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학-공공철학] 순자 사상의 실존론적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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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학-공공철학] 순자 사상의 실존론적 공공성
  • 안효성 대구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 승인 2020.10.09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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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효성 ​대구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안효성 ​대구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
순자荀子는 중국 전국시대 말기에 맹자孟子와는 다소 다른 계보에서 유가 사상을 체계화시킨 대표적 인물이다. 여느 중국 철학자들과 같이 순자荀子의 사상도 인간 본성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해 전개되며, 순자의 인간 본성론은 성악설로 요약된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고 그것이 선한 것은 인위의 결과이다. 지금 인간의 본성은, 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를 따르기 때문에 쟁탈이 생겨나고 양보가 사라지며, 나면서부터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를 따르기 때문에 서로 해치는 일이 생겨나고 성실과 신의가 사라지며, 나면서부터 감각의 욕구가 있어 아름다운 소리와 색을 좋아함이 있는데 이를 따르기 때문에 방탕함과 난잡함이 생겨나고 예의禮義와 문리文理가 사라진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을 좇고 인간의 감정을 따르면 반드시 쟁탈을 낳고 정해진 직분을 무시하고 도리를 어지럽혀 폭력으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스승과 법에 의한 교화 및 예의禮義에 의한 인도가 있은 이후에야 양보를 낳고 문리文理에 부합해 다스려짐(사회적 안정)으로 귀결된다. 이로써 본다면 인간의 본성은 악한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선한 것은 인위의 결과이다.
- 『荀子』, 「性惡」 -

위에 인용한 『순자』 「성악」 편의 글귀는 순자가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잘 알려준다. 순자는 타고난 본능으로서의 성性에는 맹목적인 호오好惡만 있을 뿐 합리적인 수용과 거부는 결여돼 있으며, 생물적 생명 활동만 있을 뿐이지 당위적인 도덕 가치를 좇는 경향은 없다고 본 것이다. 게다가 인간의 자연적 성향은 신진대사와 생식에 필수적인 것의 충족만을 추구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순자가 보기에는, 생계의 수단을 제공하는 부-그것이 사적인 부이든 공동적인 부이든-그 이상을 욕망하며, 보다 많은 부와 감각적 충족의 대상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적인 투쟁에 돌입해 멈출 줄 모르는 것이 인간이다.

사람의 정은 먹을 때는 고기 음식이 있기를 바라고, 입을 때는 화려한 옷이 있기를 바라고, 여행 때는 가마나 말이 있기를 바라며, 또 재물을 축적해 부유해지기를 바란다. 그런데 해가 거듭돼도 만족할 줄을 모른다.
- 『荀子』, 「榮辱」 -

그리고 그러한 것이 인간의 ‘성性’이라면 인간의 선천적 본성은 고작 신체적 감각에 수반하는 감정[情]과 생리적 욕구[欲]에 지나지 않고, 자연적 경향에만 맡겨 놓게 되면 평정과 조화의 상태를 기대하기 어려운 불완전한 것으로서, 제대로 통제되지 못할 경우에는 사회 혼란을 야기하는 주범이 된다는 것이 순자의 생각이었다. 순자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지금 진실로 사람의 본성을 따르자면 진정 이치를 바로 하고 다스림을 공평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성왕聖王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예의禮義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비록 성왕과 예의가 있다 하더라도 (본성대로하면 다 될 것을) 장차 이치를 바로 하고 다스림을 공평하게 하는 데 어떤 힘을 보탤 게 있겠는가?
- 『荀子』, 「性惡」 -

순자가 보기에는 만약 처음부터 우리 안에 선한 본성이 있다면 본성의 자연적 경향에 맡겨두어도 사람은 절로 올바르게 행동할 것이고 사회는 절로 정의로워질 것이다. 사람들을 규제하는 별도의 제도나 규범[禮義]도 권위적 모범으로서의 인간의 사표[聖王]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냉엄한 시각에서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낙관하기는 곤란하다는 것이 순자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순자가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선善으로 향하는 첫 번째 단추, 합리적 이성[慮]과 인위[僞]
“타고나는 것을 본성이라고 한다.”  - 「正名」 -
“본성이란 본시 가공되지 않은 원 재목과 같다.” - 「禮論」 -
“본성이란 내가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다.” - 「儒效」 -
“무릇 본성이란 하늘이 이루어놓은 것으로 후천적으로 배워서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性惡」 -
“본성은 하늘이 이루어놓은 것이요, 정情은 본성의 실질이요, 욕구[欲]는 정이 호응하는 것이다. 욕구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고 여겨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정의 반드시 피할 수 없는 측면이다.” - 「正名」 -

