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 세계관 뮤지컬 영화 <메리 포핀스>
영국은 마법 콘텐츠 강국이다. <해리포터>(Harry Potter)와 <반지의 제왕>(Lord of the Rings) 두 편만 언급해도 충분한 사례 제시가 될 것 같다. 마법 이야기의 역사는 매우 길다. 영국 기사 문학의 원류인 ‘아서왕 이야기’에도 멀린(Merlin)과 같은 마법사가 등장한다. 우리 옛이야기에도 도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도사나 선녀가 등장하는 <구운몽>, <전우치전>, <선녀와 나무꾼> 등이 있다. 어느 나라나 마법적 세계관의 이야기는 있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현실은 늘 힘겨운 법이며, 잠시나마 그 굴레에서 비현실적 방법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존재론적 일탈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마법 이야기다. 마법에 대한 희구와 상상력은 현실의 제약과 한계를 뛰어넘어 미래 비전을 제시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영국은 소설 원작을 기반으로 영화나 게임 등 원소스멀티유즈(one source multi use)를 통해 산업적 확장에 가장 크게 성공한 나라다. 영국이 이야기와 배우 등 소프트웨어를 제공하고, 할리우드가 압도적인 규모의 자본과 기술, 시장과 마케팅을 통해 상업적 성공을 끌어내는 선순환 공식이 기본이 됐다.

1964년 작 <메리 포핀스>(Mary Poppins)는 이 공식에 부합하는 고전적인 사례다. 2018년에는 후속작 <메리 포핀스 리턴즈>(Mary Poppins Returns)가 개봉돼 화제를 모았다. 공공성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대단히 많이 담고 있는 논쟁적 작품이기도 하다.

<메리 포핀스>와 여성참정권 운동
마법 판타지 장르답게 영화는 메리 포핀스가 구름 위에 앉아 저 아래 런던의 전경을 내려다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선녀 같기도 하고, 착한 마녀 같기도 하다. 치마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카펫으로 만든 마법 가방을 들고 다니는 젊은 여자다. 그리고 트레이드 마크인 앵무새 머리 손잡이가 달린 우산을 끼고 있다.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는 완고한 초등학교 선생님 이미지로서, 쉬워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영화의 배경은 1910년대이며, 주요 무대는 벚나무길 17번지 조지 뱅크스(George Banks) 씨 댁이다. 은행에 근무하는 중년의 사내로, 딸과 아들이 있는데 아직 미취학 어린이다. 영화는 하늘에서 강림한 메리 포핀스가 이 집의 유모로 취업해 아이들을 환상적인 마법의 세계로 초대해 즐거움과 교훈을 주고, 더불어 가족의 사랑과 유대도 굳건해진다는 이야기다. 수채화가 그려진 캔버스에 뛰어들어 그림 속의 세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는 장면은 압권이며, 디즈니 영화다운 기법이다.

영화 도입부에 아이들과 관련된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기존의 유모가 아이들이 말을 안 들어 더는 못 하겠다며, 그만둘 테니 근무일만큼 급여를 정산해 달라고 해서 벌어진 소동이다. 요리사와 가정부가 나서서 4개월간 여섯 명의 유모가 떠났다며 제발 가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지만, 아이들의 말썽에 질려버린 유모의 결심은 확고해 보인다.

그나저나, 아이들의 어머니는 어디 계시는가? 어떻게 애들을 건사했기에 집안이 이 지경이 됐나. 곧 뱅크스 부인이 귀가한다. 무엇 하시느라 그토록 바쁘신가도 금방 드러난다. 뱅크스 부인은 ‘여성에게 투표권을(Votes for Women)’이라고 써진 어깨띠를 매고 있다. 여성참정권 운동에 완전히 빠져 지내는 사람으로, 집안에서 벌어진 심각한 사태 파악은 할 생각 없이 다짜고짜 시위에 관한 말만 연신 퍼부어댄다. 약간의 푼수기에 귀엽고 밝은 인상의 부인은 생글생글 웃으며 시위와 관련된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굿 이브닝! 정말 멋진 모임이었어요! 휘트본-앨런 부인이 자기 몸을 총리가 탄 마차 바퀴에 묶어 버렸거든요. 다들 거기 계셨어야 하는데. 엔슬리 여사는 팸플릿을 돌리다 투옥됐지 뭐예요.”

