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걸/사랑받는 그
순간보다 흐뭇한 건 없을 걸/…혼자선 알 수 없는 야릇
한 기쁨/천만 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사랑해…

굳이 연인 사이가 아니어도, 사랑의 언어는 언제 들어도 사랑스럽다. 오래 된 어느 노래 가사처럼 “천만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이다. 가까운 남녀 간에 가볍게 던지는 인사치레는 물론 전화로 들려오는 상담원의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란 비즈니스의 ‘사랑의 언어’마저 딱히 듣기 싫지는 않다. 사랑의 말을 듣는 사람의 느낌이 그렇다면, 반대로 사랑을 속삭이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 또한 기분이 좋다. 사랑을 말하는 사람의 표정이 험하거나 일그러질 리가 없지 않은가. 최소한 그 순간만이라도 사랑의 언어는 그 사람의 존재가 사랑임을 드러낸다.

언어를 통해 표현되는 사회
본의 아니게 사랑 타령을 했지만 어디 사랑의 언어뿐일까. 남의 슬픔을 가슴으로 위로하는 말은, 위로하는 사람마저 위로받게 만든다. 기쁨에 들떠 소리치는 아이의 외침은 모두에게 미소를 선사한다. 환희의 언어, 위로의 말, 기쁨의 소리는 일상의 시간들을 환희와 기쁨의 세계로 변모시킨다.

이와는 반대의 세계도 있다. 피고에게 판결하듯 타인을 헐뜯고 단죄하는 ‘판사의 말들’이 난무하는 경우다. 이런 말들은 주위를 어둠으로 몰아넣는 것은 물론 말하는 ‘판사’ 본인마저 미움과 분열의 주인공으로 만든다. 신의 구원을 빙자해 신도는 물론 신마저 짓밟는 사이비 목회자의 말, 정의의 이름으로 정의와 공정을 해치는 정치인과 법조인들의 언어, 조회 수를 통한 수익창출을 위해 거짓선동과 분열을 부츠기는 정치 유튜버들의 언어들이 한 여름 매미나방처럼 언어의 숲을 황폐화시키기도 한다. 그런 사회는 늘 시끄럽다.

‘사회가 시끄럽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굳이 철학을 들먹이지 않아도 일상적인 말 혹은 언어는 한 사회를 충실히 반영해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론 언어를 통해 사회와 세계를 남김없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가 실재 세상에 대한 이해에 핵심요소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 바로 세계”라고 단언한다. 따라서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이다.

다시 말해 언어와 세계에는 공통된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세계와 언어는 동전의 양면처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으로서 언어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 바로 세계라는 생각이다. 나의 세계는 나의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며 정치인의 세계는 정치인의 언어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고 주민자치는 주민들의 언어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언어는 개인, 사회의 실재세계에 대한 그림이라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세계가 미리 독립해 존재하고 있고 언어는 거기에 첨부되고 있다는 착각을 하기 쉽지만 사실은 세계 자체가 언어이다. 따라서 우리가 언어화하고 있는 것[명제]은 모두 상(像)을 갖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이 세계의 논리공간의 구조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사상寫像, 이론)이다.

언어를 보면 ‘너’가 보인다
언어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 사회라면 인간 개개인의 존재 역시 언어를 통해 표현된다. 깊어가는 가을, 때 아닌 정치 지도자의 욕설 파문은 언어가 개인의 존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참담한 성찰을 하게 한다.

흔히들 언어는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말한다. 언어학자 촘스키의 말대로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언어가 곧 인격이란 상식적인 생각을 철학적으로 치밀하게 파고들어 인간만이 지닌 마법과도 같은 언어의 특질을 파헤친 철학자가 독일의 마르틴 하이데거이다.

비트겐슈타인과 동갑내기인 하이데거의 언어에 대한 철학은 비트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의 철학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라는 하이데거의 말은 그리 낯설지 않다.

그러나 이 말의 본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하이데거가 추구한 언어는 존재자를 규정하는 언어가 아니라 존재세계를 지시하는 존재언어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언어(Sprache)’는 통상적인 말이 아니라 존재자체와 근원적으로 연관되는 근원적인 언어를 의미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근원적인 언어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하이데거의 언어철학을 포착하기 위한 필수조건이 된다. 특히 근원어로서의 ‘말(Rede)’과 관련된 이해와 해석, 그리고 발언에 대한 하이데거의 예리한, 그러나 난해한 논의를 함께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본란에서는 이런 논의는 차치하기로 한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말하는 자로서 존재한다.” 정말 그렇다. "인간은 말한다(spricht). 우리는 깨어 있을 때도 말하고, 꿈속에서도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말한다. 우리가 아무 말도 소리 내지 않고 경청하거나 읽을 때에도 우리는 말하며, 심지어 특별히 경청하거나 읽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어떤 일에 몰두하거나 한가로이 여가를 즐길 때에도 우리는 말한다."(『언어로의 도상』의 첫 장 ‘언어’에서)

