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에 같은 계급장, 정읍의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지 올해로 127년, 동학농민군의 함성을 따라 동학농민군의 절규와 피 맺힌 함성이 들리는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 정읍 한 곁을 둘러본다. 사람들은 정읍 하면 울긋불긋 물든 단풍의 절정 내장산을 먼저 생각하지만 그 단풍 색깔만큼 가슴에 울긋불긋한 애국심을 간직하고 사는 곳이 또한 정읍이다. 고향에 돌아와 자리 잡은 곳은 행정구역상 정읍시 고부면, 백성의 통곡 소리와 진격의 함성이 뒤범벅된 고부 관아가 품 안에 있다.

육십 평생 살아오면서 부르고 싶었던 ‘동학농민혁명’의 단어는 최근까지 고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숨기고 싶은 진실 같은 것이었다. 그 이유는 위대한 혁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평가를 받기까지 11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이러니 어릴 적 어른들은 어린 자식들에게 동학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했다. 어찌 보면 동학농민혁명은 정읍 사람들에게는 역성의 땅이라는 멍에 같은 계급장이요 속 시원하게 터놓지 못하는 한이었다. 세상에 바른 일을 하고도 말하지 못하며 살아야 했던 우리 선대들에 죄스럽고 정말 미안할 따름이다.

1895년 2월 9일 작성된 당시 심문조서 격인 전봉준 공초에서 농민혁명을 일으킨 원인을 6가지로 답했다. 그중 가장 큰 원인이었던 만석보 현장을 먼저 찾아보았다. 이평면과 신태인읍 경계선에 있는 만석보를 지은 것은 고부군수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부임해 두 번째 ‘한 일’이다. 기존 민간보가 있음에도 농민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그 밑에 새로 보를 막았다. 문제는 보를 막으면서 품삯도 주지 않고 농민을 강제 동원해 공사를 강행했고, 가을에는 그동안 없었던 수세로 보위에 있는 논은 한 말, 보 밑에 있는 논은 두말의 곡식을 거둬들였다.

정읍천과 동진천이 합류하는 지점인 이곳은 이평 들(배들)과 신태인 들 그리고 백산 들이 이어지는 중요한 지점이어서 지금도 수많은 농민의 삶이 이뤄지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니 백성의 원성은 배들을 건너 두승산에 이르고 또다시 능선을 따라 고부 관아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조병갑 군수는 귀를 막고 눈을 감고, 대신 입으로는 불호령을 내리고 손에는 곤장이 쥐어져 있었다.

만석보에서 말목장터인 이평면 소재지를 바라보면 왼편으로 예동마을이 있다. 예동마을 주민은 당시 민보인 예동보를 이용해 배들 농사를 지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만석보가 막아진 이후에는 생전 듣지도 못한 수세 부담으로 1년 농사를 헛농사로 감내해야 했다. 그래서 당시 서당 훈장이었던 전봉준이 인근 주민과 함께 진정서를 써서 고부관아에 제출했지만 수세를 탕감하거나 주민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그 주모자였던 김도삼, 정일서 등을 옥에 가두고 매로 다스려 더더욱 원성을 샀다.

그러자 농민들이 주류였던 동학접주를 중심으로 뜻을 모아 고부 대뫼에서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시정을 강력히 요구하기로 했다. 조정은 주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군수 조병갑을 잠시 익산군수로 발령을 냈다가 다시 부임시켰고 이에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하게 됐다.

주민의 요구가 개선될 희망이 보이지 않자 견디다 못한 예동 사람들이 주동이 돼 1894년 음력 1월 8일 걸 굿을 시작으로 말목장터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말목장터에 집결한 농민군들은 손에 괭이며 낫, 쇠스랑 등을 들고 고부 관아로 향했다. 이 자리에서 전봉준은 조병갑의 학정을 일일이 들어 설명한 후 제폭구민除暴救民을 역설하니 원에 사무친군중들은 환성을 지르며 환호했다고 한다. 가는 길에 영원면 운학리에서 대나무를 잘라 죽창을 만들기도 했다. 영원방향과 천치재 두 코스를 택한 농민군들은 드디어 1월 10일 횃불을 높이 들고 ‘백성을 살려내라’는 함성과 함께 1천여 명이 고부 관아를 급습하게 된다.

이것이 동학농민혁명의 첫 봉기인 것이다. 그러나 조병갑은 이미 도주한 후였다. 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은 옥을 열어 억울한 죄인들을 석방하고, 무기고를 열어 재무장하는 한편 조병갑의 악정에 앞장선 관리를 문초하고 불법으로 거둬들인 수세미를 농민들에게 배분하고 문제의 만석보를 허물었다.

이제 잊히고 있는 역사적 현장
세상이 힘들어할 때/ 희망을 갈구하고/ 나락으로 떨어진 몸 추스러/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꿈을 꾼다/ 주상은 중심을 잃고/ 저 밑바닥 손발가락은/ 자기 배 채우기에 혈안이 됐을 때/ 민초들은 물로 배를 채웠다/희망의 빛 한 가닥/ 고부고을에 녹두새가 날아오른다/ 어둠의 긴 터널 벗어나고/ 배부르고 배 두드리는/ 함포고복含哺鼓腹 세상 갈망하는 함성/ 그 피, 땀이 왕조를 마감하고/ 백성이 주인인 세상 불 지피웠다.

이상은 필자의 ‘녹두새’라는 시이다. 근대 우리나라의 민주화 정신이었던 평등, 인권, 자주와 민주, 자유정신의 보루가 동학농민혁명 정신인 것이다. 그 역사의 현장 고부관아 터가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정책에 따라 신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허물어지고 고부초등학교를 지은 것이니 지금은 그 어느 곳에도 형체와 자취가 남아 있지 않다. 교문 옆에 설치된 고부읍성 고지도와 운동장 한 곁에 서 있는 안내판이 이곳이 역사적 현장임을 보여주는 유일한 증표라는 게 마음이 씁쓸하고 이를 방치한 이 시대사람이라는 게 부끄러웠다.

고부초등학교 교정에 들어서면 그 흔적은 없지만 인접한 고부향교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와 당시 피맺힌 농민들의 절규만 귓전에서 맴돌고 있는 듯하다. 아직도 고부 관아 터, 대뫼마을, 황토현, 백산성지 등 정읍 주변에는 이땅의 민주화를 갈망하는 아물지 않은 백성의 함성이 메아리치고 있다. 시간을 내어 한 번쯤 그 함성을 따라 걸어 볼법하다.

김철모 시인, 정읍문학회장
김철모 시인, 정읍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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