여러 곳에 걸쳐 순자는 성이 이미 결정돼 있는, 어떤 존재의 생래적인 경향성이라고 규정하고 있고, 성을 정이나 욕과 직결시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태생적으로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인간의 본성을 비록 부인하거나 소멸시킬 수는 없을지라도, 그것을 누그러뜨리거나 절도에 맞게 통제함으로써 발전적인 방향으로 유도하고 선善을 도모할 수는 있다. 그리고 이 또한 인간의 타고난 어떤 탁월한 능력에 의해 가능한 것인데, 순자는 그것을 ‘사려[慮]’와 ‘실천능력[能]’ 또는 작위[僞]라 지칭한다.

정이 그러한 것을 마음이 선택한 것을 ‘사려’라고 한다. 마음이 사려하고 실천능력이 행한 것을 ‘작위’라고 한다. 사려가 쌓이고 실천능력이 습득된 이후에 이루어지는 것이 작위다.  - 『荀子』, 「正名」 -

사려[慮]’는 합리적 이성에 따르는 ‘사유’에 해당하고, ‘능能’은 ‘실천능력’ 곧 ‘의지적 행위능력’이다. 합리적 선택을 하는 사유와 사유의 결과를 의지적으로 수행하는 행위가 상호 작용해 만들어낸 것이 ‘작위[僞]’이다. 작위는 생물학적 순환과정 속에 있는 인간의 자연적 지향(性 = 欲과 情)과 결을 달리하는 인간의 고차원적 능력이 만들어낸 비자연적 생산물 또는 결실로서 인위적인 것이다. 그것은 총체적으로는 문명과 문화[禮義와 法度]를 말한다.

성인은 본성을 교화해 작위를 일으키고, 작위가 일어나면 예의가 생겨나며, 예의가 생겨나면 법도가 제작된다. 그렇다면 예의와 법도는 성인이 만든 것이다.
- 『荀子』, 「性惡」 -

그 유명한 순자의 ‘화성기위化性起僞’란, 인간의 악한 본성을 교화해 작위를 일으킴으로써 예의와 법도를 만들어내고 그러한 사회적, 문화적 장치들을 통해 비로소 인간을 도덕적인 존재로 만들 수 있다는 논리다. 이때 사실상 구체적으론 정과 욕에 해당하는 ‘악한 본성’도 선천적이고, 그 본성을 교화해 인간을 인위적으로 도덕적 존재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으로서의 ‘마음의 사려’와 ‘의지적 실천능력’도 인간에게 고유하게 주어지는 것이다.

다만 ‘성’은 웬만해서는 막기 어려운 강렬한 흐름인 데 비해 ‘려’와 ‘능’은 그 수준에 있어 사람마다 재능적 차이도 있고 오랜 숙고와 훈련, 습관을 통해 길러나갈 수 있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발달된 합리적 이성과 실천의지의 덕으로 인간은 악한 본성을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드물게 인류 역사의 과정에서 매우 탁월한 이성과 의지의 선각자가 등장해 전례 없는 문화와 문명의 초석을 다짐으로써 도덕을 개창하고 널리 공적 기여를 하는데, 그들을 ‘성인’이라 호칭한다는 것이 순자의 견해라 할 수 있다.

선善으로 향하는 두 번째 단추, 의義
그런데 순자는 인간을 다른 지상의 존재자들과 차이 나는 고귀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인간만의 본성으로 간주 되는 것을 한 가지 더 들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기존에 흔히 도덕적 차원의 개념으로 해석되고는 했는데, 살펴보겠지만 그런 이해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순자』에는 자연의 위계, 혹은 존재(자)의 위계 구조에서 순자가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대목이 등장한다.

우선 정교한 논의를 위해 해당 원문 문구를 직역과 함께 먼저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물과 불은 ‘기氣’는 있어도 ‘생生’이 없고, 풀과 나무는 ‘생’은 있어도 ‘지知’가 없고, 날짐승과 길짐승은 ‘지’는 있어도 ‘의義’가 없다. 인간은 ‘기’도 있고 ‘생’도 있고 ‘지’도 있으며 또 게다가 ‘의’도 있기 때문에 천하에서 가장 귀한 존재다. (인간이) 힘은 소만 같지 못하고 달리기는 말만 같지 못한데 소나 말을 부리는 것은 어째서인가? 말하길, 인간은 ‘군群’을 하나 저들(소와 말)은 ‘군’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떻게 ‘군’을 할 수 있는가? 말하길, ‘분分’ 때문이다. ‘분’이 어떻게 행해질 수 있는가? 말하길, ‘의’ 때문이다. 따라서 ‘의’로써 ‘분’하면 화합을 이루고, 화합을 이루면 하나로 단결되고, 하나로 단결되면 힘이 증가되고, 힘이 증가되면 강해지며, 강해지면 다른 존재자들을 이길 수 있게 된다.

