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정책제안

갈등 공화국 대한민국
대한민국은 갈등 공화국이다. 보수·진보, 동·서로 갈라진 정치는 물론이고 경제도 빈자와 부자, 원청(대기업)과 하청(중소기업), 갑과 을, 수도권과 비수도권으로 대립한다. 여기에 세대, 젠더, 이민자 갈등과 남북 갈등이 덧대지면 미래의 통일 한국은 가히 갈등의 지뢰밭이 될 것이다.

한국사회갈등해소센터의 2019년 조사 결과를 보면 이러한 우려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 국민의 91.3%는 우리 사회의 갈등이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지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 범위와 수준이 축소된 형태로 드러날 뿐 강도에 있어서는 전국적 범위의 갈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원자력 발전소 주변 지역 간의 갈등이나 수자원 등 공유자원을 둘러싼 갈등을 보라. 지역의 갈등은 중아의 그것보다 더 쉽게 원색적인 감정싸움으로 전이되며 공동체의 와해로 결과해 그 폐해가 더욱 크다. 한국 사회의 갈등이 갖는 특징과 원인, 해법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 사회의 갈등 특징과 원인
한국 사회의 갈등은 세 축으로 전개된다.
첫째, 급속한 산업화다. 한국은 1948년 정부 출범 당시 GNP의 12%, 정부 재정수입의 73%가 미국의 원조자금일 만큼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현재의 한국은 전 세계에서 스물네 번째로 OECD-DAC(경제협력개발기구 개발원조위원회) 가입국이 된 나라이자(2009) 일곱 번째로 30-50클럽(1인당 소득 3만 달러 이상-인구 5천만 명 이상인 국가) 회원이 된 나라다(2019). 작년에는 명목 GDP가 전년보다 1.8%p 감소하는 역성장에도 불구하고 경제 규모 세계 9위로 부상했다(2020). 서구 선진국이 300여 년에 걸쳐 이뤘던 산업화를 50년도 안 되는 기간에 이루면서 맞닥뜨린 ‘오만 가지’ 사회 문제가 다양한 형태의 갈등으로 구조화된 것은 바로 이 지점, 압축성장의 언저리다.

둘째, 민주화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20년,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를 세계 23위로 지목하며 아베의 일본이나(24위) 트럼프의 미국보다(25위) 더 선진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했다. 그래서 산업화만큼이나 갑작스러웠던 80년대의 민주화와 함께 90년대부터 이뤄진 보수·진보 사이의 수평적 권력 이동은 그동안 억눌렸던 사회적 욕구와 참여의 폭발로 이어졌다. 또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은 시민행동주의(civic activism)와 하위정치영역(sub-politics arena)의 확장으로 귀결하며 민民-관官이 대립하는 공공갈등은 물론 중앙과 지방, 지방과 지방이 대립하는 지역 간 갈등과 정부 간 갈등을 야기해 갈등공화국의 신화를 만드는 데 일조한다.

한국 사회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세 번째 축은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중첩에서 파생되는 문화적 긴장과 마찰이다. K-드라마, K-필름, K-팝을 넘어 K-방역까지, 한국의 대중문화는 물론 국정관리 방식마저 ‘행정 한류’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뻗어나가고 있다. 지역·젠더·세대·소수자·이민자 갈등 등 사실상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로 갈등의 전선이 빠르게 확산하는 것은 탈근대의 문화적 사조와 결합한 개인화·지방화·탈중심화가 기존의 문화적 지층 위에 중첩적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구조화되고 시대적으로 조건 지어진 한국 사회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의 가치 체계와 발전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꿔야 할까? 변화와 혁신의 당위는 누구나 인정하지만, 첫 단추를 끼우는 건 쉽지 않다.

해법 1 : 건강한 공론장의 복원과 사회적 대화의 제도화
사회갈등은 지금 시점에서 볼 때 당사자 간의 이해 충돌로 보이지만 사회 구조와 그 역사적 구성과정에서 생긴 갈등이다. 1970~80년대의 고도 성장기에 싹텄다가 1997년 IMF 위기를 맞아 고착된 부의 불평등 배분 구조가 원인이다. 따라서 사회갈등의 근원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이미 구조화된 다양한 형태의 불평등과 불공정 관행을 교정할 수 있는, 체계적인 정책적 개입이 불가결하다. 이는 사회통합을 최상위 정책목표로 설정하고 각 부부의 부문별 정책을 아우르는 기획조정실과 지자체장의 정책조정 기능을 강화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만, 그것이 기존의 노동·복지·교육·부동산·여성·가족·이민 등, 분야별 공공서비스 변화만을 추구한다면 그를 둘러싼 더 큰 정치적 갈등이 촉발될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주택 공개념 등, 사회갈등 해소를 위해 문재인 정부가 도입한 정책 프로그램도 ‘시장의 반란’에 직면했다. 지역 수준에서의 공공서비스 개혁은 그 반발의 양상이 더 직접적이고 정도도 더욱 크다.