따라서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나란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Ort)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어떤 장소로 규정할 경우, 나란 존재는 그 언어 안에 거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의 언어는 나란 존재가 머무는 장소이기에 나는 그 곳에서(언어를 통해) 세계와 사물을 인식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 한국인은 아마도 유럽인이나 아프리카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집에 거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와 다른 언어 문화권의 사람들은 각각의 언어를 통해 존재를 서로 다르게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는 단지 타인들과의 의사소통의 수단 혹은 자신의 내면적 정서를 표현하는 수단을 넘어서 나의 사유를 지배하고 복속시킨다. 그러니 내가 언어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언어가 나를 부리는 격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마치 자신이 언어의 창조자이고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은 언어가 인간의 주인(master)으로 군림하고 있다’고 말한다. 언어가 존재의 근원이자 존재의 집이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말이 이해가 안 된다면 시각적으로 ‘언어가 존재의 집’인 상황을 그려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물론 언어와 존재가 개별적으로 존립하면서 집이 집 안 사람들을 감싸듯이 언어가 존재를 공간적으로 감싸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란 점을 기억하자. 하지만 이해를 위해 집이란 건물이 언어이고 나는 그 집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침 산책을 하기 위해 숲 속으로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자. 먼저 나란 존재는 ‘숲’이라는 언어[집]를 통과해야 숲 속으로 갈 수가 있다. 물론 숲이란 낱말을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아도, 혹은 언어적인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더라도 나는 숲이란 언어를 통과하여 나의 존재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천만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사랑해’를 말하는 연인의 존재는 ‘사랑해’라는 언어란 집을 통과해 밖으로 나올 때 비로소 드러난다. 비록 사랑한다는 말이 없이 눈빛과 미소로 대신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천 냥 빚을 갚는 말 한 마디
존재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언어란 집을 나설 때이다. 그러니 언어라는 집이 어떠하냐에 따라 집 밖으로 나온 사람의 존재가 어떠한지 평가된다. 진심어린 사랑과 존경, 공감과 배려, 정직과 정의의 언어란 집을 통과한 사람은 듣는 이에게 사랑과 존경, 믿음을 선사한다. 그런 언어를 쓰는 사람은 얼굴조차 평온하고 인자하며 자신과 확신이 서려있다.

반면에 정치적인 목적과 의도를 바탕으로 마음에 없는 위선적인 사랑과 자유, 공정의 언어란 집을 나선 정치인은 듣는 이에게 감동은커녕 공허한 씁쓸함만 남겨 놓는다. 심지어 비속어나 욕설을 거침없이 내뱉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증오와 분열의 언어는 그 사람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며 언어의 메시지는 실종된 채 듣는 이에게 동일한 증오의 감정을 전달할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이나 하이데거는 우리가 별다른 고민 없이 사용하는 언어가 이렇게도 인간 존재와 심오한 본래적 관계가 있음을 분석한다. 흔히 생각하는 대로 언어가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그 자체로 나의 존재와 근원적으로 연관되는 것이란 점이다.

그렇다고 언어의 도구적 성격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먹고 살기에 급급한 소시민들에게 ‘언어는 근원적으로 인간의 말이 아니라 존재의 말, 즉 인간의 현상이 아니라 존재의 현상’이란 설명은 일상과는 관계없는 지나치게 현학적이며 추상적인 말의 유희로 치부될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비트겐슈타인이나 하이데거의 언어관은 일반인들에게 ‘나의 언어는 나란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란 일반적 믿음에 대한 철학적 확신을 더욱 공고히 해 준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러한 철학적 확신은 언어의 도구적 성격과도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님은 일상의 경험에서 입증된다. 사례 하나를 들어보자.

일자천금(一字千金),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다. 반대로 말 한 마디로 빚을 갚기는커녕 천 냥 빚을 더 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언어를 통해 상대방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개인 간 혹은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하이데거의 존재의 언어는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상대방의 정직한 언어는 비즈니스 자체를 정직하게 만든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과거 항공기 제작사인 더글러스와 보잉사가 최초의 대형 제트 여객기를 이스턴 항공사에 팔기 위해 경합을 벌였다. 에디 레켄배커 이스턴 항공사 사장은 평가결과 더글러스사를 낙점했다. 다만 소음방지 장치가 미흡하니 보잉사보다 더 우수한 소음방지 장치를 달아 주겠다는 약속을 할 수 있는지를 답장해 달라고 말했다. 더글러스의 답장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 회사의 기술자들에게 조회해 본 결과 소음방지장치에 대한 약속은 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러자 레켄배커는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 “나는 당신이 그 약속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얼마나 정직한지를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제 1억3천5백만 달러 상당의 항공기를 주문하겠습니다.”

언어의 도구적 관점에서 우리는 자신의 내면적 느낌이나 사고, 가치, 신념 등을 언어로 표현한다. 반면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의 사고나 정신세계를 형성하거나 지배하게 된다. 어떤 경로로든 언어는 나란 존재의 집이며 우리사회라는 존재의 집이다. 그러나 작금의 비속어, 욕설논란을 보고 있노라면 언어를 존재의 집이 아닌 ‘호텔’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호텔 투숙객은 주인이 아니기에 애착도 소속감도 없으며 호텔을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자신의 말과 자신의 존재는 관련이 없으며 언제든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밖으로 언표된 말은 자기 존재의 집이다. 자신과 관계없는 호텔이 아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지 호텔이 아니다.

