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오월 어떤 아침 그날따라 내 창 밖에서는 유난히 뻐꾹새가 울어서 나는 뻐꾹새 소리에 잠을 깨면서 아 뻐꾹새가 우는군. 그 애가 또 얼마나 슬퍼할까?’ 하고 나는 눈물이 고임을 깨달았다.”

- 춘원 이광수(1936) 뻐꾸기와 그애

 

춘원 이광수의 단편 뻐꾸기와 그애에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과 이별하는 조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절절하게 담겨있다. “이른 아침 참새들의 첫소리, 멧새의 예쁜 소리, 비둘기가 구슬프게 우는 소리도 있지만 죽은 조카딸이 듣고 슬퍼하던 것은 뻐꾸기의 소리였다는 것을 덤덤하게 회상하고 있다(춘원 이광수 수필집. Jesse Book).

어제 아침, 뻐꾹새 우는 소리에 모처럼 잊고 지냈던 춘원의 수필집을 꺼내 들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뻐꾸기 울음소리를 들으면 왠지 돌아가신 어머니가 더욱 생각난다는 사람들이 많다. 뻐꾹새 소리에 깃들어져 있는 자연의 지극한 모성(母性)이 각자의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모성은 자식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이다. 알랭 드 보통은 저서 불안에서 어른끼리 하는 사랑도 부모의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을 원형으로 간직한다고 말한다.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무조건적 사랑이 특별한 이유는 인간의 기본적이며 유전적인 나르시시즘 욕구를 조건 없이 충족시켜 주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행복을 연구한 학자들은 조화로운 인간관계의 비결, 행복한 사회의 핵심 조건은 타인의 나르시시즘 욕구에 대한 관심과 배려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그렇다면 이 나르시시즘 욕구가 주민들 간의 역동적인 상호관계에 기초한 실질적인 주민자치의 성패를 가름하는 보이지 않는 요소는 아닐까? 뻐꾸기 소리들 들으며 생각은 꼬리의 꼬리를 문다.

영화 _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_ 포스터 속 잭 니콜슨의 모습
영화 _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_ 포스터 속 잭 니콜슨의 모습

 

6월의 뻐꾸기와 엄마라는 고유명사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1975년 잭 니콜슨의 명연기로 유명세를 탔던 영화, 원작은 켄 키치의 동명소설이다. 영화보다는 책으로 먼저 접하게 된 제목을 읽고 뻐꾸기 둥지의 모습을 마음대로 그려보던 때가 있었다. 책이나 영화의 내용은 차치하고서라도 뻐꾸기 둥지란 말만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다. 널리 알려진 대로 뻐꾸기는 탁란(托卵)을 하는 철새이기 때문이다. 탁란이란 새가 자기 둥지를 짓지 않고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 그 둥지의 새에게 제 새끼를 대신 키우게 하는 것이다. 참 양심도 없고 밉살스런 행동이며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인간의 잣대로만 볼 수 없는 것이 자연의 오묘한 섭리인지도 모른다.

탁란조의 입장에서 변호를 하자면, 뻐꾸기는 서식지에 머무는 기간이 5월 초순에서 8월까지 3개월 정도로 매우 짧아 둥지를 만들고 알을 낳아 새끼를 키울만한 시간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게다가 철새인 뻐꾸기는 먼 거리를 이동해 날아오느라 에너지가 고갈돼 둥지를 만들 수 없는 처지라고도 한다. 그러고 보면 뻐꾸기 둥지란 제목은, 죄수로 복역하던 교도소를 떠나 남의 집인 정신병원으로 후송돼 환자로 사는 주인공 맥머피’(잭 니콜슨 분)를 보고 남의 둥지를 자기 둥지로 삼고 있는 뻐꾸기를 연상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문제의 뻐꾸기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또 다시 숲속 어디선가 울기 시작한다. 5월 초순 연초록으로 물들기 시작했던 숲이 지금은 짙은 녹색으로 바뀌면서 뻐꾹뻐꾹 하는 소리도 한층 힘이 붙은 느낌이다. 그 많은 새들 가운데 유독 뻐꾹새 울음소리는 처량하다. 일제강점기의 소설가 춘원에게도 그랬나보다. 그는 병석에 누운 조카딸의 입을 통해 아이, 뻐꾹새 소리가 슬프기도 해요. 나도 죽으면 뻐꾹새가 되어 이 산 저 산 다니며 슬피 울어나 볼까?”하고 말한다(뻐꾸기와 그애). 그 울음소리가 어찌나 슬펐던지 아이, 또 저놈의 뻐꾹새가 우네. 왜 하고 많은 산에 하필 요기만 와서 울어?”하며 싫지 않은 핀잔을 준다.

