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학-공공철학] 무용지용의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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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학-공공철학] 무용지용의 공공성
  • 성민교 서강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생
  • 승인 2020.11.09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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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가 말하는 상수리나무의 쓸모

무용지용無用之用. 쓸모없음의 쓸모를 뜻하는 장자의 구절이다. 장자는 너무도 커다랗지만, 목재로 쓰기에 적합하지 않아 벌목되지 않고 장수를 누리는 상수리나무와 온몸이 기형이어서 군역과 부역도 부과되지 않지만 스스로 살림을 해 천수를 누리는 지리소라는 인물을 통해 무용한 것의 커다란 쓰임을 역설한다.

오늘 상수리나무와 지리소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자꾸만 혀 밑을 스치는 다음과 같은 물음들 때문이다. 이 시대와 이 공간은 무용한 이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충만한 생명으로서 이들의 살림할 능력을 인정해주고 있는가? 아니면 결핍된 존재자로서 보호와 관리만을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처리되는가? 이들은 외진 곳으로 쫓겨나고 갇히지 않는가? 이들을 구석으로 숨기는 사회가 공공성을 말할 수 있는가?

먼저 무용한 상수리나무의 큰 쓸모를 살펴보기 위해 『장자』를 직접 읽어보자.

장석이 제나라에 갈 때 곡원에 이르러 사社(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에 심어진 상수리나무를 보았는데, 그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덮을 수 있고, 헤아려 보면 백 아름(인간의 두 팔로 감싸는 정도의 길이)이며, 그 높이는 산을 내려다볼 정도여서 [땅으로부터] 열 길(길이의 단위) 이후에 가지가 있으며, 배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수십 척에 달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마치 저잣거리처럼 많았는데 장석은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길을 가며 멈추지 않았다.- 『莊子』 「人間世」 4장 -

장석匠石은 그 이름으로 보아 재료를 다뤄 물건을 만드는 장인 기술자로 보인다. 그런데 왜 장석은 이렇게 경악할 정도로 커다란 나무에, 게다가 배 수십 척을 만드는 재료가 될 수 있는 나무에 전문가로서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까? 장석의 제자가 우리 대신 이 질문을 해준다.

“제가 도끼를 잡고 선생님을 따라다닌 이래로 이와 같이 아름다운 재목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께서는 기꺼이 보지 않으시고 멈추지 않은 채 가시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장석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만둬라. 그 나무에 대해 말하지 말아라. 산목散木이다.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이나 곽을 만들면 빨리 썩고, 그릇을 만들면 빨리 부서지고, 짝문이나 외짝문을 만들면 즙과 진액이 흘러나오고, 기둥을 만들면 좀벌레가 갉아먹으니 이 나무는 재목이 아닌 나무[不材之木]이다. 쓸 만한 바가 없는지라 그 때문에 이와 같은 장수가 가능했던 것이다.”  - 『莊子』 「人間世」 4장 -

이 나무는 도무지 재료로서 쓸모가 없다. 이를 장자는 산목散木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산散은 질긴 마와 고기 등을 두드려 펼치는 모습을 그린 글자이다. 이렇게 되면 마와 고기를 구성하고 있는 조직들은 늘어나고 서로 멀어지게 된다. 이로써 이 글자가 ‘흩어지다, 분산되다’라는 뜻을 갖게 된 것이다. 따라서 산목이라는 것은 흐트러지고 흩어지고 헝클어진 나무라고 할 수 있다. 단단하고 고집스럽게 뭉쳐 있는 잘 정돈된 모양이 아니라, 헐겁고 느슨하게 흐트러져 있는 제 멋대로의 나무인 것이다. 이런 무른 재질은 당연히 어떤 건축물이나 가구나 제품을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배 수십 척을 만들 수 있는 크기라 하더라도, 실제 배로 만들어 써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나무는 쓸모가 없음으로 인해서 특정한 쓰임새를 위해 이용되지 않고 오래도록 살아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상수리나무가 장석의 꿈에 나타나 스스로의 언어로 말한다.

