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평가를 받는 무신정변
1170년(고려 의종 24년) 정중부, 이고, 이의방, 이의민 등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한뢰·김돈중 등 많은 문신을 살해했고, 국왕[의종]을 오늘날의 거제도로 유배 보냈다. 의종은 결국 경주에서 이의민에 의해 시해됐다. 우리는 이를 ‘무신반란’ 혹은 ‘무신정변’이라 하고, 무신들에 의해 성립된 정권을 ‘무신정권’이라고 부른다. 왕조 사회에서 특이한 정권인 무신정권은 1170년부터 1270년(원종 11년)까지 약 100여 년이라는 오랜 기간 유지됐다.

무신정권에 대한 평가는 ‘반란’과 ‘정변’ 등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1천여 년이나 지난 역사적 사실을 여러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 역사적 현장을 상상으로 그려보면서, 어떻게 역사를 판단하는 것이 올바를지를 생각해 보자.

무신정변 전후 고려사회
고려 왕조는 918년 태조 왕건에 의해 건국된 이후 약 250여 년 동안 문신을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했지만, 12세기 초부터 내부적으로 많은 모순이 발생했다. 중앙에서는 1126년(인종 4년)에 ‘이자겸의 난’이 일어났고, 1135년(인종 13년)에는 서경에서 ‘묘청의 난’ 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중앙에서 권력 싸움이 벌어지자 농민의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져서, 많은 농민이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녔다[유망(流亡)]. 하지만 중앙정부에서는 농민의 생활을 돌보지 않은 채 권력 싸움만 계속했고, 종국에는 무신정변이 일어난 것이다. 무신정변을 계기로 고려의 정치 운영은 문신 중심에서 무신 중심으로 변화했다. 그런데 무신들 또한 고려를 개혁하지 않고, 이전 시기의 사회적 모순과 폐단을 되풀이하고 말았다.

우리는 고려 시대의 무신정권에서 소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바로 정치 권력이 바뀌었다고 해서 사회 모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무신정권이 100여 년 동안 지속되는 사이 고려사회의 내부적인 모순은 해결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도 유목민족인 몽골이 세력을 확대하면서 고려는 새로운 위협에 놓이게 됐다. 금나라가 몽골에 의해서 무너졌고, 남송도 몽골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이했다.

1196년 쿠데타 이후 성립한 최씨 무신정권은 고려 왕조의 위기를 예측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몽골과 효율적으로 대외 교섭을 하기보다 정권을 유지하는 데만 급급했다. 그 결과 고려는 몽골을 막아내지 못했고, 약 100여 년간 몽골이 세운 원나라에 간섭을 받는 치욕을 당했다. 우리 역사는 1392년 조선이 등장하고 나서야 고려의 대내외적인 모순을 극복하고 새롭게 발전할 수 있었다. 조선이 세워질 때까지 약 200여 년 동안 우리 역사 속에 역사적인 후퇴라는 뼈저린 경험이 존재하는 셈이다.

무신정변의 이야기 속으로
오늘날의 역사 기록에서는 무신정변을 ‘반란’ 혹은 ‘쿠데타’ 등 부정적 시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를 상상으로 각색해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질문 정중부는 무신정변의 주동자라고 알려져 있는데 맞는가? 이고·이의방·이의민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
정중부 : 나는 정변에 얼떨결에 참여했고, 덕을 본 것도 있지만 사실은 얼굴마담이었다.
이고 : 우리가 한 행동은 혁명이었다. 부패한 국왕과 그에 아부한 문신들을 척결해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했던 혁명이었다고 자부한다.
이의방 : 나도 같은 생각이다. 혁명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모두 철저한 계획을 세워서 실행했다. 당시는 민생이 극도로 어려웠고, 그 민생을 어렵게 만든 자들은 바로 국왕과 문신들이었다. 따라서 우리의 거사가 반란으로 불리는 것은 억울하고, 반란이 아니라 ‘혁명’으로 불러 달라.
이의민 : 나는 위에서 내린 명령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다. 나는 정변의 주동자는 아니었지만, 세상을 바꾸는 혁명에 참여한 영광을 얻은 사람이다. 다만 나를 사랑해준 국왕을 시해한 것은 반성한다.
질문 무신정변 주동자들이 자신들의 행동은 반란이 아니라 혁명이었다고 한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의종 : 혁명은 무슨 혁명! 그들은 짐을 시해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문신을 죽인 살인마들이다.