뻐꾸기 울음은 돌아가신 엄마를 닮았다. 어쩌면 자식을 키워낼 둥지도 짓지 못하고, 알을 품어보지도 못하며, 한번 안아보지도 못한 채 남이 키운 자기자식을 멀리서 서성이며 울어대는 뻐꾸기에게서 오로지 자식만을 위해 억척스럽게 헌신했던 가난한 고유명사, ‘엄마를 떠 올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이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어머니란 이름 앞에 어린아이가 된다. 일반명사로서의 어머니는 세상에 많지만 각자 각자의 나의 어머니는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고유명사다. 이 고유명사는 자식이 살아있는 한 시공을 초월해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돌아가신 다음에야 그 존재는 더욱 애틋하고 엄마란 이름은 더욱 무거워진다. 그래서 늘 불러도 처음 같은 말이 바로 엄마.

언제이던가, 몇몇 지인들과 가을산행을 하는 자리에서 어느 노 교수님이 어머니와의 추억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70의 나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90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자식들의 돌봄을 고사하고 시골에서 홀로 생활하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감사함이 진솔하게 묻어났다. 자연스럽게 그날 일행의 화제는 젊어서나 늘그막에 들어서나 오로지 자식만을 생각하는 부모에 대한 추억담으로 옮겨갔다. 서로의 얘기가 끝나갈 무렵,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사람들은 왜 유독 엄마를 말하고, 엄마와의 추억을 그리워할까?’에 대한 물음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 엄마일까?

 

인간의 유전적인 다섯 가지 욕구

이 물음에 대한 의미 있는 대답은 정신의학, 임상심리학자인 윌리암 글라써(Glasser)의 현실요법과 선택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외적인 자극 때문에 행동한다는 자극-반응이론과는 반대로, 선택이론에서 인간은 자신의 내면적인 동기에 의해 행동한다고 주장한다. 현실요법은 내담자의 현재 행동에 초점을 두고 그 행동이 내담자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를 살피는 상담 방법이다(김인자, 현실요법과 선택이론). 그렇다면 행동을 하게 만드는 개인의 동기는 무엇에 의해 추동되는 것일까?

동기에 관한 다양한 이론들이 있지만, 글라써는 내면적 동기를 추동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유전적인[기본적인] 욕구 다섯 가지를 강조한다. 이 다섯 가지의 인간의 기본적 욕구들은 모두 관계맺음과 존경의 욕구들이다. 프로이트가 인간에게 충족되지 않은 욕구로서 성과 공격의 욕구들을 강조한 것과 대조적임을 알 수 있다.

글라써는 특히 인간 욕구가 충족되는 과정에서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의 다른 사람과의 관여(be involved with)’가 절대적임을 역설한다. 한평생 각자에게는 관심과 돌봄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최소한 한 사람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욕구 충족은 필연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며, ‘엄마처럼 자신에게 진심으로 관심과 애정을 쏟는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가 우리와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거리는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 그가 현실과 접촉하고 있어야 하며, 현실 세계 안에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어야 한다고 글라써는 말한다.

