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봉종택
학봉의 휘諱는 성일이요 자字는 사순士純으로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학봉은 퇴계 이황의 문하로 서애 류성룡과 동문수학한 인물로 퇴계로부터 연원전수의 뜻이 담긴 병명屛銘을 받았다. 이는 수제자라는 의미로 그 병명은 박약양지연원정맥博約兩至淵源正脈이라 쓰였다. 학봉은 선조 원년(1568)에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부제학, 황해도 순무어사, 나주목사,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시 경상도초유사에 임명돼 민중의 궐기를 호소하는 초유문을 지어 각 고을에 보내 의병의 궐기와 지원을 적극 종용했다. 특히 관병과 의병을 잘 조화해 임진왜란 삼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의 승리를 거두는 데 일역을 했다. 이듬해 왜적과 사력을 다한 독전 중 병을 얻어 55세에 진주성에서 순국했다. 뒤에 임천서원臨川書院에 배향됐으며 문충공文忠公의 시호를 받았다.

영남학파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학봉은 그 학통이 경당 장흥효를 거쳐 서계 이시명, 갈암 이현일, 밀암 이재, 대산 이상정, 손재 남한조, 정재 류치명, 서산 김흥락(학봉의 11대손)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1천 5백여 편의 시를 지었다고 전해지고 저술로는 『해사록』, 『상례고증』, 『경연일기』 등과 문집 16권이 전해오고 있다. 또한 호계서원, 사빈서원, 임천서원 등 9개 서원에 제향되고 있다. 2020년 안동호가 내려다보이는 한국국학진흥원 곁에 자리 잡은 400년의 논쟁의 종지부를 찍고 세워진 호계서원 복설 과정에서 퇴계를 중심으로 서애 류성룡과 위패 위치로 논란이 있던 병호시비屛虎是非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학봉기념관(왼쪽)
학봉기념관(왼쪽)

천 년 불패의 땅, 금계金溪
학봉종택은 일명 문충고택文忠古宅이라고 부르는데 현재의 집터인 금계金溪를 이곳 사람들이 검제黔提라 불렀고, 조선 전기부터 천 년 동안 결코 그릇된 일이 없을 명당 중의 명당, 즉 천년 불패의 땅으로 손꼽히던 곳이다. 금계에는 사복시정 배상지가 살았던 백중당과 간재 종택이 있고, 용재 이종준과 판서 권예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학봉은 본디 의성 김씨 종택이 있는 안동 임하면 내앞마을에서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학봉이 이곳 금계에 자리 잡은 때는 그의 나이 45세 되던 1582년, 처가 동네였던 이곳에 2천여 평의 터에 집을 지었다. 황해도 순무어사를 지낸 시기였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112호인 이 건물은 본채와 사랑채, 문간채(솟을대문), 운장각雲章閣, 풍뢰헌風雷軒, 사당 등 5동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학봉선생고택이라 쓰인 솟을대문을 통해 들어서면 여느 고택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잘 가꿔진 정원이 한눈에 보이고 ‘-’자 형태의 구조로 보이지만 ‘ㅁ’자 모형의 안채와 사랑채가 이어져 있는 구조이다. 특이한 것은 여느 종택이 취하고 있는 안채와 사랑채가 별도 공간으로 구성된 것과 달리 ‘ㅁ’자 형태 하나에서 안채와 사랑채가 각 기능만을 갖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채에는 박약진전博約眞銓과 전서체의 문충고가文忠古家라는 당호 현판이 걸어져 있다. 경내에 있는 운장각은 선생 유물을 보관하고 전시하고 있는데 운장각이란 시경詩經에 탁피운한위장우천倬彼雲漢爲章于天이란 시구에서 인용한 것으로 곧 학봉의 기상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저 밝은 은하수처럼 높은 하늘 가운데서 빛나다’는 뜻으로 학봉과 선현의 유물인 경연일기 등 전적이 보물 제905호로, 교서, 유서 등 중요 고문서 등이 보물 제906호로 지정돼 보관돼 있다.

한편 풍뢰헌風雷軒은 학봉의 13대손이자 김흥락의 손자이며 독립군 자금을 댔던 여현 김용환이 거주하던 별채이다. 또 하나 주차장 곁에 ‘학봉기념관’이 마련돼 있어 고택과 더불어 학봉의 일대기와 각종 문헌, 목민관으로서 모범, 외교투쟁, 곧은 성품 등의 인물 정보를 사전에 얻을 수 있다.

현재 종택은 학봉 15대 종손인 김종길 씨 부부가 기거하면서 안채와 사랑채, 풍뢰헌 등을 고택 체험관으로 운영하고 있어 고택에서 머물면서 그 집안만의 식단과 정취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근간에는 지방자치단체마다 한옥을 개량 시설로 특화하고 숙박과 체험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이처럼 고택을 활용하면 그 의미는 더할 것이다.

불의不義에 굴하지 않고/ 주상께 직간直諫을 서슴지 않으니/ 전상호殿上虎라 칭하지 않았을 고/ 학봉鶴峯의 그 기개氣槪 간직한/ 500년 종택/ 500년 종손/ 불편도, 행실도/ 감내해야 할 운명/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가풍 지키는 일이/ 외로운 길이련만/ 온고지신溫故知新/ 오늘도 우뚝 그 자리/ 그 기운 굳건히 지키고 있네.

이상은 필자의 ‘종택’이라는 시이다. 선생의 성품은 불의를 참지 못하고 강직해서 직간直諫을 서슴지 않아 전상호殿上虎라는 별명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퇴계학의 적통을 11대손인 서산 김흥락(1827~1899)이 잇는가 하면, 1895년 의병활동을 시작으로 안동의 독립운동으로, 그리고 독립군 자금지원 등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선 후손이 많아 정부로부터 17명이 건국훈장 등을 받았다. 학봉의 출신지인 내앞마을에 경북안동독립기념관이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우리가 종택을 찾는 이유는 종택마다 다른 건축기법과 건물의 구조에 대한 관심도 관심이지만 그 집안의 가풍을 이해하고 어떻게 삶을 살아왔는지 알아보고 자신을 거기에 비춰 거울로 삼고자 함일 것이다. 사실 우리 것을 지키면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고행과 같다. 우선 가문의 가풍을 지키고 500여 년 전 건축구조를 그대로 유지·활용한다는 것의 불편은 불 보듯 뻔하다. 여기에 종손이라는 멍에를 걸머지고 문중의 각종 시제와 제사 준비는 물론 종손으로서 집안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 또한 종손의 업보인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든 것을 감내하고 오늘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것은 그 가문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조상을 얼을 닮고 싶은 후손의 마음가짐이리라. 또한 그들의 노력이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를 지켜내는 보루이기도 하다. 전국에 산재해 있는 종택만을 찾아 나서는 것도 자신을 찾아가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김철모 시인, 정읍문학회장
김철모 시인, 정읍문학회장

 

 

 

저작권자 © 더퍼블릭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