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 있는 풍경

‘마을이 있는 풍경’은 ‘마을’의 속살을 가만가만 들여다보고 소곤소곤 소통하는 코너입니다. 더 없이 가깝고 밀착돼 있지만 적지 않은 이들에겐 대체로 멀기만 한 마을의 이야기를 때론 지직거리고 둔탁한 확성기로 때론 고성능 마이크의 ASMR로 들려드립니다.<편집자 주>

지인의 지인이 청주에 산다.
지인의 지인을 알게 된 것은 지인이 샴푸와 치약,비누들의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려 자랑을 했기 때문이다. 나도 일 년 전부터 샴푸, 클렌징, 바디클렌저 등을 비누로 바꾸었고, 플라스틱을 하나라도 줄이겠다는 열의로 내친김에 치약도 바꾸어야 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지인의 사진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바로 지인에게 전화했고 청주 사는 지인의 지인을 소개받았다. 지인은 좀 유명세가 있는 뮤지션이어서 청주 사는 지인의 지인은 팬심으로 늘 선물을 보내곤했던 것이다. 뮤지션인 지인은 오래전부터 청주 팬이 보내주는 비누와 치약만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머리빠짐이 훨씬 덜하고, 아니 실제로는 머리카락이 새로 자라고 있고, 시린 이 증상이 깨끗이 사라졌다고 했다.

청주 사는 지인의 지인 그녀에게 전화했다.
“저도 샴푸 바와 가루 치약 구하고 싶어요.”
“어머, 오빠가 알려주셨군요. 저도 매번 만드는 건
아니라 조만간 좀 만들게 되면 보내 드릴 게요. 재료
비만 주세요.”

얼마 후 양철통에 담긴 가루 치약과 샴푸 바를 받았다. 가루 치약은 그동안 사용했던 일반 치약의 거품이 없고 상쾌한 향이 없어서 어색했지만 놀랍게도 얼마 후 시린 이 증상이 사라졌다. 청주 사는 그녀는 세정제 등과 함께 수제 과일 간장을 선물로 보내왔는데 온갖 음식의 맛을 깔끔하게 살려줬다.

SNS 통해 연결된 지인의 지인
그 후 그녀와 SNS 친구를 맺고 매일 매일의 일상을 함께 나누게 되었는데 그녀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청주에서 작은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늘 깜짝 놀랄 만한 모임이 이뤄지고 있었다. 매주 책읽는 모임도 있고 한 달에 한번 씩은 게스트를 모셔서 함께 강의 듣고 나누는 시간도 마련된다. 수백 명이 듣는 강당에 서도 손색이 없는 쟁쟁한 연사들이 열 명도 되지 않는 멤버들을 위해 청주로 내려간다. 지금도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녀가 오랫동안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 공간을 운영해온 진심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남편은 목사여서 그 작은 도서관은 주일에 예배당이 된다. 일주일이 내내 늘 풍성하게 그 공간이 사람과 이야기와 생각을 안고 숨 쉬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뭐든지 잘 만든다. 비누와 치약, 화장품, 향초, 인센스스틱, 에코백, 간장, 온갖 절임 음식…… 모임이 있는 날에는 멤버들이 오기 전에 미리 음식을 준비해 놓는다. 주일 예배 후에 나눌 음식도 늘 풍성히 마련해 놓는다.

그 음식들은 언제나 사진으로 SNS에 공유되는데 매번 나는 ‘추릅’ 입맛을 다시지 않을 수 없다. 아마 누구나 그럴 것이다.

화려하고 특별한 음식이 아니다. 주로 야채로 만든 밑반찬에 뜨끈한 찌개나 국거리다.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혼자서 그 많은 반찬과 양을 만든다는 걸 생각해보면 얼마나 손 빠르게 준비하는지 상상이 된다.

늘 ‘부럽다’‘먹고 싶다’‘어떻게 만드는 거냐’ ‘레시피 알려 달라’고 댓글을 달 때 마다 그녀는 ‘한번 내려오세요. 밥 차려드릴 게요’라고 응답했다. 마음이 굴뚝같았다. 거리감의 압박이 만만찮았다. 그러다 마침 충주에 내려갈 일이 생겼다. 충주에서 작은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후배를 도울 일이 있어서 시간을 내기로 했다.

그녀는 당연히 점심시간에 내려오라고 했다. 같이 밥을 먹는 일이 너무 중요한 일정이었다. 청주까지 내려가는 길은 시간이 꽤 걸리긴 했지만 그녀의 밥을 먹을 생각에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동네 뒷골목의 상가건물 1층에 있는 작은 도서관, 생각보다 훨씬 소박한 도서관에 도착했을 때 이미 상이 차려져 있었다. 나는 ‘어머나’‘어머나’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진 밥, 된장찌개, 카레, 감자전, 토마토 마리네이드 샐러드, 무말랭이 무침, 배추김치, 무김치…… 밥을 두 공기 먹었다.

밥을 먹는 동안에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이 곧 대화였으니까. 먹는 걸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진심을 다해 대접받는 느낌이 너무 각별해서 마음이 밝아졌다. 다 먹은 다음에 드디어 대화가 시작됐다. 어찌 보면 너무 이상한 순서다. 현실공간-SNS도 이젠 현실공간이 돼 버린 감도 없지 않지만-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말없이 열심히 밥을 먹고 그 다음에 말문을 트다니! 그만큼 그녀의 공간이, 그녀의 솜씨가, 그녀의 정성이 아늑했다.

식사를 마치고나서 마침내 긴 수다가 이어졌다. ‘돈독회’라는 이름의 책 읽는 모임이 있고 함께 영화를 보기도 하고 중요한 사회적 담론을 나누기 위해 강연자를 모시기도 한다. 그 작은 도서관이 그런 공간이다. 그 도서관에 매우 중요한 시대적 이슈들이 들썩여졌다. 마음이 모여졌고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환경을 지키는 일에 함께 참여하고 정의를 세우는 일에 힘을 보탰다. 정말 내가 소망하는 삶의 모습이다.

나도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사람 곁에 살고 싶다
그녀를 만나고 온 후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저런 공간이 바로 내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런 친구와 바로 곁에서 같이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런 모임에 자주 참여할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물론 20년 넘게 살아온 남양주가 나에게 베푼 여러 은혜가 있다. 좋은 이웃이 있고, 익숙해서 편안한 환경이 있다. 그러나 이웃이 좋아서 이곳에 머문다기보다 이곳에 머물었기에 친한 이웃이 생긴 셈이다. 무엇이 우선순위인가 하는 점이 조금 다르다.

인생의 후반전에 도달하게 되니 시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남아있는 나날을 무엇으로 채울지 고민하게 된다. 그저 익숙한 곳을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떠나지 못하고 살아가다가 정말 소중한 것을 놓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고 한 버나드 쇼를 들먹이는 건 좀 거창한가? 그런데 정말 우물쭈물하다가 밀도 있는 행복을 놓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청주로 이사 오세요’라고 한다. 좋은 사람들 곁에서 살아가는 게 진짜 사는 맛이다. 그게 맞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주고 내게 좋은 사람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곁에 살아가는 그런 동네를 꿈꾸는 건 당연한 일이다.
※ ‘마을이 있는 풍경’은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가 마무리됩니다. 그 동안 많은 관심을 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박소원 모네상스 전무이사
박소원 모네상스 전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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