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최진석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즉 국가의 명칭을 100년이나 사용하고도 새삼스럽게 다시 ‘국가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매우 복잡한 일이다. 아니 내게만 갑자기 복잡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대한민국의 지성계나 정치계를 둘러볼 때, 나만 혼자서 심사가 복잡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가 미쳤는지 스스로 의심이 된다. 그렇더라도 나를 복잡하게 하는 이 질문을 그냥 넘기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우리는 지금 국가를 국가의 단계에서 대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일단 미쳤을지도 모를 사람이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해본다.

개인의 세계가 가장 넓게 확장된 공적 영역은 국가이다. 한 개인은 자신의 사고나 가치 혹은 생활의 영역을 자신의 주관적인 뜻대로 5대양6대주나 우주까지 확장할 수도 있겠지만, 법적인 제약을 공유하면서 보호를 받고 권리를 주장하는 공적인 영역으로는 국가가 가장 크다. 자기가 속한 국가를 벗어나서도 최소한의 보호나 권리를 향유하려면 여권을 사용해야 한다. 그것마저도 국가 간의 협의를 거쳐 허락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니 개인의 삶이 보호되고 또 허용되는 일이 일어나는 가장 큰단위는 국가이다. 보호와 허용은 이미 정해진 규칙에 따른다. 이 규칙은 누구나 한 국가 안에서 다 지켜야 하기 때문에 공적 영역이다. 다시 말해, 공적인 체계를 구성하고 공유하면서 서로 북돋우고 견제하는 삶의 장치로는 아직까지 국가보다 더 큰 것이 개발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개인에게 가장 큰 공적 공간으로 국가를 넘어선 것은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국가는 안전과 이익을 공유하는 배타적 집단이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권력을 배타적으로 응집하여 완전한 독립의 상태에서 자력으로 국가를 세우지 못했다. 해방 자체를 우리 힘으로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나라도 근본에서는 미국과 소련이 도와서 선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누가 더 자주적이었는가 하는 논쟁은 정치적인 우격다짐일 뿐이지,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근대 국가를 세워본 경험도 없이 독립을 상실한 우리는 일본에 저항하고 독립의지를 키우기 위해서 ‘민족’이라는 개념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민족은 근대국가 안에서 국가를 이루는 구성 중심이 되지만, 굳이 구분해서 말한다면 국가가 민족을 리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국가가 민족 개념을 리드해서 국민 국가를 이룬 프랑스와 달리, 독일은 여러 요인 때문에 민족 개념으로 국가를 리드하려다가 나치즘에 빠지는 우를 범하였다. 우리의 민족관은 아직과거의 독일 쪽에 더 가까운 특성을 보인다. 우리는 국가가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삶의 뿌리에서 인식을 형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가를 가졌기 때문에 국가를 국가의 높이에서 다룰 실력이 아직 부족한것으로 나타난다. 국가보다 민족이 더 생생한 상태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이다. 언어나 문화나 풍습을 공유한다는 믿음으로 구성되는 정서적 공동체이다. 법률로 관리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민족에 빠지면 감정적이고 정서적이 된다. 국가는 감성과 정서를 배제한 법률과 이성으로 관리된다. 민족은 따뜻하지만, 국가는 차가울 수도 있다. 민족은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기대가 허용될 수도 있지만, 국가는 철저히 이성적이고 사실적 효과에만 기댄다. 민족에 빠지면 호소하려들고, 국가관이 투철하면 힘을 길러 판을 조정하려 한다. ‘힘’을 믿지 않고 설득과 호소와 간절한 눈빛과 따뜻한 태도를 앞세워서 일을 이루려고 한다면, 이는 아직 ‘국가’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혹시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을 앞세우면 이런 태도들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의 일은 국가적 단계에 맞는 태도로만 성사된다.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원수이지, 민족의 지도자가 아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나라의 모든 일이 복잡해지고 해결이 난망해진다. 모든 것이 꼬일 수 있다.

아덴만에서 임무를 마치고 귀항한 해군 청해부대의 ‘최영함’ 입항 환영 행사 도중 사고로 군인 한 명이 사망하고 네 명이 부상을 당했다.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은 국방장관을 대동하고 바로 달려와야 한다. 여의치 않으면, 빈소에라도 와야 한다. 대통령이 비서관을 통해 조화를 보내고 직접 조문하지 않은 것은 군통수권자로서의 사명감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서해 수호의 날에 대통령이 연속 참석하지 않은 것은 국가가 무엇이고, 대통령은 어째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민간 사고의 희생자보다 군 사망자들이 대접을 덜 받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작은 문제가 아니다. 이런 일들이 국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일어났어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누군가를 배려하고 눈치를 보느라 그리되었다면,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은 없을 것이다. 골목에서야 배려하고 눈치를 보며 굽실거리면, 무엇인가 얻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는 절대 그렇지 않다. 국가가 이렇게 하면 아무것도 못 얻고 치욕만 남긴다. 골목과 국가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골목길의 평화는 싸울 의지를 보이지 않고, 비굴한 태도를 보이고, 망신을 당하고도 그냥 모른 체하고 넘어가면 얻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나라의 평화는 싸울 의지를 더 분명히 하고, 당당한 호전성을 거침없이 과시해야만 얻어질 수 있다. 북한 비핵화는 한 걸음도 진척이 없는데, 군 대비태세를 스스로 허물고 있는 것도 국가를 국가의 높이로 경영하고자 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군대에는 언제나 목적한 일이 다 풀리고 난 후, 마지막 단계에서나 겨우 조금 손을 댈 수 있다. 우리는 비핵화 진행과정에서 가장 나중에 손을 대야 할 군대에 가장 먼저 손을 댔다.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볼 필요를 느끼게 한다.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문제는 국가를 국가의 높이에서 경영하지 않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가와 민족 사이에서 대통령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민족의 시각으로는 국가의 문제를 풀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시각으로는 민족의 문제를 풀 수 있다. 국가가 민족을 살리지, 민족이 국가를 살리는 일은 없다. 게다가 우리는 민족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다. 국가들과는 다 등을 돌리고, 민족이라고 상상하는 북한에만 목을 매고, 그 북한과 가까운 중국에만 굽실거리는 것으로는 국가의 높이에 있는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阿Q가 되어 풀리지 않은 현실을 풀린 것으로 “정신승리”하는 것이 전부일 수도 있다. 심지어 북한과 중국도 민족적 처신을 하고 있지 않다. 철저히 국가적 처신을 하고 있다. 우리만 그것을 애써 알려고 하지 않을 뿐이다. 우리만 환상 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크다. 국가란 무엇인가, 이제부터라도 다시 공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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