글라써가 제시하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는 구뇌와 신뇌로 구분된다. 구뇌(舊腦)는 생존(survival)에 대한 욕구를 관장한다. 신뇌(新腦)는 네 개의 심리적 욕구인 소속(belonging) 및 애정욕구와 힘(power)에 대한 욕구, 자유(freedom)에 대한 욕구, 즐기고 싶은(pleasure) 욕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평생 동안의 임상심리 경험을 통해 글라써는 이들 다섯 개의 유전적 욕구들이 개인의 행동을 유발시키는 근원이란 점을 밝혀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이들 다섯 가지의 기본욕구가 충족될 때 만족감, 행복감을 느끼며, 반대로 이들 욕구가 충족되지 못할 때 불만과 불행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다섯 가지 욕구를 가장 먼저 충족시켜 주는 타인이 누구일까?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혹은 평생 동안 자신에게 관심과 아낌없는 애정을 쏟는 사람이 누구일까? 글라써는 그 타인이 바로 엄마라는 점을 강조한다. 라캉의 거울단계에서 말하듯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마주하는 타인이자 자신의 거울인 엄마는 생존의 욕구를 원 없이 충족시켜 준다. 엄마라는 편안함 속에 아이는 즐거움과 자유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이쁘다고 한다는 말처럼 엄마 눈에는 제 자식이 다 잘나고 귀여워 보인다. 이런 엄마의 착각덕분에 자식들은 힘과 자존감의 욕구, 애정의 욕구가 충족됨을 맛본다. 이렇게 반복적인 엄마라는 거울보기(mirroring)’ 과정을 거쳐 나는 괜찮은 사람’,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자기상()을 확립하게 된다.

다섯 가지의 기본적인 욕구가 모두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글라써는 모든 인간은 연령이나 성 혹은 종족에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동일한 생리적, 심리적 욕구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한다. 한국의 시골 소녀는 영국 여왕과 똑같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음식이나 온도, 휴식에 대한 생리적 욕구의 충족이 정신의학의 관심이 되는 일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들 다섯 가지의 욕구들 중, 정신의학은 특히 두 가지의 심리적 욕구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바로 애정[소속]의 욕구와 힘에의 욕구이다. 다시 말해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 그리고 우리 자신과 타인에게 가치가 있다고 느끼고 싶은 욕구이다(Glasser, 현실치료p.36).

나르시시즘의 어원이 된 신화 속 인물 나르키소스. 사진은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의 작품이다.
나르시시즘의 어원이 된 신화 속 인물 나르키소스. 사진은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의 작품이다.

 

행복한 주민자치를 위한 나르시시즘 욕구

가족에서 나타나는 사랑이든 성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사랑이든, 사랑이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글라써는 사랑을 주거나 사랑을 받는 것 중 어느 한 가지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두 가지 모두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사랑에 대한 두 가지 욕구를 모두 충족시키지 못할 때 우리는 반드시 고통을 받으며 불만과 불안, 우울증세 등과 같은 심리적 증상으로 고통 받게 된다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저서 불안에서 인간은 돈과 명성, 영향력에 대한 치열한 갈망을 갖고 있는데 이들에 대한 갈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랑의 상징으로서 그리고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 더 중시된다고 지적한다.

애정에 대한 욕구와 동일하게 중요한 욕구는 우리가 자신과 남들에게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고 싶은 힘(power)에의 욕구이다. 두 욕구는 분리돼 있지만 실제로는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며, 가치 있는 사람은 대체로 사랑을 받으며 답례로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잘난 맛에 산다. 자기 잘난 맛의 자아상은 남으로부터의 인정을 통해 형성된다. 철학자 헤겔은 인간들 사이의 모든 갈등은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인정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다고 본 것이다.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모욕이나 무시를 받을 경우 우리는 분노라는 심리적 반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사회에서 밀려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것보다 더 잔인한 벌을 생각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심리학의 원리). 만약 만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죽은 사람 취급을 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물건을 상대하듯 한다면, 오래지 않아 울화와 무력한 절망감을 견디지 못하고 차라리 고문을 당하는 쪽이 낫다는 생각마저 든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또 다른 각도에서 힘에의 욕구가 유전적임을 강조한다. 그는 도덕감정론에서 사람들이 탐욕과 야망을 품으며 돈 벌기 위해 힘들게 노력하고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는 목적은 결국 타인으로부터의 관심과 인정, 존경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임상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서는 소속[사랑]의 욕구 및 힘에 대한 욕구를 나르시시즘 욕구라고 정의한다. 흔히 나르시시스트는 일상에서의 공주병이나 왕자병으로, 심할 경우에는 사이코패스처럼 남에게 해롭고 파괴적인 성격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하버드 임상심리학자인 크레이그 맬킨 박사는 저서 나르시시즘 다시 생각하기에서 자신이 전혀 특별하지도 소중하지도 않다고 여기는 에고이스트의 우울과 불안이 나르시시스트의 환상보다 더 위험하다고 말한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만 에고이스트는 자신을 학대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적당한 나르시시즘은 행복한 삶에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다른 사람과 관여되어 있으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 또한 남으로부터의 인정과 자신이 꽤나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기효능감 등은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행복한 삶의 필수조건이 된다는 말이다.