이 영화는 뮤지컬이기 때문에 노래가 중요하다. 이어서 뱅크스 부인은 ‘여성참정권자의 노래(Sister Suffragette)’를 씩씩한 안무와 함께 힘차게 부른다. 엉겁결에 가정부와 요리사까지 합세해 시위 공연이 펼쳐진다.

속치마를 입었지만, 우리는 군인들이라네!
We're clearly soldiers in petticoats
여성의 참정권을 위한 용감한 십자군!
And dauntless crusaders for women's votes
남자들 개인은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Though we adore men individually
함께 모이면 멍청하잖아
We agree that as a group they're rather stupid
과거의 굴레는 던져버리고
Cast off the shackles of yesterday
어깨를 나란히 투쟁합시다.
Shoulder to shoulder into the fray
우리의 딸과 손녀도 자랑스러워할 거야
Our daughters' daughters will adore us
그리고 감사히 노래하겠지
And they'll sing in grateful chorus
장하다! 여성참정권자들이여!
Well done, Sister Suffragette!
켄싱턴에서 빌링스케이트까지 들리는 끝없는 함성
From Kensington to Billingsgate one hears the restless cries
방방곡곡 여성들이여 모두 궐기하라!
From every corner of the land … womankind arise!

리듬에 맞춰 행진하는 귀여운 안무가 곁들여 있지만, ‘남성은 멍청하다’, ‘여성참정권자는 십자군’, ‘투쟁’, ‘궐기’ 등 가사의 내용은 상당히 과격하다. 지금의 시점에서는 잘 와닿지 않지만, 대의제 민주주의가 어지간히 자리를 잡고 나서도 여성에게는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미국 독립 후 수십 년간 뉴저지에서 결혼하지 않은 백인 여성이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경우 투표할 수 있었던 사례 등 매우 제한적인 예외는 있었으나, 여성의 투표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영국의 경우, 1832년 선거법 개정(The Representation of the People Act 1832) 때 명시적으로 남성에게만 투표권이 주어지도록 법제화됐다.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은 이유는 권력을 독점한 남성들이 정치나 행정 등 나라 돌아가는 시스템을 여성들이 이해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는 나랏일 말고 주어진 ‘고유한’ 역할이 따로 있기 때문이라는 확고한 선입견도 있었다. 바꿔 말하자면, 내세울 만한 특별한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그냥 여자들은 여자니까 투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참정권은 단순히 투표할 권리를 달라는 정도의 요구를 훨씬 넘어서는 보편적 인권의 문제였다.

시골집 부엌에 흩어져 평생 가족만 보고 살았던 여성들이 산업혁명에 의한 도시화로 서로 만날 일이 생기게 되고, 남성들과 동등한 시간과 강도의 노동을 감당하면서, 조직적인 요구와 항의가 자연스럽게 발생했다. 1867년 영국 의회가 여성 투표권 요구를 정식으로 기각하자, 좀 더 정교한 조직화가 이뤄졌다. 1872년 ‘여성참정권을 위한 전국 협회’가 만들어졌고, 1897년 ‘여성참정권 협회 전국 연맹’(NUWSS; National Union of Women’s Suffrage Societies)이 창설된다. 회장은 포셋(Millicent Fawcett)이었다.

처음 단체가 설립됐을 때 기본적 전술은 평화주의였다. 폭력은 오히려 여성을 비이성적으로 보이게 해 참정권 획득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포셋은 인내와 논리적인 주장으로 남성들을 설득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었다. 여성도 의회가 제정한 법을 따라야 하므로 여성 또한 법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던가, 여성 노동자들도 남성들처럼 세금을 내니까 동등하게 참정권이 주어지는 게 마땅하다는 논리가 개발됐다. 모두 무시당했음은 물론이다. 영화에서 뱅크스 부인이 부르는 노래의 마지막 구절은 이 당시 여성들의 분노와 움직임을 담고 있다.