질문 관직을 주고 다스린 사람은 국왕인데, 왜 그들이 국왕을 배반했다고 생각하는가?
의종 : 짐은 고려의 국왕으로서 문신과 무신을 적절하게 우대했다. 그런데 무신들이 배은망덕하게도 짐을 배반하고 죽이기까지 했다. 국왕을 배반한 자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한뢰 : 나는 고려 왕조의 신하였고, 폐하를 잘 보필하려고 했던 문신이었다. 나는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멍청한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모든 것이 실패했을 뿐이다.

시선 ① : 이 사건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무신들이 미리 계획한 반란이었다. 이 사건에 참여한 무신들은 국왕의 총애를 받았던 자들로, 문신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들 문신과 무신은 국왕의 총애를 받기 위해 서로 경쟁했지만, 의종은 무신보다 문신을 더 총애했다. 이런 불만 때문에 무신들은 정변을 계획했고, 종3품 대장군 이소응이 문신 한뢰에게 뺨을 맞은 사건을 계기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무신반란 과정에서 많은 문신이 죽게 됐으며, 심지어 국왕은 이의민에게 맞아 죽었다. 반란의 주동자 자신들의 행동이 백성을 위한 혁명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들은 사건 이후에도 자신들의 야욕을 채우는 데만 급급했다. 심지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죽이는 참극을 저질렀다. 이들의 수탈을 견디지 못한 지방의 백성은 무력으로 저항했지만, 오히려 죽임을 당했다. 자신들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살인을 불사한 반인륜적 처사와 백성을 수탈한 행위는 시대를 불문하고 처벌할 수 있어야 한다.

시선 ② : 이 사건은 이미 900여 년이 지난 과거의 사건이다. 과거의 역사는 오늘날의 잣대를 가지고 판단할 수는 없다. 특히 무신정권이 100여 년이나 유지됐고, 대한민국의 역사로 자리 잡은 것은 무신들이 역사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정변의 주동자들은 모두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으며, 그 이후의 역사 기록에 의해 이미 역사적인 심판을 받았다. 그들의 죄는 밉지만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고, 역사의 전환에 일정한 역할을 한 점 등을 참작해야 한다.

질문 정중부는 정3품 상장군이었다. 정3품 상장군은 고려 왕조 중앙군의 최고 지휘관이었고, 무신으로서 승진할 수 있는 최고 관직이었다. 그러면 국왕으로부터 최고의 총애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정변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
정중부 : 사실 나는 처음부터 정변에 참여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고와 이의방이 워낙 과격해서 …. 내가 폐하의 총애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한때 출입이 통제된 수창궁에 함부로 드나들다가 어사대의 탄핵을 받았는데, 폐하께서 나를 구해줬다. 그 뒤에 상장군으로 승진도 시켜 주셨다. 하지만 총명하셨던 폐하께서 간신들의 꾐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 민생을 파탄에 이르게 했다. 그때는 우리가 아니더라도 불만이 폭발할 일촉즉발의 시기였고, 그래서 우리가 그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당시 고려에는 문벌귀족이라고 불리는 귀족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음서와 공음전이라는 특혜를 누렸다. 음서란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나라에 공을 세웠거나 5품 이상의 고위 관리를 했을 경우, 그 자손에게 관직을 주는 제도이다. 이때 그 자손은 과거 시험도 보지 않은 채 관리가 될 수 있었다. 공음전은 5품 이상의 관리에게 나라에서 주던 땅이다. 이 땅은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가능했다. 문벌귀족들은 이런 특권을 누리면서 고려 사회를 지배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무신들을 무시했다.
질문 그럼 무신정변은 미리 계획된 것이었나? 아니면 우발적인 행동이었나?
정중부 : 그 이전에도 정변 제의가 있었지만, 내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물리친 적이 있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리들의 행동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대의적 명분에서 나온 것이다. 폐하가 즉위하기 전부터 고려 왕조는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인종 때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왕실의 권위는 크게 떨어졌다. 반면 수도 개경에 기반을 둔 문신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또한 반역 사건도 여러 차례 일어났다. 1147년(의종 원년)에 서경 사람 이숙·유혁·성황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1148년에는 개경에서 이심과 지지용 등이 반역을 꾀했다.
그런데 폐하는 나라를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서 경치가 좋은 곳에 많은 별궁과 정자를 지어 나라 살림을 탕진해 백성의 원성을 샀고, 날마다 음주가무를 즐겨 한시도 조정이 편할 날이 없었다. 또 폐하는 연회를 자주 열었는데, 문신들은 주연에 참여해 함께 즐겼지만, 무신들은 경비만 서서 추위와 허기에 지쳐 있었다. 그때 나는 많이 고민하게 됐다. 무신의 최고 관직에 있던 내가 어떻게 이 어려운 형국을 돌파해 하급 무신과 군인들의 불만을 무마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 것이다.