인간의 유전적인 나르시시즘 욕구는 주민자치 및 주민자치교육에서 자칫 간과하기 쉬운 심리적 블랙박스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전상직 한국주민자치학회장은 주민자치(20235월호)의 발행인 칼럼에서 주민자치() 힘이 있으면서도 사랑까지 있어야 하는 일이라고 규정하였다. 물론 칼럼의 의도는 다를 수 있겠지만 주민자치의 성패를 나르시시즘 욕구인 사랑의 관점으로 비판적으로 성찰했다는 점에서 공감을 하게 된다. 특히 주민자치의 과거를 돌아보며 많이 아는 사람, 힘이 있는 사람 대부분이 적()이었다고 말하고 그 이유를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으로 본 것은 의미심장하며 정신의학적으로도 타당한 분석이다. 정신의학자인 글라써는 사랑에의 욕구는 동일하게 중요한 욕구이기에 둘 중 어느 하나라도 만족시킬 수 없을 때 인간은 반드시 고통을 받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정신의학의 눈으로 볼 때 주민자치는 단순한 주민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주민자치는 자신의 나르시시즘 욕구를 충족시키려 몰두하는 사람들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의 집합체(a set of interaction)’. 따라서 주민자치에 관련된 법안이나 조례 제정에서부터 주민자치회의 구성 및 운영, 주민의 참여의식 등의 근저에는 관련된 개개인의 나르시시즘 욕구가 똬리를 틀고 있는 셈이다. 철학자 헤겔의 말대로 타인으로부터의 사랑과 인정을 얻기 위한 투쟁이 보이지 않게 벌어지는 장()이다. 주민자치 실질화의 성패, 혹은 주민자치를 둘러싼 모든 갈등의 중요한 심리적 요인은 이 두 가지 나르시시즘 욕구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일 주민자치 정책 관련자들이 자신들의 힘에 대한 욕구 충족에만 몰두할 경우, 많이 아는 사람, 힘이 있는 사람은 주민자치의 적이 된다. 자기중심적인 나르시시즘은 주민들과의 관계 그 자체를 존재하지 않게 한다. 권력과 권한을 손에 쥔 나르시시스트들의 정신세계에는 자신과 자신의 욕구만 존재할 뿐 주민들의 나르시시즘 욕구를 전제로 하는 건설적 비판과 생산적 정책대안을 수용하는 일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주민자치회와 같은 주민들 간의 상호작용에서도 타인의 나르시시즘 욕구에 대한 배려는 필수적이다. 주민들의 일상과 밀접한 지역문제 해결을 위한 자치계획 수립이나 시행 등을 위한 다양한 토론과 논의과정에서 타인의 힘의 욕구 혹은 인정 욕구가 무엇보다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상직 회장이 말한 힘이 있으면서도 사랑까지 있어야 하는 주민자치는 무엇보다 주민자치와 관련된 사람들의 힘의 욕구, 사랑의 욕구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한다. 실질적 주민자치의 실현을 위한, 그리고 주민들 간의 행복한 상호작용을 위한 정신의학적 불랙박스는 나르시시즘 욕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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