정치적 평등, 남성과 동등한 평등권을 위해
Political equality And equal rights with men
팽크허스트 부인이 또다시 체포되셨으니, 힘을 내자!
Take heart, for Mrs. Pankhurst has been clapped in irons again!
우리의 권리를 위해 가열차게 투쟁하자!
We're fighting for our rights militantly
절대로 두려워 말라!
Never you fear!

포셋의 평화주의적 접근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자, 더 적극적이고 과격한 방식이 필요하다는 시각이 팽배해졌다. 이런 사람들이 조직에서 독립해 1903년 여성사회정치연맹(WSPU; 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을 조직했다. 이 연맹은 여성참정권자(Suffragettes)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된다. 연맹의 리더가 바로 위의 노래에 등장하는 팽크허스트(Emmeline Pankhurst)다.

메리 포핀스와 1964년의 디즈니
연맹은 과격한 방법이 아니면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할 수 없다고 믿게 됐다. 조직원 중 두 사람이 1905년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과 에드워드 그레이 경(Sir Edward Grey)이 정치 토론을 벌이는 현장으로 가서 대화를 중단시키고 여성참정권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견해가 같지 않더라도 토론장에서는 상대방의 말을 끊지 않고 듣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던 보수적인 영국인들은 모두 놀랐다. ‘노련한’ 두 정치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참정권자들은 <메리 포핀스>의 뱅크스 부인이 두르고 있던 바로 그 ‘여성에게 투표권을(Votes for Women)’ 어깨띠를 두르고 답변을 달라고 정치인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두 여성은 실은 팽크허스트의 친딸이었고, 건물 밖으로 쫓겨난 후 경찰에 체포됐다.

이후 연맹은 더욱 과격하게 시위를 진행했다. 영국국교회가 여성참정권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자, 교회를 불태우기도 했다. 옥스퍼드가 건물의 유리창을 모두 깨버리기도 했고, 반대하거나 미온적인 입장으로 보이던 왕족들에게 항의하기 위해 버킹엄궁 건물에 자신들을 결박하기도 했다. 국회의사당 인근 템스강에서 보트를 타고 고함을 지르며 시위를 했고, 조세 저항이나 일부 정치인들에 대한 산발적 테러도 있었다.

여성참정권들의 마음가짐은 말 그대로 ‘전투태세’였다. 순교도 불사한다는 입장이어서, 투옥되면 무조건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정부의 탄압도 집요했다. 소위 ‘고양이와 쥐 법(Cat and Mouse Act)’를 만들어 단식투쟁을 하는 죄수들에게 강제로 음식을 먹이지 않아도 되도록 조치했다. 대신, 굶어 죽을 지경이 되면 석방했다. 기력이 쇠해 한동안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던 석방자들이 회복 후 활동을 재개하면 다시 투옥했고, 단식투쟁을 전개하면 그냥 굶도록 내버려 두었다. 순교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굶어 죽을 지경으로 건강이 악화하면 또 석방했다.

리더인 팽크허스트도 수형의 고초를 면치 못했다. 영화에서 명랑하게 노래를 부르는 뱅크스 부인이 참가하던 모임이 바로 이맘때의 무서운 시위였다. 배경을 모르고 영화만 보면 전혀 와닿지 않는다. 그런데, <메리 포핀스>의 원작 소설에 등장하는 뱅크스 부인은 참정권 운동과 아무 관련 없는 평범한 가정주부다.

원작 소설 작가인 트래버스(Pamela Lyndon Travers)는 셰익스피어 연극배우이자 성공한 소설가로서, 당시로써는 크게 성공한 여성이었다. 칼 융(Carl Jung)과 같은 학자와 교분을 가진 명사였고, 남자친구는 몇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사생활을 공개하지 않은, 시대를 앞서간 여성이기도 했다. 이런 작가의 성향과 의지가 투영된 주인공 메리 포핀스도 소설에서는 대체로 수동적인 가정주부 뱅크스 부인을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한다. 때로는 약간 경멸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영화는 왜 뱅크스 부인을 여성참정권자로 바꿔 놓았을까.

