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정책제안

정치 행정관계 어디쯤 가고 있나
“대통령은 왕이 아니다.” 2021년 11월 10일 미연방법원 판사의 판결문은 “연방판사가 트럼프에게 법치와 헌법을 능가할 수 없다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 CNN, 2021년 11월 10일 자 -

작금의 상황을 보면, 대한민국 정부 출범 이후 그 어느 정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정치에 의한 행정 지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현 정부는 박근혜 정부의 제왕적 청와대 지배를 종식시키고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고 공언했으나, 기대와는 달리 정부 출범 이후 가장 심각한 공공행정지배에 몰입하는 제왕적 청와대로 변신했다.

이 과정에서 계층, 이념, 지역, 세대 갈등이 다시 증폭되고 있으며 이를 치유하고자 하는 정치 리더십은 실종됐으며 오히려 갈등을 이용한 정치적 노림수, 포퓰리즘, 인치주의가 흥행하고 있다. 과거 정권 시대에도 이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국민통합을 위한 정권 차원의 노력이 대통령을 중심으로 시도됐다. 과거 어느 정부에서든 선거로 인한 정치적 갈등이 국민 통합에 부적절하다는 인식하에 최소한의 정치적 노력은 있었다.

기억을 소환해보자. 이승만, 장면, 박정희,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는, 국민통합이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이슈가 됐고, 대통령의 국민통합 중요성 언급, 무임소장관, 정무장관, 특임장관, 여야협의, 국민통합을 위한 조사와 갈등 해결방안 모색 등이 빈번히 언급됐다. 행정학계에서도 국민통합, 갈등 조사와 해결방안 등에 대한 각종 세미나와 발표 등이 개최된 것을 상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 들어서도 초기에는 반대의 수용, 통합의 중요성이 언급되다가, 집권 중반기 이후 여야가 대립이 심각해지면서 이를 타협과 협상으로 극복하려 하기보다는 편 가르기로 돌파하려는 시도가 생기고, 그 결과 정당정치는 실종되고, 진영의 동원, 제왕적 대통령 지배현상으로 변질됐다. 이는 양 대통령의 개인적 리더십 스타일, 정치역량에 기인하는 바 크지만, 대통령의 방관하에 청와대 내부 서클의 ‘대통령 인기몰이를 위한 이념적 정책지배의욕’이 빚어낸 현상이기도 하다.

대통령은 전제정권 시대의 왕이 아니며, 법치주의에 따른 절차를 무시하고 군림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청와대는 원전 폐쇄를 밀어붙이기 위해 법적 행정적 절차를 무시하고 산업자원부를 압박해 원전을 폐쇄하고, 감사원의 원전 감사 내용을 문제 삼아 자신이 임명한 감사원장조차 사표를 내는 초유의 사태를 초래했다. 조국 사건을 수사하는 검찰을 검찰개혁 명분으로 압박하고, 뜻대로 되지 않자 공수처를 급조했으며, 소득주도성장을 내세워 경제부총리를 경질하고 기재부의 재정 운용 의견을 묵살하며, 돈 풀기정략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과거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념적 편견, 포퓰리즘, 무지, 전문가 배제, 행정예속화로 이어지면서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권력 비리, 선거비리, 특혜 비리에 대한 수사를 하려는 검찰을 압박하고 이에 저항하는 검찰총장과의 극단적 대립을 통해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법치주의를 위협하는 시도를 강행했다.

청와대의 권력 독점 야욕, 이념적 편향, 인기몰이 치중, 내로남불, 인치주의 집착이 빚어낸 참사가 현 정권의 제왕적 대통령제를 숙성시킨 것이다. 게다가 집권 여당은 제왕적 대통령의 수족으로 변신해 청와대 일방주의를 거들고 있다. 이는 국회 본연의 독립적 정책결정 기능을 스스로 포기하고 구태 정치를 그대로 답습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서, 대통령을 견제해야 하는 삼권분립제도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이다.

