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이게 이효석의 메밀꽃이야? 별로 이쁘진 않네.”

 

메밀꽃을 바라보며 걷던 나의 등 뒤로 어느 여성이 일행에게 건네는 대화 내용이 귓전을 스친다.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녀의 말대로 메밀꽃은 ‘별로 이쁘진 않다’. 장미나 백합처럼 화려하거나 고고하지도 않으며 길가의 코스모스처럼 계절의 내음은 풍기지만 가을햇살에 활짝 핀 어느 집 정원의 썬데빌라(sundaville)처럼 길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지도 않는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별로’인 그 메밀꽃만의 아름다움을 포착해 세상에 알린 작가가 바로 이효석이다. 널리 알려진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작가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메밀꽃의 아름다움을 시인보다 더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봉평의 「메밀꽃 필 무렵」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 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누군가에게는 ‘별로 이쁘지 않다’는 그 메밀꽃이 작가의 눈에는 “숨이 막힐 지경”으로 아름답다. 소설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이곳 봉평 장터 입구에는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란 글귀가 시장을 찾는 사람들을 환하게 맞이하고 있다. 달밤에 메밀밭을 보지 못한 사람마저도 소설의 너무도 섬세하고 아름다운 시적 표현에 “숨이 막힐 지경”일지 모른다. “한국 문학사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설을 쓰는 작가”, “서정문학의 진수”, “미(美) 의식을 환기시켜 시의 경지에 도달”한 작가로 이효석을 꼽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이효석(1907-1942)은 강원도 봉평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백 리 떨어진 평창에서 하숙을 하며 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아마도 하숙집에서 봉평 집에 다녀올 때면 소설의 묘사대로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으며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이 부드러운 빛을 흔붓이 흘리고 있는” 산골의 자연을 온몸으로 체화했을 것이다. 소설 속의 ‘장돌뱅이 허생원과 조선달’, 주막집 ‘동이’, 술에 절어 사는 고주망태를 보았을 것이며, 어느 가을밤에는 산허리의 메밀꽃들이 “흐뭇한 달빛에 소금을 뿌린 듯이” 펼쳐져 있는 광경에 “숨이 막히는” 경험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총명한 감수성이 유난히도 돋보였을 그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지만 서른다섯의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생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필자가 머물고 있는 강원산골, 지난 9월 한 달 봉평의 ‘산허리’는 메밀꽃이 한창이었다. 열흘 동안 ‘평창효석문화제’란 이름의 메밀꽃축제도 펼쳐졌다. 평소 한적했던 시골동네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버스들로 북적였다. 가끔씩 닷 세마다 서는 봉평 장터에 오가면서 무심코 지나쳤던 농촌의 길과 밭두렁은 각양각색의 소란스런 사람들로 왁자지껄해졌다.

그들은 정확히 무엇을 기대하고 이곳을 찾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축제를 위해 야심차게 조성된 넓은 밭들에는 메밀꽃이 만발하지만 그 주위로는 울타리가 쳐져있고 입구에서는 입장료를 받고 있다. 주변을 도는 메밀꽃열차에도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붐빈다. 어린이들이야 삶이 놀이다 보니 어딜 가나 축제겠지만, 어른들은 나름대로 봄철 진달래꽃 구경 가듯 초가을의 메밀꽃을 보려고 혹은 ‘소문’으로 들어왔던 ‘이효석의 그 메밀꽃’을 보고 느끼고 싶은 기대에 부풀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메밀꽃은 그다지 아름답거나 화려하지도 않으며 ‘은은한 메밀향이 지천을 휘감는다’는 표현은 시적이기는 해도 현실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봉평 메밀꽃밥 전경_사진=이효석문학관 웹사이트
봉평 메밀꽃밥 전경_사진=이효석문학관 웹사이트

 

존재 망각의 시대에 ‘이효석의 메밀꽃’

‘이게 이효석의 메밀꽃이냐’는 어느 여성의 물음대로 메밀꽃 축제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이효석의 메밀꽃’이란 무엇이며 과연 볼 수 있는 것일까? 이 의문에 깊은 상념의 장을 제공하는 철학자가 마르틴 하이데거(Heidegger)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와 존재를 구분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존재자’란 메밀꽃을 포함한 삼라만상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란 존재자[메밀꽃]의 고유한 존재방식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서양의 사유방식은 메밀꽃이란 존재자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메밀꽃의 고유한 존재방식 즉 존재에는 무관심했다. 하이데거는 그 결과 서양철학의 역사는 ‘존재망각’의 역사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19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시인 프리드리히 휠덜린, 그리고 20세기 초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라 부른다면 하이데거 역시 ‘궁핍한 시대의 사상가’로 불린다.

