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과 난민이 만들어가는 격변의 세계사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바이든(Joe Biden) 후보가 승리했다. 바이든은 그간 선거를 통한 정치 변혁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흑인들의 열성적인 투표가 크게 작용한 결과라며 감사를 표했다. <포스트>(the Post)지에 따르면, 출구조사 결과 87%의 흑인 투표자가 바이든 후보를 지지했으며, 흑인 여성에 한정할 경우 수치는 91%까지 치솟는다.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트럼프 시대는 흑인들의 정치의식을 완전히 바꿔놓은 확실한 계기가 된 것 같다. 흑인 유권자의 투표는 미국 정치권력 결정 요인 중 하나의 변수 정도에서 이제 상수가 됐다. 흑인계 여성인 해리스(Kamala Harris)가 미국 역사상 첫 여성 부통령에 당선된 것이 의미심장한 상징이다. 16세기 노예무역에 의해 강제 이주당한 흑인이 미국 역사 변동의 주역으로 떠오른 것이다.

20세기 초 마커스 가비(Marcus Mosia Garvey)와 같은 흑인 지도자들은 미국의 흑인들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아프리카로 돌아가 정착해야만 한다는 역逆 디아스포라를 제안하기도 했지만, 미국의 흑인들은 스스로 흑인이라기보다 미국인으로 규정했다. 자신들의 의지가 투표를 통해 현실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확인한 이상, 향후 흑인들의 현실정치 참여와 권리 청구는 더욱 도드라질 전망이다.

인구통계학적으로 앵글로-색슨을 중심으로 한 백인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히스패닉과 같은 ‘기타 인종’이 수에서 압도해 미래 미국 권력의 주류가 될 것이라는 전망은 이미 오래전에 제기됐다. ‘설마 진짜 그렇게 되기야 하겠어?’라는 의심도 있었지만, 예상보다 빠르게 현실이 돼가고 있는 모양새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에 남겨진 큰 과제다.
미국 외에도, 이민자와 난민 문제는 20세기 이래 국제 사회에 던져진 큰 화두다. 과거에도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같은 정치적 난민 문제가 있었으나, 오늘날 우리가 뉴스의 보도나 난민 어린이 돕기 모금 캠페인 등 미디어를 통해 매일 접하는 현대 난민 문제는 유럽의 제국주의가 그 출발점이다. 아프리카 대륙의 국경지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문화지리를 고려하지 않고 편의와 자국의 이익을 기준으로 자를 대어놓고 그어놓은 국경선과 국가의 테두리는 영원한 분쟁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수백 년 지난 제국주의를 탓하는 것은 역사 논리적으로는 합당한 일이지만, 난민 문제 해결 방안의 관점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너무 쉬운 접근이다. 구식민지 국가의 끝없는 내전과 분규는 문제를 너무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당위적으로, 서구 사회는 마땅히 난민을 수용해야 하지만, 분명히 양적 한계가 있을 것이다.

난민 유입이 미치는 사회·도덕적 영향의 관점에서, 난민이 모두 ‘선한 사람’인가에 대한 의문도 있다. 그럴 리가 없다. 인간이란 배가 너무 고프면 도둑질도 하고, 살고 싶어 거짓말도 하게 마련이다. 난민을 받아들이는 국가의 국민 역시 환영 일색일 리 만무하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텃세를 부리는 존재이고, 특히 경제가 어려워지고 일자리가 줄어들면, 대게 난민에 대한 감정은 극도로 악화돼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폭력이 행해지기도 한다.

보통 문제가 아니고, 끝날 문제도 아니다. 현행 최악의 난민 참사가 벌어지고 있는 시리아는 역사, 정치, 종교, 경제 문제에다 식량문제까지 더해졌다.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프리카 난민과 관련된 한 편의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정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장르 영화여서 관심이 간다.

영화[His House]의 한 장면
영화[His House]의 한 장면

영화 <그 남자의 집>과 아프리카 난민

<그 남자의 집>(His House)은 전쟁 중인 남수단(South Sudan)을 탈출해 영국으로 이주한 난민 부부의 이야기다. 장르는 호러다. 유령이 등장하는 공포영화이며, 그중에서도 ‘귀신들린 집’ 하위 장르다. 그러나 억울하게 살해당한 여자아이가 다락이나 지하실, 옷장이나 화장실 거울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와 관객을 겁주는 식의 장면으로 점철된 <아미티빌 호러>(Amityville Horror), <컨저링>(Conjuring)류의 슈퍼 내추럴 호러 영화와 결이 사뭇 다르다. 혼령의 저주는 당연히 억울한 죽음에서 비롯되지만, 개인적인 폭력에 의한 살해가 아니라 글로벌하고도 역사적인 배경의 구조적 폭력이다. 여기에 로컬 특유의 혼령 문화가 더해지며 독특한 질감의 영화가 됐다.