제왕적 대통령이 만들어 낸 예속 행정
정부관료제 비대 현상과 권력화 현상을 막기 위한 ‘민주적 통제, 책임성, 공직윤리, 부패통제, 정부혁신 등’은 지난 수십 년간 행정학계의 주요 이슈였다. 비대해진 관료제의 권력 남용, 직무유기, 부정부패에 대한 정치적 통제- 대통령, 국회, 시민사회의 통제-는 물론이거니와 행정개혁, 중립적 능력 확보, 전문성 향상, 행정 효율성, 책임성 확보 방안 등은 행정학계에서 늘 등장하는 단골 논제였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이런 주제들은 행정계의 관심에서 벗어나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 치하에서 행정은 정략적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 전락되고 있으며, 정권에 예속된 행정은 ‘길들여진 소’처럼 지시수행에 눈코 뜰 새가 없게 됐기 때문이다. 덕분에 공무원들은 행정개혁, 정부혁신, 공무원 축소라는 정치적 위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상황에서 행정학은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성찰을 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권력에 부화뇌동하는 관변학으로 전락할 것인가, 아니면 진실과 정직한 열정으로 제왕적 대통령에 예속돼가는 행정을 비판하고 새로운 길을 제시해볼 것인가. 정답은 당연히 후자여야 한다.

다시 정치행정관계의 시각에서 보자. 윌슨은 ‘정치는 민주적으로 가치를 정하고, 행정은 효율적 집행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한다. 반면 ‘정치는 정책결정과정에서 행정부 의견을 반영하고, 행정은 집행과정에서 정치권의 요구를 반영한다’는 정치행정일원론의 시각도 매우 현실적이다. 그런데 현 상황에서는 ‘특정 정치세력의 독단적 처사에 따라 공공행정이 유린되고 예속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윌슨 대통령의 정치행정이원론 주장에 눈을 돌리게 된다.

‘정치는 결정하고 행정은 집행한다’ 정치행정 이원론의 주장이다. 정치의 오염으로부터 행정의 중립성, 전문성, 효율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정치와 행정은 현실적으로 깊게 연결돼 있기 때문에, 정치과정에서는 행정의 집행 가능성, 전문성을 반영해 법과 정책을 만들고, 행정은 집행과정에서 정치적 개입을 일정 부분 수용한다는 것이 정치행정일원론이다. 과거 정부의 정책결정 집행과정은 대부분 정치행정일원론적 시각에서 고찰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청와대 주도의 일방적 가치결정과 하향식 지배구조로 인해 행정 예속 현상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삼권분립에 따른 국회 중심의 정당정치는 사라졌고, 기획재정부의 예산재정 주요결정, 여타 정부부처의 주요 결정이 청와대의 요구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진행된다. 지배와 예속의 수단은 각종 정부기구와 공공기관 임원 임명권과 인사권을 활용한다.

능력과 전문직을 고려해 공정하게 심사하겠다는 혁신인사처의 공고를 믿는 사람은 없다. 관직은 정권의 노획물(spoils)로 정착됐고 지원자는 대부분 전문성 능력에 관계없이 정권봉사 기여도에 따라 임용된다. 이런 상황에서 청와대가 결정한 정책에 대해 행정부 내에서의 다른 의견의 개진이 가능할까.

기획재정부, 검찰은 물론이고 법무부, 국토부, 교육부등 각종 행정부서에서 전문 실무 관료들의 다른 의견이 장·차관과 국장급 이상 공무원들에 의해 수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청와대, 정부기관장, 인사부서, 감찰부서로 이어지는 하향식 지배구조에서 상향식 정책결정이나 자율성, 다양한 제안 의견이 수용될 가능성은 없다.

청와대의 이념적 기능집단이 정책결정을 하게 되면 그 아래의 실무부서들은 시키는 대로 집행만 하게 돼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공공행정의 현주소이다. TOP-DOWN만 있고 BOTTOM-UP은 없는 행정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진면목이다.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행정지배 현상을, 정치행정일원론, 이원론에 하나 더 추가해 ‘정치행정예속론’이라 부르고자 한다.

공공행정의 현주소 : 행정의 중립적 능력과 창의행정의 실종
잘 알아야 할 것은 윌슨은 행정의 수월성, 전문성이 효과적으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정치적 가치결정이 반드시 민주적 절차를 통해 결정돼야 한다는 것을 전제했다는 점이다. 즉 삼권분립 체제에서 정당정치의 산실인 의회민주주의와 정당정치가 견실하게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민주적 지배구조를 우선시한 것이다. 대통령은 가치결정, 정책결정에 있어 또 다른 정치 주체로서 정치적 제안을 할 수는 있지만, 의회민주주의, 정당정치의 타협과 협상을 존중해야 한다.

삼권분립은 제왕이 의회와 사법부를 전면 장악하는 권력 탄압 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창안된 근대 민주주의의 든든한 반석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런데 21세기 들어서서, 대통령책임제의 대통령은 제왕과 같은 지위와 권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푸틴, 트럼프, 두테르테 등이 대표적인 삼권분립과 법치주의 위에 군림하는 대통령들이다.

