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대나무가 서로 부딪치며 울리는 영롱한 소리, 영혼의 소리를 들어보셨나요?

 
밤벨 악기와 밤벨 주민

올해 초 우연한 기회에 참가하게 된 어느 새해 모임에서 사회자가 한 질문에 좌중이 일순 조용해졌다. 이어진 프로그램, ‘밤벨로 하나 되는 시간’에서 처음 만난 밤벨(Bambell) 악기는 외모는 소박하지만 사회자의 표현대로 청아하고 영롱한 소리를 선사해주었다.

평이해 보이는 전통 악기 하나로 주민으로서의 삶과 주민자치의 철학을 그토록 흥겹게 체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 주민자치교육의 장이기도 했다. 진행을 맡은 김창수 한국밤벨연구소 소장에 의하면, 밤벨 혹은 앙클룽(Angklung)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인도네시아 전통악기인데 밤벨의 영문명은 Bamboo Bell이지만 아이들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밤벨로 부른다고 한다.

밤벨은 대나무 수공예악기로서 인도네시아 산 대나무로만 만들어지는데 한국 대나무보다 마디와 마디 간격이 넓고 두께가 얇아 울림이 상당히 좋다고 한다. 대나무를 건조시켜서 대나무를 가르고 그 사이에 다시 막대기를 넣어 흔들면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음계를 대나무 특유의 맑은 소리로 연주할 수가 있다. 연주 방법이 아주 간단하여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연주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필자에겐 생소한 악기지만 이미 여러 학교의 음악교육에서는 물론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음악교육프로그램에서 진가를 발휘하고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하지만 필자에게 인상 깊었던 점은 밤벨 고유의 특성이었다. 그것은 바로 각각의 악기는 고유하고 독특한 한 개의 음만 낸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 사람이 한 음정씩 악기를 흔들어서 소리를 낼 수밖에 없기에 여럿이 함께 협동해서 합주해야 비로소 하나의 노래를 만들 수가 있다는 특징이자 한계가 있다. 하지만 악기의 그런 독특한 한계가 여럿이 음악 공동체가 되어 함께 연주할 때는 상대적으로 쉽게 노래를 만들 수 있게 되는 장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새해 모임의 참가자들 모두 즉석에서의 연습을 통해 공동체로서의 오케스트라의 일원이 되는 흥겨운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게는 밤벨에게서 주민자치의 철학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주민자치의 본질, 공동체성

밤벨 악기 혹은 앙클룽에서 타자와의 연결성을 숙명으로 하는 인간 실존의 모습을 보게 된다. 주민자치 및 주민자치교육은 인간 실존의 운명적인 공동체성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혼자서는 무기력하지만 타자와 함께 할 때 고유의 존재의미가 빛을 발하는 밤벨의 운명처럼, 실존적 존재로서의 주민의 운명 역시 공동체성 및 타자와의 연결성에 있다. 전상직 회장의 말(월간 주민자치 2023년 2월호)대로 주민자치의 원형이 향약이라면, 향약의 본질은 공동체성을 근간으로 하는 생활공동체와 노동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주민자치의 본질이 공동체성이라는 논의는 주민과 지역공동체 및 공동자원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주민자치는 지역공동체를 둘러싼 공동자원과 그 공동자원을 중심으로 삶을 이어온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1월 제주대와 한국주민자치학회가 공동으로 주민자치와 공동자원(commons)을 연결해 논의한 학술대회는 의미가 깊다고 본다.

주민자치의 본질이 공동체성에 있기에 공동체의 구성원인 주민은 운명적으로 하이데거가 규정한 ‘공동존재(Mitsein)’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민자치가 주민이 자신의 지역, 자신의 삶을 스스로 다스리고 통치하고 나아가 이를 통해 인간다운 생활공동체를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주민자치 교육의 목표는 인간 혹은 주민은 본질적으로 공동존재라는 것에 대한 철저한 교육을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다. 따라서 유행처럼 사용하는 각자도생이란 말은 개념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인간의 본성과는 명백히 배치되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을 개별적이고 독립된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보는 인간관은 서양은 물론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도 널리 퍼져 있다.

서양의 근대철학은 인간 혹은 인격 간의 관계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칸트의 선험적 통각에 대한 사유가 계몽주의 인간이해의 주축을 담당하게 된 이후로 독일 관념론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중요시되었던 것은 객관적 인식주체라는 인간상이었다. 따라서 나와 너 혹은 주체와 대상이 사실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지역사회나 국가는 독립된 개개인들의 집합체일 뿐이며 구성원들은 필요에 따라 상호작용을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당연했다. 이런 관점에 의하면 주민자치의 기반인 읍면동 통리란 지역사회는 마치 성냥개비들이 모여 성냥갑이 만들어진 것처럼 단순히 주민들의 집합체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것인가?


동전의 양면과 지역사회 주민들

주민자치의 본질이 공동체성이며 지역공동체의 주민은 숙명적으로 공동존재라는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주민들로 구성된 지역공동체는 성냥갑과는 다르다. 주민 공동체는 단순한 주민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공동존재인 주민들 간의 긴밀한 “상호작용의 집합체(a set of interaction)”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19세기의 니체, 20세기 초의 존 듀이, 하이데거, 부버, 마르셀, 사르트르 등에 의해 공통적으로 강조되기 시작한 인간관이다. 특히 공동존재로서의 주민자치의 철학을 제시하는 대표적인 철학자가 미국의 존듀이와 독일의 마틴 하이데거이다.