장석이 돌아왔는데 사社의 상수리나무가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어디에 나를 비교하려 하는가? 그대는 나를 문목文木에 비교하려 하는가? 산사나무, 배나무, 귤나무, 유자나무는 나무 열매와 풀 열매 등의 온갖 열매가 익으면 벗겨지고, 벗겨지게 되면 욕을 당하게 돼서,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찢겨지니, 이는 자신의 능력으로써 자신의 삶을 괴롭게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자신의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도중에 요절해서 스스로 세속에게 치이는 것들이니, 만물이 이와 같지 않음이 없다. 또한 나는 쓸 만한 바가 없어지기를 추구해 온 지 오래됐는데, 거의 죽을 뻔했다가 비로소 지금 그것을 얻었으니, 나를 위해서는 큰 쓰임大用이다. 만약 내가 쓸모가 있었더라면, 그러고서도 이 커다람을 얻었겠는가? 또한 그대와 나는 모두 사물인데, 어찌 상대방을 서로 사물로 대하겠는가? 그대도 거의 죽어가는 산인散人이니, 또 어찌 산목散木을 알겠는가?”  - 『莊子』 「人間世」 4장 -

우리가 익히 그 열매를 잘 알고 있는 산사나무, 배나무, 귤나무, 유자나무 등은 문목文木이다. 앞서 산목은 흐트러진 나무라 했다. 문목은 정반대로 고르고, 촘촘하고, 단정하고, 곱고, 세련된 나무를 뜻한다. 참고로 문文은 유학에서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닌 개념이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즉 흔적과 그 이어짐을 뜻하는 이 글자는 지금도 문화와 문자 등의 고차원적이고 세련된 인간 문명을 상징하고 있다. 그런데 상수리나무는 이러한 문목을 그 쓸모 있는 능력으로 인해서 세속적인 욕구들에 의해 쓰임당하고 스스로의 생명을 해치게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쓸모없음으로 인해 자신의 충만한 삶을 누리게 되는 산목과 정반대에 있는 것이다. 이런 상수리나무조차 ‘거의 죽을 뻔’ 했다는 것은, 거대한 상수리나무를 구경하러 저잣거리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때 상수리나무의 희소성과 경제적 가치가 인정받게 돼 세속적 유용성의 세계에 편입될 뻔했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장석과 상수리나무는 모두 무용지용을 말하며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왜 상수리나무는 장석이 어찌 산목을 알겠느냐며 설의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유용과 무용 사이의 선후 관계에 있는 것 같다. 장석은 상수리나무에 대해 ‘…로 쓰기에는 …해서 쓸모가 없다’의 형태로 서술했다. 이에 대해 상수리나무는 ‘그대는 나를 쓸모있는 문목에 비교하려 하는가?’라고 묻고 있다. 즉 장석은 유용성을 기준으로 두고 이 유용성을 갖지 ‘않은’ 부정과 결핍으로서 유용성의 반대편에 있는 무용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무용성을 유용한 것의 부차적인 안티테제로 설정하는 것이다.

반면 상수리나무가 보기에 무용성은 자연적 생명 그대로의 가장 실정적인, 그 자체로 긍정적인 상태다. 오히려 유용성이야말로 생명의 안티테제이다. 모든 것이 가치론적으로 동등한 사물이므로 위계를 설정하고 판단할 자격이 있는 권리 주체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을 혹은 자신의 종을 세계의 유일한 주체로 간주하고 나머지 것들을 대상들로, 수동적인 객체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상수리나무는 이런 인간 중심적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며 나무와 인간은 모두 사물이기에 서로를 사물로서 대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상대를 사물로 대하는 것은, 주체만이 하는 일이다. 나무는 세계 안의 존재를 대상으로 대하지 않는다. 그저 더불어 존재하며 자신의 생명을 충실히 살아내고 이로써 다른 생명 역시 충만하게 할 뿐이다. 스스로를 특권적인 주체로 착각하는 이들은 이러한 생명의 온전함을 그 자체로 긍정하지 못한 채 생명들에 위계를 매기며 다른 생명의 삶뿐 아니라 스스로의 삶조차 괴롭힌다. 이렇게 인간의 유용성을 기준으로 판단할 때 장석은 무용지용의 도를 깨달았더라도 ‘거의 죽어가는’ 생명이 된다.

