

찻집은 가드닝 워크숍과 함께 겨울 3개월은 휴지기에 들어가고 (‘꽃들처럼 저희도 땅속에서 동면해요’라고 찻집 주인은 겨울에 허탕 친 내게 웃으며 변명했다. 아니 변명이 아니라 그런 패턴으로 사는 게 더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평월에도 월요일과 화요일은 찻집을 열지 않는다.

박소재의 부부가 천천히 자연스럽게 그 마을에 스며들어 일부가 된 것처럼 언젠가 나도 이 마을의 일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소망해본다. ‘무작정’ 드라이브가 가져다 준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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