왜 그 시대가 궁핍하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존재’로서의 고향을 상실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휠덜린은 자신의 시대가 궁핍한 이유를 ‘신성(神性)의 부재’, ‘신성의 망각’에서 찾는다. 죽을 자들이 죽음과 고통을 망각하고 사랑이 곧 신성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망각하기 때문에 기술이 신성을 몰아내는 궁핍한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신성의 부재’를 하이데거는 ‘존재라는 고향’의 상실로 표현한다. 이들 ‘궁핍한 시대’의 시인들과 사상가는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자본주의가 심화되면서 ‘효용성’을 위주로 한 존재자가 전면에 나서는 반면, 그 존재자를 존재자이게 만드는 ‘존재’는 상실되고 잊혀져 가는 세태를 비판하고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존재자)은 각기 고유한 존재방식을 갖고 있다. 가축으로 생각하는 존재자인 소는 본래 초원에서 풀을 뜯어 먹으며 지내는 고유한 존재방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소를 부드러운 육질이나 우유를 제공해 주는 자원으로서 사육한다. 소의 존재를 인정하는 대신 소라는 존재자를 자원으로서만 간주한다. 동물은 물론 강과 대지, 자연도 각각의 고유한 존재방식을 갖고 있지만 인간중심의 사회에는 이들 존재자의 고유한 존재를 망각하고 인정하지 않으며 오로지 인간의 똘똘 뭉쳐진 욕구에 부응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사물들은 오로지 인간의 욕구충족의 수단으로만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존재자의 고유한 존재를 보지 못하고 망각하게 되는 것일까?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는 그 자체로 숨기고자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숨김은 단순한 숨김이 아니라 “존재자를 개시하면서 존재 스스로는 숨김”이다. 마치 한 연인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감추면서 자신을 상대에게 내보이는 것과 같을 것이다.

메밀꽃은 자신의 모습을 관람객들에게 보여주면서 자신의 존재는 숨긴다. 메밀꽃이 스스로 숨기는 그 ‘존재’란 무엇일까? 무엇보다 메밀꽃의 존재는 메밀꽃의 ‘고유하고 독특한 존재방식’이다. 축제 참가자들의 관람이란 ‘효용성’ 때문에 대규모 밭을 일궈 인위적으로 메밀밭을 조성하는 순간 메밀꽃의 존재는 희미해진다.

이효석의 메밀꽃의 존재는 농부에 의해서든, 메밀 스스로에 의해서든 “산허리”의 밭에 자연스럽게 피었을 때 빛을 발한다. 마치 수목원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건강한 진달래꽃들보다 깊은 산 양지바른 곳에서 우연히 마주친 가냘픈 진달래꽃 몇 송이가 애잔한 감동을 선사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는 관람 ‘효용성’을 위해 설악산만의 자연 고유의 ‘존재’를 희생하는 것이다.

‘스스로 숨어있는’ 메밀꽃의 존재는 언제 드러나는 것일까? 존재자[메밀꽃]의 존재는 다른 존재자[인간]와의 맥락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이효석의 메밀꽃의 존재는 이효석과의 만남과 상황 속에서 비로소 자신을 드러냈다.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던” 어느 밤, 메밀꽃은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똑같은 메밀꽃[존재자]을 바라본다 해도 이효석이 “흐뭇한 달빛” 아래 바라본 메밀꽃과 축제 참가자들이 바라본 메밀꽃은 비록 존재자는 같을지언정 그 존재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밤이 오기를 기다려 달 빛 아래 메밀꽃을 감상한다 해도 ‘이효석의 그 메밀꽃’은 느낄 수도 찾을 수도 없다.

그래도 위로가 된다면 ‘이효석의 메밀꽃’을 느끼고 싶은 각자의 마음은 다른 무언가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는 각자 고유의 소중한 ‘경험’이자 존재라는 점이다. 누가 알겠는가. 그 각자 각자의 경험이 또 다른 ‘메밀꽃 필 무렵’을 낳는 각자의 ‘존재’가 될 줄을.