한낮의 햇빛이 작렬하는 열대의 어느 지역. 젊은 남편 볼(Bol)과 아내 리알(Rial)은 다섯 살 남짓한 딸 나이아각(Nyagak)을 안고서 열심히 이동 중이다. 넋 나간 표정의 어린 딸은 부적처럼 여자아이 인형을 손에 꼭 쥐고 있다. 잔뜩 경직된 가족의 표정을 클로즈업하던 화면은 곧이어 전반적인 상황을 넓게 보여주는데, 아프리카 어느 지역으로 보이는 곳에 난리가 나 흑인들이 도망 다니느라 바쁜 아비규환의 현장 한가운데다.

구체적으로 무슨 난리인지 설명되지는 않지만, 안 봐도 뻔하다. 수십 년째 뉴스 보도에 단골로 등장하듯, 쿠데타나 종교 갈등, 부족 갈등으로 인한 학살일 것이다. 대낮에 정부군, 반군, 성전聖戰 대원, 군벌 조직원 같은 놈들이 번갈아 몰려와 남녀노소에게 기관총을 무차별로 난사하니, 맨주먹 노동으로 하루하루 연명하는 힘없는 민초들은 혼비백산해 어린 자식들을 품에 안고 도망갈 뿐이다.

부부와 딸은 북새통을 뚫고 해안으로 향하는 트럭에 탄다. 탑승자와 차를 놓친 사람들의 겁먹은 눈망울에는 모두 저마다 반드시 살아야만 하는 절박한 이유가 그렁그렁 맺혀있다. 다음 장면은 난민들이 지붕도 없는 단출한 모터보트에 몸을 의지해 거친 날씨의 지중해를 건너는 장면이다. 사자성어 그대로의 일엽편주一葉片舟가 아프리카인 수십 명의 목숨과 희망을 연료로 위태롭게 파도를 가르고 있다. 북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넘어가는 배는 영웅 여정의 절정에 해당한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상당수가 죽었다. 바다를 건너면서 또 상당수가 죽는다. 유럽에 도착하면 상당수가 난민 신청을 기각당한다. 송환까지 되면 살해당하기 십상이다. 난민 탈출은 생존확률이 그리 높지 않은 목숨을 건 도박이다.

그러나 탈출에 성공한 후 난민으로 받아들여지기만 하면, 생존권 확보를 넘어 꿈에 그리던 사회에서 살 수 있는 인생 역전의 기회이기도 하다. 식량과 깨끗한 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최소한의 경제적 삶이 보장된 나라. 치안이 잘 돼 있어 매일 아침 죽을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최소한의 의료 안전망과 인권이 보장된 사회. 시민권을 획득해 취업을 하게 되면, 어쩌면 번듯한 선진국의 중산층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기회. 나는 죽을 고생을 해도, 어쩌면 내 새끼들은 글공부를 시켜 런던이나 뉴욕 같은 도시에서 의사나 변호사를 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꿈같은 기회가 된다.

한밤의 지중해, 캄캄한 물보라를 해치며 유럽을 향해 달려가는 모터보트의 아프리카인들은 모두 같은 꿈을 꾸고 있다. 이제 바다만 건너면 된다. 거의 다 됐다. 그 순간, 굉음과 함께 뭔가 심상찮은 사고가 나고, 화면은 우여곡절을 제대로 묘사하지 않고 시간을 건너뛰어 남편과 아내를 어딘가 다른 장소에 데려다 놓는다.

내가 죽은 건가? 남편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뜬다. 악몽이었다. 아내가 안쓰럽게 내려다본다. 둘러보니, 유럽 어느 지역 억류 시설의 방안이다. 다른 침대에 웬 흑인 사내가 무기력하게 벽을 보고 돌아 누워있다. 먼저 지중해를 건넌 아프리카 출신자임이 틀림없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바라본다. 사내는 혼자이고, 둘은 함께다.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부부가 함께 있으니 기댈 수 있다. 너무 다행이다.

갑자기 교도관 같은 사람이 들어와 부부에게 난민 인정 면접을 하자고 한다. 누워있던 사내가 벌떡 상체를 세워 눈을 부라리며 “헛된 희망일랑 품지도 마!(Don′t get your hopes up!) 너희들은 송환돼 다 죽을 거야. 저 자식들은 늘 그래왔거든!”이라고 소리 지른다. 웬 악담인가. 자신의 난민 신청이 기각된 모양이다.