水火有氣而無生, 草木有生而無知, 禽獸有知而無義. 人有氣有生有知, 亦且有義, 故最爲天下貴也. 力不若牛, 走不若馬, 而牛馬爲用, 何也? 曰: 人能群, 彼不能群也. 人何以能群? 曰: 分. 分何以能行? 曰: 義. 故義以分則和, 和則一, 一則多力, 多力則彊, 彊則勝物. - 『荀子』 「王制」 -

물과 불은 무생물을 말한다. 무생물은 유기체는 아니지만 질료를 갖춘 존재자이다. 그렇기에 적어도 ‘기氣’를 가진다. 풀과 나무와 같은 식물은 유기체적 생물로서 생식과 신진대사 활동을 통해 자기 존재를 유지한다. 즉 생명 현상[生]을 가지는 존재자다. 물론 우선적으로 ‘기’도 있음은 물론이다. 날짐승이나 길짐승, 즉 동물은 기와 생명뿐 아니라 지각과 일정한 의식[知]도 지닌다. 그런데 인간은 이 모든 요소에 ‘의義’를 추가적으로 지닌 존재자다. 이 ‘의’는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 주는 존재론적 요소인 만큼, 이 ‘의’가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것은 매우 결정적이다.

통상적으로는 이 ‘의’를 ‘도의道義’나 ‘인의仁義’와 같은 ‘도덕 능력’으로 이해해 왔다. 이에 있어서는 주자학을 비판하는 청대 고증학자들이나 조선의 정약용, 일본의 이토오 진사이나 오규 소라이 등도 결코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여기에서 거론되는 ‘의’를 맹자류의 ‘인의’ 곧 내면적 도덕 능력으로 이해하고 마는 것은 타당한가? 기성의 해석들은 이 대목을 그저 일반적인 유가의 논법으로 읽고 어물쩍 넘어가 버림으로써 순자 철학의 독특한 위상을 포착하는 데 실패하고 만 것은 아닐까?

인간 실존에 대한 순자의 존재론과 정치행위 능력으로서의 ‘의’
이 구절을, 이어지는 글귀들과의 유기적인 맥락 내에서, 맹자적 유학의 선입견을 버리고,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일단 순자는 ‘무생물, 식물, 동물, 인간’의 순으로 존재자의 층위를 구분하고 후자를 전자보다 높이 두는 피라미드형의 존재론적 층위를 설정하고 있으며, ‘기’, ‘생’, ‘지’, ‘의’를 각 존재자가 가지는 속성 혹은 본질로 이해하고 있다.

이때 최하위의 존재자인 무생물이 ‘기’를 본질로 갖는 것에서 시작해 상위의 존재자일수록 ‘생’, ‘지’, ‘의’를 각각 추가적인 본질로 갖는다. 인간은 다른 존재들은 소유하고 있지 못한 ‘의’로 인해 독특해지며 가장 존귀한 존재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데, 인간의 독특함을 만들어 주는 ‘의’의 정체는 이어지는 구절의 의미를 잘 곱씹을 때 밝혀질 수 있다.

순자는 먼저 존재론적 층위를 존재자의 본질과 더불어 기술한 뒤,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근력과 주력이 소와 말보다 못한 인간이 소나 말을 부리는 것은 ‘군群’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군’은 무엇을 말하는가? 군이란 일단 무리 지어 사는 것을 말하지만 이 세상에서 무리 생활을 하는 것이 인간만이 아님은 상식이다. 그러나 분명 순자는 ‘군’을 여타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들을 포함한 타 생명체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인간의 특수한 생존 형태로 보고 있다. ‘군’은 따라서 단순한 군집 생활 그 이상의 것을 지칭하고 있는 용어로서, 일정한 조직과 질서를 가진 공동체 생활을 말한다.