우리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으로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우선적으로 존중하는 것이 헌법적 의무이다. 대통령은 국회에서의 정당정치가 잘 실현될 수 있도록 존중함으로써, 국민이 선출한 의원이 만든 법률과 정책을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잘 이행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이와는 정반대이다. 대통령이 요구하고 여당이 관철시키는 주종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실로 이것은 의회민주주의의 기본에 어긋나는 master president-servant congress 관계인 것이다. 입법부를 지배하는 대통령 중심제, 공공행정의 중립성과 전문성을 위협하는 대통령중심제, 사법부를 지배하려는 대통령 중심제는 제왕을 대신하는 제왕적 대통령 중심제로서 민주주의를 포기한 것과 같다.

공공행정이 가야 할 길은 분명히 제왕적 대통령제의 노예행정이 아니다. 공공행정의 주인은 principle/master인 국민이고, 공무원은 대통령의 servant가 아닌 국민을 위한 봉사자임은 헌법정신과 민주주의 원리에서 극명해진다. 행정학은 물론 여타 사회과학에서도 국민과 정부관료제의 역할은 주인 국민과 대리인 공무원의 관계 principle-agent를 전제로 한다.

제왕적 대통령과 청와대의 실무자들은 더 이상 행정을 정치로 오염시켜서는 안 된다. 대통령이 행정부의 수반이라는 이유로 공무원을 예속라고 국민이 대통령에게 허락한 것이 아니다. 공공기관에서 대통령의 지시는 절대지존의 가치로 설정되고, 임명직 행정부서의 장은 차 상위 지존이 되며, 대통령 지시사항의 이행 여부는 공공기관 평가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위로부터의 지시와 요구 속에서 공직자들은 공무원으로서의 자기 창안, 기획 능력, 자기 발전, 전문성 개발을 위한 시간과 기회도 없이, 상부로부터 주어진 과제해결을 위해 ‘영혼 없는 공직자’로서 일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무엇을 해야 하나
한국의 대통령 중심제는 삼권분립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정치 갈등이 심해질수록 더욱 더 제왕적 대통령제로 이행할 가능성이 매우 크
다. 대통령 중심제가 제왕적 대통령지배체제로 변질될 수 있는 이유와 부작용을 명제로 제시하면 <표 1>과 같다.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는 국회에서의 정당정치 실종은 물론 사법부의 독립적 판결마저 위협하게 된다는 점에서 삼권분립 민주주의 정신에 정식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고착될 경우 행정부의 수반인 제왕적 대통령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 행정의 전문성과 고유성을 무시하고 고위직 공무원을 정치적 충성도에 따라 엽관주의식, 정실주의식으로 임명해 하향식 정책요구에 순응하도록 공무원을 길들이게 된다.

순종적으로 길든 공무원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수도 능력을 발휘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행정학계와 주요 행정 리더들이 나서서 제왕적 대통령이 남용하는 행정통솔권을 견제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행정학계와 행정실무계의 풍토로 볼 때,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비판과 대책을 제시할 수 있는 강단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주체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다. 행정학이 -관변학으로 변질되지 않고- 자생력 있는 학문으로 존립하기 위해서는 비판의식으로 각성된 학자와 행정가들이 공공행정의 예속화로 인한 폐해를 지적하고 행정의 정치적 중립, 중립적 능력, 독자성, 전문성, 창의행정을 확보할 수 있는 진정성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

아울러 행정개혁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행정의 지속적 개혁은 국민에 대한 효과적이며 반응적인 봉사-정권에 대한 봉사가 아닌-를 위한 최소한의 예의 표시이고 행정의 자생력을 확보하는 통시대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공공행정을 제왕적 대통령의 시녀나 들러리 정도로 생각하는 이 시대의 과오가 더 이상 되풀이돼서는 곤란하다. 공공행정은 행정학자와 행정가들이 살아가는 토양이고 숲이며 생태계이다. 제왕적 대통령과 그 아류들로 인해 노예행정이 지속된 다면 행정가와 행정학의 생태계는 황량한 사막이 될 것이다.

정치권의 광기 어린 극한 대결, 대통령과 청와대 측근의 인기 영합, 시혜주의 사고, 정당공천을 매개로 한 국회의원 지배, 법치주의 문화의 부실, 지역갈등과 계층 갈등 선동, 기회주의, 이기주의 등이 어울려 만들어 낸 작품이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괴물’이라 할지라도 행정가와 행정학자들은 비판의 눈을 똑바로 뜨고 국민을 위한 행정이 구현될 수 있도록 그 사명을 다해 주었으면 한다.

전영평 대구대학교 도시행정학과 명예교수
전영평 대구대학교 도시행정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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