심사가 진행된다. 영어를 쓰는 억양을 보니, 이곳은 영국이다. 위원 세 명이 무미건조하게 서류를 훑어보고 있다. 부부의 운명이 단 몇 분의 심사에서 결정된다. 심사위원의 단 한 마디에 부부의 목숨이 달렸다. 젊은 부부는 기장을 감추고 최선을 다해 좋은 인상을 주려고 웃는다. 그런데, 딸이 없다. 그러고 보니, 딸은 어디에 있나? 심사위원이 딸의 행방을 묻는다. 지중해 사고 당시 잃어버렸다. 불길한 기운이 감돈다. 심사위원장이 입을 연다.

“축하합니다. 억류시설에서 석방되실 겁니다.”

이게 웬일인가. 웃음이 절로 나온다. 살았다.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단, 조건이 있다. 망명 신청자 자격의 보석이어서, 정해진 기간 동안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구금 및 송환될 수 있다. 조건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매주 담당자에게 보고해야 하고, 약간의 돈을 지원받는 대신, 직업을 가질 수 없으며, 어떠한 형태로도 수입이 생겨서는 안 된다.

“아셨으면 ‘예’라고 답하세요.” 

기쁜 부부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라고 대답한다.

“마지막 조건은, 우리가 제공한 집으로 보내질 거고, 그 주소지에서 거주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이사하실 수 없습니다. 이해하셨나요? 이 거처가 이제 두 분의 집입니다(this is your home now).”

영국 정부에서 집을 준단다. 기쁨의 눈물을 참으며, 감격한 남편이 감사의 마음을 담은 다짐을 전한다.

“저희는 선한 사람들입니다.”
“아셨으면 ‘예’라고 답하세요!”

냉정한 말투에 놀라, 부부는 “예”라고 답한다.

“당신들이 선한 사람들인가 아닌가, 설득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지.”

그럼, 누구에게 선함을 입증하란 말인가?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아야 한다는 말 같기도 하다. 무언가 지은 죄를 숨기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도 하다.

기대치 않은 냉랭한 기운을 뒤로하고, 둘을 새로운 보금자리로 데려다줄 승합차가 출발한다. 을씨년스럽게 차가운 비가 내리는 그 유명한 영국 날씨다. 아내가 운전기사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만, 백인 운전기사는 대답이 없다. 이 사람들, 왜 이러나. 인격을 무시한다기보다, 없는 사람 취급을 한다.

밤새 달려 도착한 어느 마을. 기대에 부푼 부부는 깍지를 끼고 손을 꼭 잡는다. 도시 외곽의 공동주택 마을이다. 승합차는 택배 상품처럼 둘을 내려놓고 인사도 없이 금세 출발해버린다. 더 이상 이 사람들에게 기대할 것이 없음을 이미 깨달았다. 영국 생활 몇 시간 만에 이미 굉장히 높고 두껍고 견고한 벽을 느끼게 된다.

집 앞에 백인 사내가 기다리고 있다. 난민 담당 직원이다. 부부는 운이 좋아 꽤 큰 집을 얻게 됐다. 직원이 문을 열어 부부에게 집을 소개하며, 또 규칙들을 주절주절 늘어놓는다. 촛불 쓰면 안 되고, 담배 피우면 안 되고, 동물 못 키우고, 손님 못 들이고, 친구를 들일 수 없고, 파티 안 되고, 공놀이해선 안 되고…. 난민은 환영과 존중 대신 소량의 필수품과 대량의 금지 규정을 부여받게 된다. 집은 지저분하고, 전깃불이 켜지지 않아서 손을 봐야 한다. 그리고 2층집으로서, 둘이 살기에는 상당히 크다. 놀란 아내가 묻는다.

“이 집 전체가 우리 집인 건가요?”

직원이 그렇다며, 자신의 집보다 크다고 말한다. 직원이 떠나자, 새삼 감격이 울컥 치민다. 눈물과 웃음이 함께 나온다. 아내는 표정이 어둡다. 딸이 남긴 유품인 인형에서 장신구를 떼어 목걸이 삼아 목에 건다. 그렇게 밤이 되고, 우두커니 앉아 집을 감상하고 새 삶을 설계하던 남편은 문득 낯선 소리와 인기척을 느낀다.

벽에 전기설비나 매립 수납장을 위한 네모난 구멍이 여기저기 뚫려 있다. 소리는 거기서 들린다. 남편이 구멍으로 다가가자 뒤에서 뭔가 후다닥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게 뭔가. 잔뜩 겁을 집어먹은 남편은 깊고 긴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바닥에 엎드려 벽 아래 뚫린 컴컴한 구멍을 바라다본다. 벽 안에서 분명한 인기척이 들린다. 떨리는 손을 집어넣어 끊어진 전선을 잡는다. 뒤에 누군가가 있다! 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소름이 끼친 남편은 “이상한 나라야(Strange Country)”라며 질겁한다.