즉, ‘군’의 의미는 ‘사회’ 급이다. 이것은 이어지는 기술이 입증한다. “인간은 어떻게 ‘군’을 할 수 있는가? 말하길, ‘분分’ 때문이다.” 즉 ‘분’이 있어 인간의 군집 생활은 여타 다른 존재자의 무리 생활과 차별된다는 것이다. ‘구별 또는 차등의 기술’로서의 ‘분’! 즉 인간 사회생활의 비밀은 ‘질서 짓기(차별 질서에 의한 조직화)’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주목해야 할 대목은 다음이다.

“‘분’이 어떻게 행해질 수 있는가? 말하길, ‘의義’ 때문이다.”

인간 특유의 힘을 발휘하는 생존 방식으로서의 ‘사회생활(또는 공동체 생활)[群]’이라는 현상과 그것을 탄생시키고 유지해주는 ‘질서 짓기[分]’,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진정한 원천, 존재론적 탁월함은 다름 아닌 ‘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다른 존재자들을 넘어서는 힘의 원천은, 인간의 고귀한 존재론적 위상을 만드는 덕(탁월함)은 ‘의’다.

“‘의’로써 ‘분’하면 화합을 이루고, 화합을 이루면 하나로 단결되고, 하나로 단결되면 힘이 증가하고, 힘이 증가하면 강해지며, 강해지면 다른 존재자들을 이길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통상적인 이해와는 달리 인간의 본성 혹은 탁월함으로 순자는 맹자가 강조한 이타적 동정심[惻隱之心, 不忍人之心]과 같은 내면적 도덕을 염두에 두었다기보다는 고도의 사회 구성능력이나 어떤 정치행위 능력을 주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의’가 도덕 능력과 무관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나, 적어도 검토한 대목은 인간의 사회적 정치적 특성과 그 위력을 말하고 있지, 내면적 도덕 가치나 품성을 논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게다가 성악론자인 순자가 돌연 여기에서만 인간의 성선을 내세우고 있다고 보는 것은 오히려 부자연스럽기만 하다. 알다시피 순자에게서 도덕 능력은 선천적인 내면 능력으로 간주되지 않거나 큰 비중을 갖지 못한다(물론 순자도 공동체의 조화로운 유지·발전과 관련된 도덕 정서의 사례들을 인정한다. 즉 다른 사람에 대한 충성스러움[忠], 미더움[信], 친애의 감정, 부모에 대한 사랑, 조상에 대한 그리움 등이 그것). 오히려 순자가 볼 때 도덕은 합리적 이성의 산물이다[化性起僞]. 순자는 맹자가 ‘인·의仁·義’를 주로 연결시켰던 것과는 달리 ‘예禮와 의義’를 주로 연결시켰다는 사실을 굳이 이곳에서만 망각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예의禮義’는 통상 외재적 혹은 객관적 규범과 규범의식을 말함).

『순자』에 대한 주석으로 유명한 당唐나라의 양경楊倞은 이 대목에서 ‘의’를 ‘재단裁斷’의 뜻으로 풀이했으며 다른 곳곳에서 ‘법法’으로 풀이하곤 했다(양경의 주석은 그 시기상 아직 맹자를 유학의 이념형으로 보는 선입견이 일반화되기 이전의 것이라는 데 의의가 있음). 따라서 딱 맞게 마름질하는 능력, 나아가 어떤 규범을 창출하는 능력, 그것을 순자는 ‘의’라고 명명하고 있으며, 곧 인간의 존재론적 탁월함 내지 선천적 힘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조금 더 나아가 보자면, 여기에서 순자가 ‘의’를 통해 보고 있는 인간의 능력은, 내면적 도덕능력(자율적인 당위적 실천능력)이나 도덕적 덕성과는 구별되는 ‘사회를 구축하는 능력’, 즉 정치적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규범적 행위 능력-확장하자면 문화질서를 조직하는 능력-이라고 확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과감하게 해석해 보자면 ‘의’는 올바름을 따지는 능력, 정치행위 능력에 해당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정치적인 것’의 부각과 순자 사상의 공공성
이와 같은 숙고를 반영해 원문을 다시 번역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물과 불은 기운[氣]은 있어도 생명[生]이 없고, 풀과 나무는 생명은 있어도 지각[知]이 없고, 날짐승과 길짐승은 지각은 있어도 ‘객관 규범을 만드는 능력 / 규범적 행위 능력 / 정치행위 능력[義]’*은 없다. 인간은 기운도 있고 생명도 있고 지각도 있으며 또 게다가 ‘객관 규범을 만드는 능력 / 규범적 행위 능력’도 있기 때문에 천하에서 가장 귀한 존재다. (인간이) 힘은 소만 같지 못하고 달리기는 말만 같지 못한데 소나 말을 부리는 것은 어째서인가? 말하길, 인간은 공동체 생활(사회 구성)[群]을 하나 저들(소와 말)은 공동체 생활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떻게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는가? 말하길, 질서 짓기(차별 질서에 의한 조직화)[分] 때문이다. 질서 짓기가 어떻게 행해질 수 있는가? 말하길, ‘객관 규범을 만드는 능력 / 규범적 행위 능력 / 정치행위 능력[義]’ 때문이다. 따라서 ‘객관 규범을 만드는 능력 / 규범적 행위 능력 / 정치행위 능력’을 사용해 질서를 지으면(조직화하면)[分] 화합을 이루고, 화합을 이루면 하나로 단결되고, 하나로 단결되면 힘이 증가되고, 힘이 증가되면 강해지며, 강해지면 다른 존재자들을 이길(능가할) 수 있게 된다.