장석이 깨어나 그 꿈을 진단하자 제자가 이렇게 말했다.
“뜻이 쓸모없음[無用]을 취하는 것이라면, 사社의 나무가 된 것은 어째서입니까?”
장석이 이렇게 대답했다.
“쉿!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저것 또한 다만 얹혀살[寄] 뿐이다. (저 나무는 네가 하는 말을 두고) 자기를 알지 못하는 자의 욕지거리로 생각할 것이다. 사社의 나무가 되지 않았다 한들 어찌 잘림이 있었겠는가? 또 저것은 그 지키고 있는 바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데[與衆異], 올바름[義]으로써 평가한다면 또한 멀지 않겠는가?”  - 『莊子』 「人間世」 4장 -

꿈을 진단하고 해석한다는 것은 상수리나무가 한 말이 단지 처음 장석이 제자에게 한 말의 똑같은 반복이 아니라 장석이 모르던 부분이었기에 해독해내야만 하는 새로운 의미를 제시했음을 알려준다. 이제 장석은 무용지용에 대한 더 깊고 넓은, 덜 인간적이고 더 자연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무용지용의 거대함을 다 이해하지 못한 제자는 또 묻는다.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에 심어진 상수리나무는 신성하고도 고귀한 나무이다. 사에서 신성한 나무로 취급받는 것은, 유용한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신성한 나무가 됐기에 감히 저주를 입을까봐 두려워 건드리지 못한 것은 아닌가?

장석은 만물의 ‘기생’하는 삶을 말한다. 세계를 전세 내어 쓸 수 있는 권리자는 없으며─아니, 인간이 있다─세계는 독점하고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세계를 잠시 빌려 쓰고 먹고 몸을 누인다. 위대한 상수리나무 역시 다른 모든 사물과 마찬가지로 세계에 얹혀사는 존재이며, 이는 사社의 권위를 빌림으로써 유용성을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존재의 본질적인 방식이다. 상수리나무의 커다람은 사社의 보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그 커다람은 다른 어떤 대상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상수리나무의 가장 고유한 독특성이자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원천이다. 이를 장자는 여중리與衆異, 즉 대중과는 다르다, 대중과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중衆이 뜻하는 무리는 동질적이고 평균적인 집단을 의미한다. 무리는 끼리끼리 뭉친 단순한 덩어리다. 동질적인 요소로 구성돼 서로 구별되지 않는 것이다. 이 덩어리 안에서는 개별적인 독특성이 눈에 띄지 않고 무리의 평균성 안에 동화된다. 상수리나무는 어떤 것과도 유사하지 않은 본인만의 경이로운 크기를 가지고 있기에 평균의 키를 가진 집단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평준화되고 일반적인 무리가 만든 올바름義의 도덕에 의해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평균적 올바름의 도덕에는 물론 쓰임의 올바름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이런 사물은 이렇게 쓰여야 옳고 저런 사물은 저렇게 쓰여야 옳다.” 상수리나무는 이런 보통의 올바름 관념으로는 평가될 수 없는, 그것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용지용의 도덕은 전혀 보지 못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리소의 쓸모

이제 지리소를 살펴보자. 지리소支離疏는 그 이름부터 재미있는 등장인물이다. 지支는 나뭇가지를 의미한다. 나뭇가지는 나무가 태어나자마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자라면서 가지를 치며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자는 ‘가르다, 갈라지다, 분열되다’라는 뜻을 갖는다. 인간의 몸에서 가지를 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사지라고 불리는 팔다리이다. 리離는 ‘떠나다, 흩어지다, 헤어지다’라는 뜻이다. 즉 ‘지리’는 말 그대로 사지가 잘 붙어 있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있다는 뜻이다. 앞서의 산散 개념과 그 함축하는 바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리저리 흩어지고 찢어져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뜻의 ‘지리멸렬’이라는 사자성어가 이로부터 유래했다. 소疏는 ‘소통하다’라는 뜻과 동시에 ‘멀다, 성기다, 트이다’라는 뜻이다. 어떤 것들이 소통을 하려면, 그들 사이는 벌어져 있어야만 한다. 꼭 붙어서 누가 누군지 구별이 안 되는 상태에서는 소통이라는 말이 통하질 않는 것이다. 이처럼 지리소는 그 이름부터, 멀리 흩어져 있는 것들의 부조화와 단절이 아니라 순조로운 소통을 암시하고 있다.

