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하 교수의 향약이야기

향약은 원래 향촌규약(鄕村規約)의 준말이다. 향약은 원칙적으로 조선시대 양반들의 향촌 자치와 이를 통해 일반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리학적 기본 질서 확립이라는 전제 아래 유교적 예절과 풍속을 향촌사회에 보급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아울러 각종 재난을 당했을 때 상부상조하는 규정을 두어 향촌사회의 안정을 꾀하였다.

퇴계문집 중 향립약조 부분.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퇴계문집 중 향립약조 부분.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이 예안에서 향약의 약문을 작성하였다. 퇴계향약은 그 약문에 의하면 농암(聾巖) 이현보(李賢寶, 1467~1555)의 영향을 받아 그가 살아생전에 이루지 못한 뜻을 그 후손들과 퇴계가 그리고 해당 지역에 세력 기반을 둔 재지사족의 공론으로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퇴계선생문집42, , 향입약조서에 실린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우선 소개하고 다음 칼럼에서 이 조목을 분석하고자 한다.

 

향촌에서 약조를 세운 것에 대한 서문약조를 붙임.

옛날 향촌 대부(鄕大夫)들의 직분은 덕행과 도예(道藝)로써 백성을 인도하고 따르지 않는 자는 형벌로써 규탄한다. 선비 된 자는 또한 반드시 집에서 닦아 고을에서 드러난 후에 나라에 등용되니, 이와 같음은 어째서인가? <중략> 더욱이 시골은 왕의 존엄함[王靈]이 멀어서 좋아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서로 공격하고, 강하고 약한 자들이 서로 알력을 벌이고 있으니 혹시라도 효제충신의 도가 저지되어 행해지지 못하면 예의를 버리고 염치가 없어지는 것이 날로 심해져서 점점 이적(夷狄)이나 금수(禽獸)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니 이것이 실로 왕정(王政)의 큰 걱정이다. 그 규탄하고 바로잡는 책임이 이제는 유향소로 돌아오니 아아, 그 또한 중하다.

우리 고을은 비록 땅은 작으나 본래 문헌(文獻)의 고을로 이름이 났고 유현(儒賢)이 많이 나서 왕조에 빛나는 자가 대대로 자취를 잇대었으므로 보고 느끼고 배우고 본떠서 고을의 풍속이 매우 아름답더니 근년에는 운수가 좋지 못하여 덕이 높아 존경받는 여러 공()들이 서로 잇달아 돌아갔다. 그러나 오히려 오래된 집 안에 남아 전하는 법도가 있어 문의(文義)가 높고 성하니 이를 서로 따라서 올바른 나라가 되는 것이 어찌 불가하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인심이 고르지 않고 습속이 점점 그릇되어 맑은 향기는 드물게 풍기고, 재앙의 싹[櫱芽]이 사이사이에서 돋아나니 지금 막지 않으면 그 끝이 장차 이르지 않을 바가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우리 고을의 모든 선비들이 성명(性命)의 이()를 근본하고 국가의 가르침을 따라서 집에 있어서나 고을에 있어서나 각기 사람의 도리를 다하면, 곧 이것은 나라의 좋은 선비가 되어서 혹은 궁하거나 달하거나 서로 힘입을 것이니, 오직 반드시 특별한 조목을 세워서 권할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역시 형벌로 쓸 바가 없을 것이다. 만약 이 같이 함을 알지 못하고 예의(禮義)를 침범하여 우리 고을의 풍속을 허물면, 이는 바로 하늘이 버린 백성이니 아무리 형벌을 가하지 않고자 하나 그렇게 되겠는가. 이 점이 오늘날 약조를 세우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퇴계의 향립약조에 영향을 준 조선 전기 문인 이현보의 농암집.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퇴계의 향립약조에 영향을 준 조선 전기 문인 이현보의 농암집.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정 병진년(1556, 명종 11) 12월에 고을 사람 이황은 서한다.