(* : 여기서는 일단 ‘의’에 대한 번역을 확정하지 않고 놓아둔다. 객관 규범을 만들어 사용하는 능력은 규범적 행위 능력과 다르지 않은 말이고, ‘의’에는 해당 의미와 정치행위 능력이라는 의미가 다 함축돼 있다고 보인다. 규범적 ‘행위 능력’은 인간 실존의 여러 조건 중 하나이자 활동적 삶의 최상위인 ‘정치행위’에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단, ‘규범적’이라는 것이 꼭 윤리적 도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한 그러하다.)

만일 이렇게 독해할 수 있다면, 한마디로 순자가 인간의 본성 혹은 인간의 세계에서 주목한 것,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실로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순자는 만약 인간에게 어떤 인간만의 고유한 존재론적 선천성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일종의 정치행위 능력[義]이라고 본 것이 아닐까? 올바름을 따지며 질서를 수립하고 공공성을 추구하는 탁월한 능력으로서의 의! 그리고 그 정치행위 능력은 또 하나의 인간의 탁월한 능력인 사유(합리적 이성)[慮]와의 교합과정 속에서 인간의 원초적 욕망 메커니즘[性惡]을 뛰어넘어 문명과 문화[禮義]를 개창[僞]케함으로써, 인류가 좋은 삶을 살아가고 존귀함을 뽐낼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진단한 것은 아닐까?

아마도 순자는 이런 부분을 예리하게 통찰함으로써, 인간이 선천적인 악한 경향성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질서 잡힌 사회를 구축하고 뭇 존재자를 정점의 지위에서 지배하는 문명적 존재가 될 수 있는 까닭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직역과 의역을 거듭하며 직전에 면밀하게 검토한 『순자』의 문구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뒤따른다.

그러므로 가옥을 지어 (안락하게) 거주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시의 질서를 따라 만물을 화육하며, 천하를 두루 이롭게 하니, 여기엔 다른 까닭이 없고 ‘분分’과 ‘의義’를 얻었기 때문이다.
故宮室可得而居也. 故序四時, 裁萬物, 兼利天下, 無它故焉, 得之分義也. - 『荀子』, 「王制」 -

가옥이란 인간들의 집단적 거주지, 도시 등으로 이해돼야 할 것이다. 인간은 거주지를 마련하고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했으며, 상대적으로 자연과 불연속적인 인간만의 인공적 세계를 만들어내었다. 인간의 거주지, 도시-나아가서는 국가에 이르기까지-라는 정초 위에서 인간은 명예로운 삶을 살며 영원 속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정치적인 것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한다. 인간이 “사시의 질서를 따라 만물을 화육하며, 천하를 두루 이롭게 하는 데”에는 “다른 까닭이 없다”. 인간이 정치적으로 조건 지어졌기 때문이다.

본래 단순한 내면 수양의 철학에 머물지 않고 정치 방면에 많은 비중을 두었던 것이 선진 유학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인간의 선천적 정치행위 능력을 인간의 다른 능력들보다 더 특별하고 차별적인 무엇인가로 감지하고 그것을 존재론적 차원에서까지 사유했던 것이 순자의 유학으로 보인다. 우리는 ‘선한 본성’과 거리를 둔 채 ‘정치적인 것’을 인간 실존의 명백한 양상으로 부각시킨 것이 다른 유학 사상들과 변별되는 순자 사상의 특성이라고 평가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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