지리소支離疏는 턱이 배꼽에 숨어 있고, 어깨는 이마보다 높으며, 상투는 하늘을 가리키고, 오장이 위에 있으며, 두 넓적다리는 겨드랑이에 있다. 바느질과 빨래로 충분히 입에 풀칠을 하며, 키질을 하고 쌀을 찧는 것으로 충분히 열 명은 먹인다. 병사를 징집하면 지리는 팔을 걷어붙이고 그 사이를 노닐고, 큰 부역이 있으면 지리는 항구적인 병이 있으므로 일을 받지 않으며, 위에서 병자에게 곡식을 주면 석 되와 땔나무 열 묶음을 받는다. 무릇 그 모양을 갈라내고 흐트러뜨린[支離其形] 이조차 충분히 자신의 몸을 기르고 자신의 천수를 다하는데, 하물며 그 덕을 갈라내고 흐트러뜨린[支離其德] 이는! - 『莊子』 「人間世」 7장 -

지리소는 그 기형적 신체로 인해 국가의 징병에도 부역에도 동원되지 않는다. 징병과 부역은 ‘위’에서 내려온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이는 더 적게 권력을 가진 이의 몸을 병사로, 노동자로 부릴 수 있다. 동질적이고 획일적인 군대와 작업장에서 개별성은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되며, 적과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군인 양성과 재화의 생산이 공공의 목표로 다뤄진다. 이 공공의 목표에 부합하는 것만이 쓸모있다. 지리소는 바로 이러한 인위적으로 동원되는 군대와 노동에 참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는 쓸모가 없는 국민이다.

그러나 지리소는 스스로 잘할 수 있는 일을 해 스스로를 먹여 살리고,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가 깨끗이 골라낸 쌀로 열 명을 먹여 살린다. 지리소는 실제로 사람을 살리는 이다. 그는 물론 이 노동을 통해 대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 대가는 그저 입에 충분히 풀칠을 할 정도이다. 이는 몸집을 불리고 이윤을 늘리는 경제 활동이 아니다. 입에 풀칠을 하면 족할 정도의 일이며 살림이다. 지리소가 하는 일들, 즉 바느질, 빨래, 곡식 키질 등은 시장경제에서 그리 높은 가치를 가진, 높은 생산성을 가진 노동이 아니다. 많은 주부들은 여전히 어떤 대가도 받지 않고, 즉 어떤 가시적인 경제 가치도 부여받지 않은 채로 가사노동을 하며 가족을 살림한다. 그러나 이러한 살림이야말로 우리를 건강하게 먹여 살리는 필수가치이다.

이처럼 지리소는 사지가 분열되고 흩어져 있지만 그 멀리 있는 것들끼리 만나 생명의 힘을 충만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를 장자는 자신의 몸을 지리하게 만든 사람이 누리는 천수라고 말한다. 이와 더불어 도덕을 지리하게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갈라내고 흐트러뜨려야 할 것으로서의 도덕이 바로 앞서 그것으로서 상수리나무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무리의 도덕이다. 무용지용의 흩어진 도덕과 정반대에 있는, 유용지용으로 똘똘 뭉친 평균적 도덕인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도덕이면서도 도덕의 시초를 이루는 무용지용의 도덕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앞서 장석과 함께 살펴본 상수리나무의 우화에 조금 더 새로운 내용이 추가된 이야기를 보자. 장자가 제자와 함께 산속을 걷다가 마찬가지로 커다란 나무를 보았는데 벌목꾼들이 그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나무를 베지를 않았다. 그리고 산에서 나와 오랜 친구의 집에서 묵게 돼 친구가 기쁘게 거위를 잡아 요리를 해주려 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종에게 시키는데 어린 종이 잘 우는 거위와 울지 못하는 거위 중 어떤것을 잡을까 물었더니 주인(친구)은 울지 못하는 거위를 잡으라고 했다.