영화는 1964년작이다. 유럽에서는 68혁명을 예비하던 시기다. 미국에서는 민권법(The Civil Rights Act of 1964)이 의회를 통과한 해다. 인종이나 피부색, 성별 등에 따른 차별을 없앤다는 내용이다. 이런 내용을 굳이 법을 만들어 통과시켰다는 것은, 전에는 피부색, 성별에 따른 차별이 극심했다는 얘기다. 미국에서는 인권과 관련한 다양한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성차별 반대 시위도 당연히 포함된다. 이런 에너지에 몇 년 후 월남전 반대 시위까지 가세하며 미국이라는 나라를 바꿔 놓게 된다.

이맘때 제작된 <메리 포핀스>는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적 배경은 1910년대이지만, 영화가 만들어진 시기의 시대정신을 반영해 여성참정권 운동을 등장시킨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해석에 따라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메리 포핀스>를 디즈니 최초의 페미니스트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로 보는 시각도 있다. 도드라지는 몇 가지 특징 때문이다.

메리 포핀스와 뱅크스 부인
<메리 포핀스>가 기존 영화와 직관적으로 차별화되는 것은 로맨스가 없다는 점이다. 메리 포핀스 역할을 맡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줄리 앤드루스(Julie Andrews)가 가정교사형 보모로 출연했던 다른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과 비교해 보면 선명해진다. 영화는 여자 주인공 마리아가 남자 주인공의 자녀들을 사랑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남자 주인공을 사랑하게 되는 러브스토리다. 처녀인 주인공 여성은 결국 일곱 남매의 엄마가 되기로 결심하는데, 그 과정이 너무나 아름답게 그려진다.

이처럼 상업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남녀 주인공의 짝짓기 ‘밀당’을 그린다. 관객을 설레게 만들고, 그래서 흥행에 도움이 되는 필수적인 코드다. 어린이용 디즈니 애니메이션도 다르지 않다. <인어공주>, <알라딘>, <백설공주> 등 무슨 작품을 보아도 공주님에게는 왕자님이 있고, ‘그 후로 둘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happy ever after)’ 식의 마무리가 기본이다.

" 영화는 다양한 인권운동이 펼쳐진 60년대의 분위기를 반영해 여성참정권 운동을 등장시키고 있어 "

버트(Bert)라는 남성 상대역 배우가 있지만, 둘은 연애 감정이 없다. 버트는 하층민 노동자를 상징하는 인물로서, 메리 포핀스를 보좌하고 찬양하는 것이 주된 역할이다. 메리 포핀스는 연애하지 않는다. 기존의 영화산업 시스템에서 여자는 남자와 연애하는 상대역이 주된 역할이었다. 많은 경우 그게 유일한 존재가치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메리 포핀스는 그렇지 않다. 메리 포핀스의 역할은 오직 ‘메리 포핀스’일 뿐이다. 이런 ‘젊고 예쁜 여주인공이 연애하지 않는’ 페미니즘 코드의 영화가 당대 흥행 랭킹 1위에 오른 것은 사실, 놀랄 만한 일이다.

뱅크스 부인 캐릭터도 특기할 사항이다. <가디언>지 등에 기고하는 페미니스트 문필가 애너 필딩(Anna Fielding)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뱅크스 부인은 완전히 산만한 여자로 묘사된다. 멍청한 변덕쟁이다. 자녀들이 자주 사라지지만 과도할 만큼 신경을 쓰지 않는다. 엄마로서 낙제다. 고용인이 세 명이나 되는데, 집을 제대로 운영할 주부로서의 능력도 없다.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는 ‘여성참정권 대의는 그이를 짜증나게 하잖아’라며 남편에게 숨긴다.’

잘하는 것이라고는 남편이 출근한 사이, 애들은 보모에게, 집은 고용인에게 맡겨두고 참정권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묘하게도 뱅크스 부인 캐릭터는 조금도 얄밉게 보이지 않는다. 동글 방실 인상 좋고 싫은 소리는 한마디도 못 하는 귀여운 아줌마 이미지다. 남편에게 사랑을 받고, 아이들도 엄마를 전혀 싫어하지 않는다. 좋은 것은 다 가진 것이다. 그런데도 얄밉지 않다. 해석이 곤란한 독특한 캐릭터다.