듀이(Dewey)는 주민자치의 근간인 공동체성을 동전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의 관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파악하는 관점이 바로 전통적인 이원론이다. 이원론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우리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란 표현을 사용할 뿐 아니라 ‘동전에는 앞면도 있고 뒷면도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듀이에 따르면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 ‘사실적으로 따로 떨어져서’ 별도로 독립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머릿속으로, 개념적으로 동전으로부터 앞면과 뒷면을 추상해 내는 것일 뿐 동전의 존재방식에는 하등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듀이는 이런 방식으로 특정한 대상이나 현상으로부터 그 속에 들어 있는 무엇인가를 추상해 내는 행위를 ‘개념적 구분’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흔히 각자도생이란 말을 사용하듯 지역사회의 주민들이 너와 나, 남자와 여자, 주민과 관료 등으로 구분하는 것은 단지 개념적 구분인 것이다.

개념적 구분과 대비되는 것이 ‘사실적 분리’이다. 이는 두 가지 이상의 어떤 것들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별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동전의 경우에는 앞면과 뒷면이 사실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명백히 오류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특정한 대상이나 현상으로부터 개념적으로 구분해 낸 어떤 것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오류, 즉 개념적 구분을 사실적 분리로 판단하는 오류를 듀이는 ‘추상의 오류’ 혹은 ‘실체화의 오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서양의 이원론은 개념적 구분을 사실적 분리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읍면동 통리의 지역사회라는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삶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의 모양이 다르듯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씨줄날줄처럼 서로 분리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주민들은 사실적 분리가 아닌 개념적 구분이란 인식이 필요하다.

 

상호작용 아닌 교변작용의 주민자치

지역사회에서 주민 각자는 서로 외모나 성별, 출신, 직업 등의 외현적 모습이나 속성이 다르다보니 주민 서로에 대한 인식이 사실적 분리에 치우치기 십상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남과 여의 상호작용의 산물이란 점에서 남녀의 구분이, 그리고 각자는 가계(家系)의 연속성의 산물이란 점에서 세대 간의 구분이 사실적 분리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지역사회의 주민들은 인간실존의 관점에서 볼 때 개념상 구분일 뿐 사실적 분리는 될 수가 없음을 알게 된다. 나아가 사실적 분리가 될 수 없는 주민들의 삶은 서로 간의 긴밀하면서 연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 된다. 따라서 전술한 바대로 읍면동 통리란 지역사회는 주민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주민들의 ‘상호작용의 집합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듀이는 주민들 상호간의 관계는 상호작용을 넘어 교변작용을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상호작용(inter-action)은 둘 이상의 주민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일종의 행동을 의미한다. 그러나 듀이가 강조하는 교변작용(trans-action)은 ‘트랜스(trans)’가 의미하듯, 특정한 상황 속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넘어 상대를 변화시키는 역동적인 쌍방향의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듀이는 『경험과 교육(Experienc and Education)』에서 지역사회에서의 주민의 삶, 주민자치라는 현상이면의 보이지 않는 역동적인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인간은 진공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살고 있다. 즉 인간은 일련의 상황들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상황 ‘속’에서라는 말은 동전이 호주머니 ‘속’에 있다든가, 우유가 병 ‘속’에 있다고 할 때의 ‘속’과는 다르다. 상황 속에 있다는 말은 어떤 사람이... 수동적 경험과 능동적 경험의 특수한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능동적 측면에서 경험이란 ‘해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수동적 측면에서 경험은 ‘당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경험할 때 우리는 그것에 무엇인가 작용을 가하고, 그다음에 그 결과를 당하든가 한다.”

듀이가 강조하는 것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주민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중적인 활동이다. 그런 활동의 사태가 바로 주민자치란 ‘상황’인 것이다. 나아가 주민들 간의 상호작용은 서로가 서로에게 ‘해 보는 것’과 ‘당하는 것’의 경험을 통해 서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교변작용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듀이의 말을 빌려 다시 예를 들어보자. 성냥갑 속에는 성냥개비들이 들어있다. 주민들 역시 다양한 상황 속에 처해있다. 그렇다면 주민은 성냥개비가 성냥갑 속에 있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환경 속에 들어 있는 것인가? 똑같다고 생각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듀이는 그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은 (성냥개비와 달리), 식물이 태양과 토양 ‘속’에 있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성냥개비는 성냥갑 속에 들어 있지만 성냥갑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으며, 그럴 경우에도 이들 양자는 여전히 성냥개비와 성냥갑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서로가 영향을 미치지 않아 성냥갑, 성냥개비란 존재의 변화가 없다. 그러나 주민들이 읍면동 통리란 상황 속에서 혹은 주민자치란 상황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은 성냥갑이 아닌 숲 속의 나무와 같다.

나무가 흙, 햇빛과 분리될 수 없듯이 지역사회라는 교변작용 속에 들어 있는 인간은 결코 그 작용을 이루고 있는 다른 부분인 대상으로서의 주민 및 환경과 결코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 분리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교변작용을 통해 서로가 변화한다. 나무와 흙, 햇빛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변화를 가져오듯이, 주민들 역시 다른 주민들과의 ‘상황’ 속에서 교변작용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밤벨이란 악기를 보면서 공동체성을 근간으로 하는 주민자치철학을 발견하게 된다. “혼자서는 한 개의 음만 낼 수 있기에” 제대로 된 노래를 만들 수 없으며, 반드시 여럿이 공동으로 함께 연주해야 만하는 운명은 밤벨만이 아니다. 혼자서는 소리 나는 대나무 정도에 불과하지만 여럿을 함께 모으면 신명나는 오케스트라를 만들 수 있는 것도 밤벨만이 아니다. 혼자서 내는 한 개의 음이 다른 악기에 영향을 미쳐 새로운 소리의 변화를 가져오는 교변작용도 밤벨만이 아니다. 밤벨은 지역공동체의 너와 나, 그리고 주민자치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저작권자 © 더퍼블릭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