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정책제안

이어지는 위기와 재정의 역할
포용재정은 건전재정이라는 특정한 방향성을 가진 재정 운용이 한국의 사회발전에 기여하지 못하고 경제의 지속적 성장에도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는 연구자들이 대안적 개념으로서 제시하고자 하는 재정정책을 말한다. 재정은 자원의 효율적 배분, 소득의 공평한 분배, 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순조롭게 해 국민의 복리를 증진시켜야 한다. 이러한 재정의 기능은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통상적으로 더 적극적으로 요구된다. 코로나 경제위기로 어려운 시점에 재정의 적극적이고도 포용적인 역할이 부각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금융위기 이후 십여 년 만에 세계는 코로나 위기를 경험하고 있고 오래전에 시작해 진행형인 기후위기는 과연 극복이 가능한지, 우리에게 얼마큼 희생과 자원 투입을 요구할지도 가름하기 어려운 인류 최대의 위기이다. 위기는 일상화되고 그 극복은 사람들에게 사는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경제의 운영방식에 대해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시장경제의 가르침은 개인적 주체를 강조하지만 개인은 태생부터 공동체 속으로 던져진 존재이다. 개인의 자유는 공동체의 이웃에 의존돼 있고 그 속에서만 누릴 수 있는 제약적인 성격의 것이다. 간과됐던 이러한 속성이 위기들의 극복 과정에서 부각되고 있다. 전염병이나 기후변화에 개인적 선호에 따른 대응은 작동하기 어렵고 공동체 속에서 공조된 대응이 해법이다.

전염병과 기후위기, 그리고 부동산 위기가 양극화를 심화시킨 것은 분명하나 이러한 위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심각한 소득 및 자산 배분의 쏠림현상을 목도하고 있었다. IMF 위기 이후 기업이 수익성에 집중하면서 고용을 줄고 근로자의 비정규직화는 심화됐다. 국민소득에서 근로소득의 비중은 줄고 기업이윤의 비중은 늘어갔다. 이 추세가 오래 계속되면서 분배의 위기가 경제의 지속가능한 성장의 중요한 장애 요인임을 사람들은 알아차리게 됐다.

성장과 분배가 상충적인 관계에 있지 않고 상호보완적이라는 것을 경제학자 피케티가 잘 지적했다. 시장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면 경제활동의 가치에 대해 시장으로부터 낮게 평가받는 이들도 복지제도를 통해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고 자녀들을 미래에 경제가 필요로 하는 인적 자원으로 육성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경제가 지속 성장하도록 하는 게 재정의 역할
기후나 분배의 위기가 시장경제체제 자체에 연유하느냐 혹은 외부적인 문제이냐는 답을 내리기 어려운 주제이나 그 극복을 위해 재정의 역할이 지대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지난 세기 80년대와 90년대의 경제학계의 주류적 사고는 재정정책이 GDP와 고용의 증대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그러한 시대는 지나갔다. 거시경제정책의 수단으로서 통화정책은 경기부양 수단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오히려 자산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부정적인 효과만 노출했다. 코로나 경제위기에서 주요 선진국은 우리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국가부채율에도 과감하게 확장적 재정정책을 사용했다. 재정건전성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국민경제가 더 나은 상태로 발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언제부터인가 건전재정론과 최소한의 과세가 최적과세라는 사고가 지배하고 있어서 재정이 국민경제에서 본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나라 살림이 건전재정의 틀에 갇히는 경우 불평등의 심화는 물론, 성장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 코로나 경제위기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고 미래사회를 향한 구조변화도 여러 층위에서 이뤄지고 있다. 구조변화를 위해 필요한 사회적 투자를 재정이 맡아야 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사회안전망도 충실하게 쌓아 나아가야 한다.

국가경제에서 재정은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데, 우선 재정은 그 규모의 조정을 통해 국민경제에 영향을 준다. 재정지출이 커지고 넓은 분야에서 사용되면 재정을 통한 국가의 활동이 국민 삶의 어려운 부분을 살펴주는 역할을 더 많이 할 수 있다. 재정의 포용성이 증가하는 것이다.