이는 남편과의 대비를 통해 시나리오 작가가 세심하게 배려한 결과로 보인다. 원작과 전혀 다른 뱅크스 부인 캐릭터는 디즈니의 기획이다. 남편인 뱅크스는 디즈니 가족영화답게 폭력적이지 않고 건실한 직장인이어서 전반적으로 나쁘게 묘사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화 초반에 ‘꼰대’이자 남성 우월주의자라는 것을 노랫말 대사를 통해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1910년의 영국 남성이 되는 것은 근사한 일이지. 에드워드 왕의 시대이고, 남자의 시대잖아.
나는 내 성의 영주요, 군주요, 주인님이지! 나는 신하들을 거느리지. 하녀들과 아이들, 그리고 아내. 굳세지만 온화한 손길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영화에서 남성 캐릭터에게 이런 대사를 굳이 시키는 것은 ‘꼰대’ 이미지를 시대정신과 대립시켜 관객의 짜증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기획이다. 그래서 뱅크스 부인에 대한 심정적 지지가 가능해진다. 이런 시대에 경제력을 갖지 못한 가정주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러나 시대는 여성들에게 참정권 투쟁에의 참여를 요구한다. 어떻게 가능한가? 뱅크스 부인처럼 하면 된다.

이는 당시 참정권 투쟁의 모토였던 ‘말이 아니라 행동(Deeds not Words)’이라는 강령을 연상케 한다. 집안일 다 하고, 엄마 역할, 아내 역할 다 잘하고 나서 남는 시간에 참정권 투쟁을 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뱅크스 부인은 당시 가정주부와 같은 보통의 여성들이 투쟁에 가담하는 것이 불가능했음을 역설적으로 웅변하는 캐릭터다.

또한 투쟁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참정권 투쟁과 같은 인권 운동에 일반적 여성이 보내는 심정적 지지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잘 드러난다. 온 가족이 아빠가 열심히 고쳐놓은 연을 함께 날리는 장면이 <메리 포핀스> 영화의 피날레다. 이때 뱅크스 부인은 ‘여성에게 참정권을’ 어깨띠를 연의 꼬리에 슬쩍 붙인다. 여성참정권에 대한 뱅크스 부인의 숨겨놓은 염원을 안고 연은 하늘 높이 날아간다.

말이 아니라 행동
‘말이 아니라 행동’ 강령을 실천하는 메리 포핀스의 대사가 빛을 발하는 장면이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굴뚝을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가 건물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굴뚝 놀이 장면이다. 굴뚝 청소부 수십 명의 야단법석과 시커먼 검댕이 돼버린 아이들을 보고 뱅크스는 기절할 것 같다. 아이들을 훈육하라고 믿고 맡겨 놓았더니 보모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식으로 행동을 하나. 뱅크스는 메리 포핀스를 다그친다.

“잠깐만요, 메리 포핀스. 이 난리가 다 뭐요?”
“뭐라고요?”
“이게 다 뭔지 설명은 해줘야지 않소?”

그러자 메리 포핀스는 오히려 눈을 똑바로 치켜뜨고 맞받아친다.

“먼저, 한 가지만 확실히 해둘게요.”
“네?”
“난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아요!(I never explain anything!)”

행위에 대한 설명 요구는 결국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해명 요구다. 여성들이 흔하게 맞닥뜨리는 일이다. 메리 포핀스는 설명하지 않는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실천할 뿐이다.

여성참정권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사달을 통해 힘을 받게 된다. 결국, 여성들은 남성들의 노동을 완전히 대체하고, 군수물자를 포함한 대량 생산과 전쟁 승리를 통해 존재가치를 입증했다. 1910년을 배경으로 1960년대의 긴장을 표현한 <메리 포핀스>는 갈 길이 멀어 보이는 보편 인권을 둘러싼 현실의 제약을 마법적인 방식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상징적인 영화였다. ‘만민의 완전 평등’이라는 마법적 이상에 대한 희구와 영화적 상상력은 당대의 현실적 제약과 한계를 뛰어넘어 인권에 대한 미래 비전을 제시하도록 도와주었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 같다.

김기홍 한성대학교 크리에이티브인문학부 교수
김기홍 한성대학교 크리에이티브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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