 

부모에게 불순한 자[불효한 죄는 나라에서 정한 형벌이 있으므로 우선 그 다음 죄만 들었다]

형제가 서로 싸우는 자[형이 잘못하고 아우가 옳으면 균등하게 벌하고 형이 옳고 아우가 잘못하였으면 아우만 벌하며 잘못과 옳음이 서로 비슷하면 형은 가볍고 아우는 중하게 처벌한다]

가도(家道)를 어지럽히는 자[부처(夫妻)가 치고 싸우는 일, 정처(正妻)를 쫓아내는 일, 아내가 사납게 거역한 경우는 죄를 감등한다. 남녀 분별이 없는 일, 적첩(嫡妾)을 뒤바꾼 일, 첩으로 처를 삼은 일, 서얼[]로 적자[]를 삼은 일, 적자가 서얼을 사랑하지 않는 일, 서얼이 도리어 적자를 능멸하는 일]

일이 관부(官府)에 간섭되고 향풍(鄕風)에 관계되는 자

망령되이 위세를 부려 관을 흔들며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자

향장(鄕長)을 능욕하는 자

수절(守節)하는 상부(孀婦)를 유인하여 더럽히는 자

이상은 극벌(極罰)에 해당한다. 하의 구분이 있다[상벌上罰은 그 죄를 관에 알려 수화水火시 도와주지 않는다. 중벌은 향안에서 이름을 빼고, 향리에서 어른대접을 해 주지 않는다. 하벌은 손도損徒로 공적 모임에 참석할 수 없다].

 

친척과 화목하지 않는 자.

본처[正妻]를 박대하는 자[처에게 죄가 있는 경우는 감등한다]

이웃과 화합하지 않는 자

친구들과 서로 때리고 싸우는 자

염치를 돌보지 않고 사풍(士風)을 허물고 더럽히는 자

()함을 믿고 약한 이를 능멸하고 침탈(侵奪)하여 다투는 자

무뢰배와 당을 만들어 횡포한 일을 많이 행하는 자

공사(公私)의 모임에서 관정(官政)을 시비하는 자

말을 만들고 거짓으로 사람을 죄에 빠뜨리게 하는 자

환란(患亂)을 보고 힘이 미치는 데도 가만히 보기만 하고 구하지 않는 자

관의 임명을 받고 공무를 빙자하여 폐해를 만드는 자

혼인(婚姻)과 상제(喪祭)에 아무 이유 없이 시기를 넘기는 자

집강(執綱)이 아니하고 향령鄕令을 따르지 않는 자

향론鄕論에 복종하지 않고 도리어 원망을 품는 자

집강(執綱)이 사사로이 자경리 안되는 자를 향안(鄕案)에 입록한 자

구관(舊官)을 전송하는데 연고 없이 참석하지 않는 자

많은 양민을 양반의 노비로 올려 놓아 관역에 따르지 않게 하는 자

세금을 제때 내지 않고 요역을 피하려고 도모하는 자

이상은 중벌(中罰)에 해당한다. 향에서 경중에 따라 벌한다.

 

공회(公會)에 늦게 이른 자

문란하게 앉아 예의를 잃은 자

좌중에서 떠들썩하게 다투는 자

자기 자리를 비워 놓고 뒤로 물러가 편한 자리에 앉는 자

이상은 하벌(下罰)에 해당한다. 좌주에서 직접 꾸짖고 벌을 준다.

 

(지위를 이용하여 악행을 저지르는) 원악향리(元惡鄕吏)

아전으로서 민가(民家)에 폐를 끼치는 자

공물(貢物) 값을 범람하게 징수하는 자

서인(庶人)이 문벌 있는 자손을 능멸하는 자

이상은 보고 듣는 데로 관에 알려 율령에 의거하여 벌을 받도록 한다.

 

퇴계향약은 위와 같이 33개 조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하층민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와 통제보다는 사족 자신들의 유교적 생활규범 확립과 수령의 행정, 그리고 하층민에 대한 무단적 행위 규제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통해 향촌사회의 안정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퇴계향약은 유향소를 통해 실질적 기능을 발휘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이는 실행되지 못한 듯 보인다. 이와 관련해퇴계연보(退溪年譜)이때 나라에서 향도의 명령(香徒之令)이 있어서 행해지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를 반증해 준다.

그러다 퇴계의 약문은 퇴계의 제자인 금난수[琴蘭秀, 1530~1604]가 약조를 향사당에 걸어 두려고 하였으나 이 역시 고을 사람들의 견해가 통일되지 않아 이루지 못하였고 임진왜란 이후인 1598(선조 31) 다시 문집에서 그 내용을 베껴 향사당에 게시할 수 있었다.

퇴계향약은 1603(선조 36) 퇴계의 제자인 북애(北厓) 김기[金圻, 1547~1603]에 의해 한층 발전되어 덕업상권예속상교과실상규환난상휼의 4강목을 갖추게 되었고 이후 김기가 주창한 향약은 영남 지역에서 실시되는 향약의 모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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