거시경제적으로는 기업이나 가계의 투자나 소비가 위축될 때 정부가 소비나 투자를 늘려서 국민경제의 균형을 찾아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정부, 기업과 개인이 개별 경제주체로서가 아니라 전체로서 국민경제적 관점에서 소비와 저축, 투자를 적절한 수준으로 행하는지, 그것이 지속 가능한 성장에 부합하는지가 중요하다. 가계가 저축을 많이 하고 소비를 하지 않으면 정부가 가계에서 빌려서 소비를 해주고 경제 전체의 수요를 늘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경제위기에서 실업 및 매출 감소로 소득이 부족한 가계가 많아지면 가계부채가 늘게 되는데 정부가 재정을 통해 소득을 보전하거나 일자리를 만들어 가계를 도우면 가계부채 대신에 정부부채가 늘어난다. 재정적자나 국가부채 비율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경제가 지속 가능한 성장 추세를 이어가는 것이다. 재정의 규모를 늘리는 것이 그 자체로 바람직하거나 목적이 될 수는 없지만 지속 가능한 성장과 거시경제의 균형을 찾는 과정에서 재정의 규모는 결과적으로 커질 수 있다.

커지는 재정 규모에 대해 우리 사회의 일각에 우려의 시각이 존재한다. 재정준칙을 통해 재정 규모를 일정 한도 내에 묶어보려는 시도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재정이 본연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재정준칙을 통해 우리의 정책적 선택영역을 미리 좁혀둔다면 자기 발에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것이다. 재정준칙의 규범성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라고 할 수 있는 적정한 국가부채 비율의 수준 같은 것은 이론적으로도 그리고 경험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밝혀졌다.

경기대응정책으로는 거시경제의 균형을 통상 고용상황에 비춰 판단한다. 실업이 늘고 일자리가 부족하면 경제 전체의 수요가 부족한 것으로 보고 통화정책이나 재정정책을 통해 수요를 늘려주려고 노력한다. 경기대응정책이 단기적인 시계에서 운영되는 정책이라면 장기적인 시계에서는 성장과 경제혁신이 중요하다. 기업의 생산성 향상과 품질혁신을 통한 경쟁력 확보가 지속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고용유지가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혁신에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시각도 크게 변했다. 주류경제학에서는 혁신은 민간기업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보고 단기적 경기변동에 대한 대응을 국가의 주된 역할로 보았다. 반면 최근에는 국가의 역할이 민간의 혁신을 유인할 수 있고 장기적인 성장에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마추카토(Mariana Mazzucato) 같은 경제학자는 국가가 혁신과 공공가치의 창출을 주도해야 한다고 본다. 단기에서 장기로 정책 운용의 시계가 바뀌고 경기 대응과 같이 성장과 혁신에도 국가의 역할이 꼭 필요하다면 재정정책의 수단으로서 재정의 규모뿐 아니라 재정지출의 구조와 내용도 중요해진다.

포용적 재정 역할 강화하고, 재정분권 이뤄야
오랜 기간 우리 정부는 복지 분야보다 기업이나 경제지원에 재정에 큰 부분을 사용했었다. 특정 정부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현재에도 OECD 평균 수준에 비춰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을 경제와 산업지원에 사용하는 반면 낮은 비율을 복지 분야에 지출하고 있다. 국가는 혁신을 주도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것인가?