다음 날 제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어제 산속의 나무는 쓸모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천수를 다할 수 있었고 지금 주인의 거위는 쓸모없었기 때문에 죽었으니, 선생께서는 장차 어디에 머무르시겠습니까?”
장자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사이에 머물 것이다. [그런데]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사이는 [도(道)와] 비슷하지만 아니기 때문에[似之而非] 누累를 면치 못할 것이다. 만약 도道와 덕德을 타고 떠논다면 그렇지 않다. 찬양함도 없고 헐뜯음도 없으며 한 번은 용이 됐다가 한 번은 뱀이 돼 때[時]와 함께 두루 변화하면서[俱化], 오직 한 방향만을 위하는 것[專爲]을 기꺼워하지 않는다. 한 번은 올라가고 한 번은 내려가며 조화를 도량으로 삼고, 만물의 시초에서 떠놀며 사물은 사물이되 사물에 속하는 사물이 아니므로 어찌 얽힐[累] 수 있겠는가?”  - 『莊子』 「山木」 1장 -

제자는 어떤 것이 무용함으로 인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데도 무용지용의 도덕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아 스승에게 그 위치를 묻는다. 장자의 첫 번째 대답은 유용과 무용의 사이에 머물겠다는 것이다. 거위의 예를 들자면 잘 우는 것도 아니고 울지 못하는 것도 아니게 애매하게 우는 것일까? 그러나 이는 사이비 도덕이다. 산속의 나무와 주인의 거위는 그 관계 맺음이 다르다. 산과 나무는 서로 얹혀살되 자유로운 관계를 맺고 있지만, 주인은 거위를 일방적으로 종속시킨다. 즉 거위가 자연 안에서는 아무리 자유로운 존재라도, 주인이 그 자유를 빼앗아 인간의 거주지에서 사육하기로 한 이상, 그 거위에게는 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잘 우는 거위든 못 우는 거위든 그 상품 가치─이 사례에서는 식용 가치─를 주인으로부터 부여받게 되며 유용성의 사회 안으로 강제편입된다. 잘 우는 거위도 결국 언젠가는 잡아먹히게 돼 있다. 이런 종속적인 조건 하에서 유용성 혹은 무용성을 택하는 것은 겉으로만 자유로워 보일 뿐 이미 유용성의 한계 안에 제한되는 것이다.

물레나 베틀같이 실을 뽑는 기계에서 실을 감는 가락인 방추가 여러 개 있음을 뜻하는 누累는 감겨진 실로 인해 묶임, 엮임, 연루, 종속, 귀속을 뜻한다. 이렇듯 사물과 관계맺는 방식이 일방적인 유용성을 기준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는 서로 엮임으로써 서로에게 누를 끼치게 된다. 이는 멀리 흩어져 있는 것들끼리 자유롭게 소통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도덕인 것이다. 이런 도덕이 바로 앞서 설명했듯 사물이 나와 같은 사물임을 알지 못한 채 나를 주체로 세우고 상대를 대상으로 강등시키는 인위적 도덕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도덕이 사물을 지배한다.

그러나 장자는 놀이기구를 타듯 도덕을 타고 유희하는 사회가 있다고 말하며 이것이 자연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공동체이다. 나는 용이 될 수도, 뱀이 될 수도 있으며 끝없이 변화하는 생명을 가진다. 이 변화의 방향은 한 방향이 아니다. 전위專爲에서 전專은 앞서 누累와 통하는 글자로, 방추를 한 방향으로 돌리는 모습을 표현한 글자이다. 방추를 오직 한 방향으로만 돌려야 실이 뽑힌다. 자연은 인위적 결과를 얻기 위해 한 방향으로만 맹목적으로 도는 이런 일방향의 일변도를 즐기지 않는다. 방추는 결과를 얻기 위한 단순 기계의 부품으로 종속될 뿐이다.