어느 정부든, 어느 지역 공동체든 사회갈등 예방과 해소, 그리고 그를 통한 사회통합 증진을 원한다면 그 목표에 도달하는 절차와 과정부터 개혁하는 더 근원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21세기 타운 홀 미팅(21st Century Town Hall Meeting)’ 같은 참여적 의사결정, 세칭 ‘공론화’가 그것이다.

21세기 타운 홀 미팅은 미국 비영리단체 ‘아메리카스픽스’(AmericaSpeaks :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며, 정책 결정 과정에 시민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숙의민주주의가 추구하는 바를 실현하고자 함)가 1995년부터 주민참여를 통한 정책 결정을 실현하기 위해 개발하고 발전시켜온 참여형 의사결정 기법의 하나로서, 미국 식민지 시대 마을공동체 주민이 마을회관(타운 홀)에 모여 토론을 통해 마을의 규칙과 규범을 결정했던 전통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 21세기 타운 홀 미팅은 과거와 달리 기술적으로나 절차적으로나 훨씬 발전된 형태의 숙의 토론 방법을 고안했다. 숙의 촉진(facilitated deliberation), 컴퓨터 네트워킹(networked computers), 주제 발굴(theming), 여론조사 키패드(polling keypad) 등의 기술적 진화가 그것이다.

이 같은 기술적 결합은 스웨덴의 알메달렌 정치박람회(Almedalsveckan)나 프랑스의 공공토론보다 숙의 절차를 더욱 정교하고 세련되게 다듬어 참여자의 의견이 좀 더 수월하게 수렴되도록 함으로써 숙의를 통한 의사결정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산출한다. 21세기 타운 홀 미팅이 30개 주 전역에서 40회 이상 개최되며 현대 민주주의의 본향이라는 미국에서 마저 큰 반향을 일으킨 건 우연이 아니다.

대표적 사례로 2002년 7월, 9·11 테러로 폐허가 된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의 재건축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뉴욕 컨벤션센터에 모인 4천300명의 시민이 토론을 진행하고 뉴욕 ‘그라운드 제로’ 건설을 결정한 ‘시민에게 듣기(Listening to the City)’ 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이 미팅을 통해 비로소 붕괴된 세계무역센터보다 더 높은 빌딩을 지어 미국의 힘을 과시하자던 부동산 프로모터들의 제안이 ‘그라운드 제로 프로젝트’로 변경돼 애초의 상업적 공간들이 희생자들의 추모와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거듭났다. 특히 피해자의 가족들을 토론자로 참여하도록 해 사회적 의미를 더했다. 희생자 가족의 참여는 현대 민주주의 절차에 각인된 참여와 숙의가 사회적 트라우마를 집단으로 치유하는 제례祭禮(ritual)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 너무도 다양한 갈등이 표출되는 지금 시민의 직접 참여를 보장할 수 있는 법적 장치 마련해 갈등관리 나서야 "

2007년 뉴올리언스 카트리나 피해 복구를 위한 재건계획 사례도 특기할만하다. 2005년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로 뉴올리언스는 1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주택의 70%가 유실됐다. 18개월이 지나도록 주민 중 50%가 복귀하지 못하는 와중에 당시 주지사의 발표한 재건계획이 주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자 대안으로 내놓은 것이 타운 홀 미팅인데, 이것이 시민 스스로 지역발전계획을 수립하는 계기가 돼 시민을 하나로 묶어내게 됐다. 여기에 참가한 4천 명의 대표자가 독자적인 재건계획안을 만들고, 참가자의 92%가 찬성하며 2007년 6월 뉴올리언스 시의회가 이 계획을 승인함에 따라 14억 5천 달러의 예산이 시설복구 사업 등에 투입됐다.

해법 2 : 민·관 파트너십을 통한 협력적 문제해결
한국 지자체의 공공갈등은 전방위적이다. 님비(NIMBY) 갈등이든 핌피(PIMFY) 갈등이든, 또는 정책갈등이든 거의 모든 영역에서 민·관의 대립이 빈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할 것도, 놀라울 것도 없다. 공적 갈등에서 공공갈등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증가하는 것은 모든 나라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된 현상이다.