국가가 혁신을 일으키기 위해 재정을 사용하는 것과 기업과 산업을 위해 투입하는 것을 잘라내듯이 구분해내기는 물론 어렵다. 그러나 두 가지는 다른 것이다. 혁신은 긍정적 외부효과를 유발할 수 있는 투자대상을 선정해 국민의 세금을 사용하는 것이다. 조세 및 재정의 인센티브 체계가 작용해 그렇지 않았으면 기업이 하지 않았을 투자를 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국내기업의 국제경쟁력 향상과 고용의 증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반면에 기업이 어차피 그들에게 이익이므로 계획하고 있는 투자에 대해 세금혜택을 부여하는 것은 국가의 세수감소에 비해 추가적인 긍정적 효과가 없으니 단순한 세금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업지원 관련 조세정책의 현실은 어디에 해당하는가? 제도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운영 현실에서 볼 때 우리의 조세감면은 기업의 혁신적 투자를 유발하지 못하는 구조이다. 지원대상의 선정과정에서 기업이 요구하고 정부가 수용한다면 기업은 당연하게 그들에게 이익이 되고, 그러므로 투자하려고 내심 계획하고 있던 투자대상을 지원해달라고 제안할 것이다.

재정지출이 포용성 관점에서 유효하기 위해는 복지, 노동, 교육 등 분야에서 사용하는 재정의 비중이 크지 않으면 곤란한 반면, 혁신성장을 위해서는 재정 규모를 키울 필요가 없다. 재정의 큰 부분은 포용적 경제를 위해 국민의 복지에 사용하더라도 기업과 경제를 위해 사용하는 재정의 작은 부분을 혁신적 행위가 유발되도록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제위기에서 재정지출이 늘어나면 늘어나는 지출 규모의 일정 부분은 세금으로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더욱이 우리는 시민에게 제공하는 복지혜택을 현재의 낮은 수준에서 OECD 국가의 중간수준으로 높이려는 단계에 있으니 조세부담률의 점진적 증가는 피할 수 없다. 조세부담률의 증가는 여러 가지 세목들로 구성된 조세체계에서 큰 변화가 이뤄지는 것을 말하는데 개별 세목들에서의 세율 인상, 과세표준 구간의 변동, 그리고 세목 간의 세수 비중의 구조변화가 이뤄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세수입의 증가뿐 아니라 세 부담의 공정성도 제고돼야 한다.

심각한 수준의 자산 및 소득의 계층적 편중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서 조세정책이 더 유용하게 사용될 필요가 있다. 조세는 기본적으로 재원 조달의 재정적 기능을 위해 존재하고 그 외에 환경정책, 부동산정책 등의 필요성에 따른 정책적 기능도 잘 수행해나갈 수 있는 수단이다. 이 재정적 기능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세금의 부담을 납세자의 경제적 능력에 상응하도록 공정하게 배분함으로써 소득 및 자산의 형평성을 바로 잡아나가야 한다. 부동산, 주식 등 자산의 가격이 크게 상승하고 자산소득도 크게 늘어났지만, 조세제도는 이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재정은 그 중요한 주체로서 중앙정부 이외에 지방정부와 공기업 등 공공기관이 있다. 재정지출과 세금 등 재정수입에서 이 주체들의 역할은 구분된다. 중앙정부 산하의 공기업과 지방공기업은 각각 소속되는 정부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므로 재정정책적인 방향 전환이 필요할 경우 공조가 가능하다. 다만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에는 재정정책적인 공조가 잘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중앙정부의 세수입이 예측보다 많은 경우 일정 비율을 지방정부에 교부금으로 나눠줘야 하는데, 이 재원의 사용 속도가 늦고 상당한 시간 동안 지방정부의 은행 계좌에 잠겨 있다면 재정의 적극적 운영이 필요한 시기에 바람직하지 못하게 작용할 수 있다. 그렇다고 지방정부가 재정지출에 대해 중앙정부의 관리를 받는 것은 재정분권에 역행하는 것이므로 지방정부가 주체적으로 국가경제 전체와 지역 주민의 경제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경제상황을 고려하고 판단해 행동을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포용재정의 관점에서 볼 때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보건, 교육, 문화생활 등에서의 생활 여건의 격차를 줄여주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시급하게 필요한 것으로 보이며 그러기 위해 재정의 분권화가 더 강하게 이뤄져야 한다.

김유찬 홍익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김유찬 홍익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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