 

 
주민 각자의 ‘존재’에 관심을

‘이효석의 메밀꽃’은 작가에게만 드러내 보여준 메밀꽃 존재의 모습이다. 그러니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이효석의 메밀꽃’은 볼 수가 없다. 이효석의 메밀꽃은 이효석과의 연관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존재자는 필연적으로 다른 존재자와의 연관 속에서 존재의 모습을 드러낸다. 금은방에 전시되어 있는 금반지와 결혼식 때 주고받은 금반지는 똑같은 존재자지만 그 ‘존재’는 전혀 다르다.

‘그림의 떡’이란 말처럼 아무리 잘 만든 구두라도 상점 진열대에만 놓여 있다면 그 구두는 단지 ‘눈앞의 존재자’일 뿐이며 나와는 관계없는 존재일 뿐이다. 백화점의 냉장고, 세탁기, 스마트폰 등도 마찬가지이다. 구두나 가전제품 같은 사물은 인간의 생활환경 안으로 들어와 ‘인간의 손’에 닿고 ‘인간의 관심’을 받고 있을 때 비로소 도구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물의 존재는 인간이 그 사물을 사용하게 될 때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이관춘, 『평생교육철학』 p.445)

메밀꽃과 같은 도구적 존재자가 그러하듯 실존적 존재로서의 인간 역시 특정한 상황, 타자와의 연관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존재자다. 각자도생이란 말이 당연시되는 현실에서 각자는 독립적으로 삶을 영위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인간은 운명적으로 타자와의 연관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고 삶의 의미를 확인하는 존재자다. 직업을 포함한 사회경제적 구조 속에서 각자는 특정한 직위와 직분을 갖는 ‘존재자’로서 살고 있지만 자신의 직위와 직분에 관계없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고유한 ‘존재’로서 관심을 갖고 사랑하는 부모, 연인에게서 삶의 충만감과 행복을 느끼게 된다. 어찌 보면 하이데거의 말대로 인간은 본래적으로 ‘고향으로서의 존재’를 그리워하고 회복하려는 존재자인지도 모른다.

존재의 관점에서 볼 때 주민자치는 존재의 ‘드러냄’이자 실현이다. 주민으로서의 인간 모두는 ‘자치’라는 각자의 고유하고 독특한 존재방식을 갖고 있고 이를 공동존재(mitsein)로서의 타자와의 연관 속에서 실현하려는 근원적 욕망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존재에의 욕망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한 ‘소유’나 ‘효용성’과는 관계없이 인간이면 추구할 수밖에 없는 내면의 절실한 요청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바쁜 일상에서도 시와 예술작품 감상에 시간을 할애한다. 이때만큼은 사물들을 소유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작품을 감상하려 든다. 즉 작품이 무엇을 드러내려 하는지[존재]에 관심을 갖는 시적이며 예술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시와 예술작품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주민으로서의 인간을 도구적인 목적이 아니라 그저 인간으로서 바라보고 관심을 가질 때 인간의 존재가 드러난다. 하이데거는 예술이나 철학의 공통점은 ‘존재자의 존재’를 드러내는데 있다고 말했지만 주민자치 역시 주민으로서의 ‘현존재’인 인간의 존재를 드러내고 밝히는 데 근본적인 목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주민자치에서 주민이라는 존재자의 존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주민의 ‘존재’는 주민[존재자] 개개인을 진정한 ‘자치’의 삶으로 이끄는 고유한 요인이다. 그 각자의 존재는 우리의 일상에서 잘 드러나지 않으며 관심을 끌지도 못한다. 마치 컵을 바라볼 때 컵의 외형이나 질감, 무늬 같은 컵이란 존재자에만 관심을 갖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 컵이 아무리 금은보석으로 장식되었다고 해도 만약 빈 컵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컵을 가지고 어떤 음료수도 마실 수 없다. 컵에서 중요한 것은 외형이 아니라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빈 공간, 이것이 바로 컵의 존재인 것이다.

컵이 그러하듯 주민으로서의 모든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봉평의 메밀꽃밭을 거닐면서 실질적인 주민자치의 성공을 위해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바로 주민 각자 각자의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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