근대에서 현대로 이행하며 강화된 생체권력[bio-power : 프랑스의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인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현대 권력이 통제하고 규율하는 것은 정신이나 영혼이 아니라 몸이라는 사실에 주목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욕망을 과학적 지식으로 충족해주며 제도와 체제에 복종하게 하는 것]이 개인의 몸이라는 미시적 사회조직 깊이 침투함에 따라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도 증가하는 것이 당연하다.

가장 최근의 예로 코로나-19를 보자. 현대 권력은 더 이상 어떤 신민臣民도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다만, 현대 한국의 공공갈등은 과거 개발 독재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정부의 일방적인 의사결정 때문도 아니고, 서구 복지국가의 경우처럼 국가의 개입 범위가 무한정 확장되기 때문도 아니다.

한국의 공공갈등은 오랫동안 공식적인 의사결정과정에서 소외된 채 공공서비스의 ‘소비자-고객’으로 남겨졌던 일반 시민이 의사결정의 주체로 개입하고자 할 때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시기를 거쳐 지방화 시대에 진입한 우리 국민은 정당과 의회를 경유하는 전통적인 대의민주주의 시스템보다 직접 참여를 통해 자신의 권리를 구제하는 것에 더 익숙해졌다.

미래의 공공갈등을 예방하고 해결할 수 있는 즉각적인 해법은 자명하다. 민·관 파트너십에 기초하는 협력적 거버넌스(collaborative governance)의 제도화와 우리 정부의 정책조정 기능, 그리고 갈등 조정 기능의 강화가 답이다. 즉, 행정 시스템 내에 다양한 갈등관리 장치를 구축해 공무원 스스로 갈등관리에 임할 수 있는 적극 행정의 기제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미국의 대체적 분쟁해결제도(ADR)가 단적인 예다. 행정분쟁해결법, 협상에 의한 규칙제정법, 대안적분쟁해결법 등을 기반으로 창설된 분쟁해결실(법무부), 갈등예방 및 해결센터(농림부, 환경보호청), 지역사회 갈등해결센터(주정부) 등은 소송 대신 제3자에 의한 조정(mediation)과 중재(arbitration)의 길을 열어 정책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이해관계자 간의 갈등을 예방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일본 역시 ADR법을 제정하고 국지방계쟁처리위원회[國地方係爭處理委員會] 등의 갈등관리 전담기구를 통해 공공갈등을 해결하고 있다. 독일, 프랑스, 덴마크 등 서유럽 국가들도 예외는 아니다. 여기에서 갈등관리는 단순히 지방 사무에 또 하나의 행정절차를 덧붙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방과 중앙 모두에서 기본원칙으로 자리 잡은 효율성 중심의 행정 패러다임을 민주성이 장착된 효과성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새로운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행태와 문화가 뒷받침되지 않는 개혁은 사상누각이라는 주장이 많다. 옳은 말이다. 그러면 그 행태와 문화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역설적이지만 행태와 문화를 교정할 수 있는 것도 법과 제도다. 법과 제도는 이상적 규범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게임 규칙으로 작동하며 행위맥락과 거래비용에 대한 행위자들의 인식과 전략적 선택을 제약해 행태와 문화를 교정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기능한다는 신제도주의(neo-institutionalism)의 주장을 경청해야 한다.

역사적 변화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새롭게 하며 신제도주의의 물꼬를 튼 노스(North, 1990)다. 그는 첫째, 제도의 본질과 경제성장 및 사회발전에 대한 제도의 영향을 분명히 했다. 제도가 경제성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시간이 가며 점차 드러나는 국가별 경제 발전의 차이가 근본적으로는 제도가 진화하는 방식의 영향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리고 둘째, 점진적 제도변화가 현재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경로의존성(path dependancy)으로 개념화하며 제도변화 이론을 구축했다. 노스에 따를 때, 제도변화는 긴 시간을 두고 사회가 진화하는 방식을 규정하므로 역사적 변화를 이해하는 열쇠다. 역으로 말하면 제도적 변화를 통해서 사회적 진화를 추동할 수 있으며 그것이 비록 경로의존성이 강한 온건한 변화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사실 민주주의의 제도변화를 통해 국정운영의 제 방법을 바꿈으로써 현대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상당수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 은재호, 2022, 『공론화의 이론과 실제 : 건강한 공론형성과 진단을 위한 길라잡이』, 서울, 박영사, p.27 -

은재호 한국행정연구원 행정한류공공리더십연구실장
은재호 한국행정연구원 행정한류공공리더십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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