질문 정중부는 국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리고 반란 당시 정3품 상장군이라는 최고 등급의 무신이 8명 있었는데, 정중부는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런 그가 반란에 참여한 것은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 아닌가?
정중부 : 나도 인간인데 개인적인 감정이 없었겠는가? 1144년(인종 22)에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촛불로 내 수염을 태운 일이 있었다. 이 사건만 봐도 무신들이 얼마나 대우를 받지 못했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30여 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나는 개인적인 감정을 30여 년간 가슴에 품는 옹졸한 인간은 아니다. 나는 오로지 대의를 위해 혁명에 가담했다.

시선 ① : 무신반란 세력은 대의를 위해 ‘혁명’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국왕의 개인 저택인 곽정동택, 관북택, 천동택 등과 거기에 있던 엄청난 재물들을 이고·이의민 등과 나눠 가졌다. 결국 혁명은 핑계에 불과하고 재물이 욕심났던 것이 아닌가? 그런 당신들의 행동은 당신들이 부패했다고 비판한 국왕 및 문신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또한 목숨을 걸고 같이 혁명했다는 사람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죽고 죽이는 권력 쟁탈을 벌였다. 이런 것들이 당신들이 말하는 대의였는가?

질문 역사에서는 ‘무신정변’을 ‘정중부의 난’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사실 무신정변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주동자는 이의방과 이고·채원이었다.
이의방 : 사실 나와 이고·채원은 무신이었지만, 직책이 매우 낮았다. 따라서 많은 무신과 군인을 모을 수 있는 높은 관직의 무신이 필요했다. 그 대상이 바로 정중부였던 셈이다. 그도 우리 제의에 선뜻 응했다. 누누이 말하지만, 당시 혁명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12세기 초부터 농민들은 가난 때문에 토지를 버리고 떠돌기 시작했고, 당시에는 떠돌던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 이유는 중앙정부의 과도한 세금과 지방사회의 지배층들에 의한 불법적인 수탈 때문이었다.
물론 중앙정부에서도 개혁하려고 했지만, 국왕과 문신들의 정책이 소극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문신들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폐하에게도 그 책임이 있었다. 국왕과 문신들의 폐단은 곧 그들을 호위하던 우리 무신들에게는 죽을 맛이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들을 돌파하기 위해 우리가 거사했는데, 이것을 어찌 반란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시선 ② : 결국 무신정변의 출발은 부패한 국왕과 문신들을 제거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무신정변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무신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그들은 백성과 고려를 위하는 마음으로 당시 부패해 있던 문신들, 그리고 이를 개혁하지 않은 국왕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이 점이 무신정변을 기억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

시선 ① : 물론 무신반란이 부정부패에 젖어 있던 문신 세력을 타도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신들의 목적을 위해 문신들을 대량 학살했는데, 학살에는 정치적인 목적 이외에 감정적인 요소도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반란 세력을 중심으로 한 무신들이 재물을 약탈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의방 : 우리들의 거사에는 부정부패를 없애고 새로운 시대를 열자는 대의명분이 있었다. 대의명분을 위해서는 문신 세력을 숙청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거사 과정에서 재물을 약탈한 것은 분명 잘못된 행동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약탈은 그 전의 문신 세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선 ① : 지금 큰 도둑과 작은 도둑을 비교하는데, 크든 작든 도둑이라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반란을 주도한 세력의 부정한 행동이다. 정중부 등 정변 주동자들은 국왕의 사재인 관북택과 천동택 등을 비롯해 학살당한 문신들의 집을 점령하고 그곳의 수많은 재물을 약탈하지 않았는가? 이런 점에서 정변이라는 것이 그동안 쌓였던 울분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서 보면, 지난 역사를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는데, 바로 역사의 주체 문제이다. 역사를 소수의 지배층 혹은 다수의 피지배층 등 어느 쪽에서 판단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달라질 수 있다. 지배층을 중심으로 봤을 땐 그 반대 세력의 준동은 ‘반란’이 맞지만, 부패한 권력에 맞서 새로운 시대를 지향했을 때는 ‘개혁’ 혹은 ‘혁명’ 등의 칭송을 듣게 마련이다.

피비린내 나는 지난 역사의 현장을 오늘날의 우리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을지 뒤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역사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책임이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정의롭지 않은 시대 정신은 훗날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점을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신안식 가톨릭대학교 인문사회연구소 연구교수
신안식 가톨릭대학교 인문사회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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