언어 아닌 말, 행복한 주민자치의 블랙박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세 가지 있다고 한다. 놓쳐버린 기회와 활시위를 떠나버린 화살, 그리고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 중에서 일상적으로 가장 간과하기 쉬운 ‘돌아오지 않는’ 실수가 언어다. 언어의 중요성은 주민자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주민의 삶은 언어이며, 마을과 지역사회가 언어이고, 주민자치의 실질화를 위한 모든 논의 역시 언어이다. 하이데거가 강조한대로 ‘언어는 개개인이란 존재의 집’이라면, 주민자치의 장소인 ‘마을이란 존재’의 집 역시 언어이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인간은 운명적으로 ‘마을 안의 존재’로서 남과 함께 살아가는(Being-with) 공동존재(Mitsein)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을 혹은 지역사회는 단순한 주민의 집합체가 아니라 주민이란 존재들 간의 상호작용의 집합체이다. 상호작용의 직접적인 도구는 언어이기에 언어에 대한 이해와 학습이 행복한 마을, 성공적인 주민자치의 블랙박스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입에서 나온 말’이 행복과 성공적인 상호작용을 촉진하는 언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언어의 본질은 무엇일까?

해답은 ‘언어는 존재의 집’이란 하이데거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앞의 더글러스 사장의 사례에서 보듯 정직하고 진실된 언어는 모두에게 믿음을 주고 감동을 선사한다. 이런 언어가 바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말’이며 ‘존재의 현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존재의 말’의 의미 혹은 언어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가 구분하는 말과 언어의 차이를 생각해 봐야 한다. 일상적으로 ‘말’이란 단어는 언어적 표현과 동일하게 사용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를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근원적인 언어란 곧 말(Rede)이다(혹은 담화(discourse)라 번역). 말은 마을 혹은 지역사회에서 남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서로를 배려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말의 구체적 방식들을 하이데거는 “승인하고 거절하고 촉구하고 경고하는 것으로서 언표, 상담, 대변하는 것, 더 나아가서 공표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다시 말해 ‘말’은 일상생활에서 행하는 바로 그 ‘이야기함’을 뜻하게 된다.

반면에 언어(Sprache)는 일상의 의사소통 전 과정에서 음성적으로 발성화 되는 단어, 문장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언어는 신체적으로 감각될 수 있는 인간이란 존재자의 영역에 귀속되는데 반해, 말은 언어의 감추어진 본질 현상으로서 ‘발성화 된 언어의 영역’이 아니라 존재의 영역에 귀속되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언어적 표현과는 대조적으로 모든 말이 반드시 겉으로 발성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난해한 하이데거지만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아직 말을 못하는 아기와 엄마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아기와 엄마의 관계는 어쩌다 맺어진 것이다. 엄마와의 공동 존재(Mitsein)로서 아기는 엄마와의 관계를 본능적으로 느끼면서 끊임없이 ‘존재의 대화[말]’를 시작한다. 이때의 말은 발성화 된 언어의 영역이 아니라 존재의 영역에 귀속되는 것, 즉 ‘존재론적 말함’이다. 따라서 말을 안 해도 아기의 말이 엄마에게 전달된다. 아기의 말에는 엄마의 말을 ‘듣는 것’, ‘침묵하는 것’, 때로는 옹알거리는 ‘음성’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기가 의도하는 ‘뜻’들이 자라서 낱말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말함은 급기야 밖으로 언표(言表)되어 언어가 된다.

주민의 언어, 마을 언어의 본질은 말(Rede)이다. 마을의 공동존재로서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방식이 말인 것이다. 이런 말은 근원적인 것으로서 존재의 영역에 속하는 말이자 존재의 현상이기에 정직하고 진솔하며 공감을 바탕으로 한다. 주민 각자의 존재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에 자신의 양심에 충실하며 가식과 위선을 떨 필요가 없다. 주민들 상호간의 이러한 말들은 굳이 겉으로 발성화된 언어로 표출되지 않아도 서로가 묵시적으로 통하는 상호작용이다. 마치 말을 안 해도 엄마에게 전달되는 아기의 꾸밈없는 말과 같다.

주민들의 이러한 말들이 음성적으로 발성화 되어 언어로 표출될 때 그 언어가 어떠할지는 상상할 수 있다. 그러한 존재의 언어는 내편·저편, 진보·보수에 기반한 자신만의 순수주의(purism)를 내세워 타인을 이상화하거나 혹은 악마화 하는 언어가 될 수 없다. 또한 우리사회의 ‘질병’인 미셀 푸코가 말하는 언어적 테러리즘과는 거리가 먼, 주민들 간의 이해와 공감, 희망과 상생을 불러오는 언어가 될 것이다.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주민 각자의 존재를 들여다보는 성찰과 학습이 있다면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이상이다.

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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