그러나 자연의 참모습은, 각자가 자신의 방향과 속도대로 움직이면서 서로 구속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조화를 이룬다. 이것이 구화俱化하면서 화和하는 자연의 도덕이다. 구俱는 빠짐없이 온전하게 다 갖춘다는 뜻이다. 따라서 구화俱化란, 구俱를 부사로 보아 빠짐없이 변화한다, 남김없이 변화한다, 두루 변화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반대로 전위專爲는 한 방향으로만 도는 순환 속에 갇힌 변화인 것이다.

주의할 것은 장자가 실을 뽑는 방추의 비유를 이용했다고 해서 이런 실 뽑는 모습도 다 자연에 대한 착취니 옷도 지어 입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옷을 지어 몸을 보호하는 것은 연약한 인간에게 필수적인 생활 방식이고 그것이 인간만의 특수한 도덕을 만들어낸다. 다만 장자는 여기에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사물을 대하는 방식이 어떤 모습이고 자연의 모습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포착하며, 그러한 인간만의 욕구와 방식이 맹목적으로 증식될 때 생명의 힘이 어떻게 약해지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로운 선택을 열어주는 것이다. 한 방향으로만 무한히 연장되며 종속된 상태에서의 닫힌 선택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유용함을 무용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우리 사회는 무용한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진정한 무능력은 기존의 도덕을 비판하지 못하며 이들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 사회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직 우리 사회는 일방적인 포함과 배제의 논리에, 즉 사회의 한계 자체는 고정해두고 그 한계 안에 대상을 편입시킬 것인지 말지를 고민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어떤 것을 공동체 안으로 포함할지 배제할지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특정한 모습을 한 주체들로 이뤄진 집단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를 높고 우월한 자리에 놓고 낮은 대상에게 관용을 베푸는 시혜적 시선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 대상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은 ‘정상인’들을 위한 비용에 더해지는 추가비용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공동체의 본질에 대한 이해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무용한 것들은 그 자체로 무용한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대중적인 기준에 의해 무용한 것으로 가치평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수리나무는 목재 제품으로 쓰일 수 없다는 관점에서 무용한 것으로, 지리소는 신체적 장애로 인해 온전한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관점에서 무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상수리나무는 그늘 안에서 다른 생명들이 쉬고 놀 수 있도록 지켜주는 그 자체로 공동체이며 지리소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신과 다른 생명을 살리는 진정한 수호자다.

무용지용이라는 것은 기존의 쓰임의 체계에서 무용하다고 평가되는 것들, 그러나 실은 그 유용성의 체계에 종속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있으면서 가장 자연스러운 생명의 모습을 보존할 수 있는 것들이 생명의 살림이라는 가장 큰 가치를 발생시킨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기존의 쓰임의 체계를 밖에서부터 전복한다. 공동체의 한계 자체를 비판하고 개방하고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기존의 무리에 흡수되지 않는 독특성을 보존하고 있는 소수적 존재 자체의 고귀함이자 새로움이다.

미디어 권력이 개방됨으로 인해 많은 소수자가 취재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독자적인 언론 기관으로서 자발적으로 가시화될 수 있게 됐다. 예컨대 어떤 장애인 유튜버는 지하철에서 휠체어를 타고 환승할 수 있는 경로를 직접 촬영해 공유한다. 이 과정에서 휠체어로 통행하지 못하는 길, 가능하다고 안내받았으나 실제로는 막혀 있는 길들이 낱낱이 드러난다. 이는 장애가 있는 이들과의 정보 공유에 있어서도 탁월하지만, 비장애인들이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정상적’ 공동체의 무능력을 드러내고 새로운 공동체와 새로운 통로를 제시한다.

공공성은 한계지어진 공동체 내부자들의 지극히 일반적이고 관습적인 쳇바퀴 삶에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이런 삶은 개인들을 각자의 방으로 고립시킨다─그동안 공동체 안에서 감각되지 않았던 이질적인 경험에 의해 달성된다. 잠겼던 방의 문이 열리고, 이런저런 방향과 속도로 서로를 살리는 여러 사물이 하나의 열린 시공간에 있게 되는 것이 진정한 공공적 공동체의 모습이다.

성민교 서강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생
성민교 서강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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