영국에서 쫓겨나지 않고 난민으로 받아들여져 살아가기 위해서는 “말썽 없이 선한 사람으로 살아가야만 한다”고 담당자가 당부했다. ‘이상한 나라’다. 부부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스스로 ‘선한 사람’들인데, 그 진술은 무시당했다. 그러더니 또 ‘선한 사람’이 되라고 한다. 아무래도 ‘선함’의 기준이 다른가 보다. 아니면 내가 그들과 다른 것 자체가 선한지 않은 것일지 모른다.

남편은 이 이상한 나라가 지정한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 그들 중 하나가 되기로 결심한다. 영국 서민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펍(pub)에 찾아가 TV로 프리미어리그를 시청하는 백인들과 비슷해지려 노력한다. 로봇 춤 세레머니로 유명한 잉글랜드 축구선수 피터 크라우치(Peter Crouch) 찬가를 신나게 따라 부르며, 영국인들과 동질감을 느껴보려 애쓴다. 손으로 음식을 먹던 고향의 밥상 문화를 버리고 햄버거도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해 먹으려 노력한다. 저가 대형마트를 찾아가 환하게 웃고 있는 광고 속 영국인 패션모델의 옷을 사 입는다.

그 와중에도 ‘괴상한 것’은 벽 안을 기어 다니고, 점점 노골적으로 실체를 드러내 방으로 걸어 나와 남편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괴상한 것’은 가면을 쓰고 있는 흑인 여자아이다. 다름 아닌 지중해에서 죽은 딸이다. 죽은 딸이 귀신이 돼 돌아왔다. 그리고 지중해에서 함께 죽은 다른 사람들과 고국에서 죽은 사람들까지 귀신이 돼 벽 속을 돌아다니다가 컴컴한 틈을 타 방으로 걸어 나와 남편을 공격하려 한다. 남편은 모든 과거를 부정하고 영국인이 되기 위해 수단에서 가져온 옷을 비롯한 물건을 죄다 태워버린다. 그래봤자, 귀신들은 끄떡없다.

이것들은 뭔가. 아내 역시 벽 속에 득실거리는 귀신들을 보게 된다. 딸도 보았다. 아내는 그것이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들었던 얘기 속의 아페스(apeth)임을 알게 된다. 한 가난한 사람이 집을 가지고 싶은 욕망이 너무 강해서 남의 것을 훔치기 시작한다. 강가의 한 집에서도 물건을 훔쳤는데, 가난한 이는 그 집 주인이 아페스인 것을 몰랐다. 가난한 이가 훔친 물건을 팔아 집을 지었을 때, 아페스도 그 집으로 따라 들어왔고, 집안의 온 벽들은 악귀들의 속삭임으로 가득 차게 됐다. 한 마디로 남수단의 한 맺힌 집 귀신이다. 그 귀신이 바다에서 솟아나 자신들의 집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아페스는 집주인을 집어삼킬 때까지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고 한다.

(위)케빈 카터가 찍은 “The vulture and the little girl”(아래)10월 29일 테러가 발생한 프랑스 남부 도시 니스의 노트르담 대성당
(위)케빈 카터가 찍은 “The vulture and the little girl”(아래)10월 29일 테러가 발생한 프랑스 남부 도시 니스의 노트르담 대성당

두려움에 사로 잡인 남편은 소리를 지르며 망치를 휘둘러 이 벽, 저 벽에 크고 작은 구멍을 낸다. 그러자 수많은 구멍은 때를 노리며 우두커니 자신을 바라보는 벽 속 귀신들의 무서운 시선으로 가득 차 버린다. 남편은 절박한 심정으로 담당 직원을 찾아가 집을 바꿔 달라고 부탁한다. 벽 속의 쥐 때문에 못 살겠다고 거짓말을 한다.

사달의 조짐이 보인다. 직원의 표정이 좋지 않다. 잠정적이나마 난민으로 받아주고, 돈도 주고 집까지 주었는데, 이들은 도대체 무언가. 어째서 열심히 노력해 적응하고 살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알지 못할 이유로 이상한 요구만 하는가. 난민에게 2층집을 줬는데 쥐 때문에 못 살겠으니 집을 바꿔 달라니. 이런 사람들을 어찌 감당하나. 직원 중 하나가 말한다.

“그 집은 우리 집보다 큰데.”
“우리 집보다도 커!”

다른 하나가 맞장구를 친다. 담당자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덤덤하게 말한다. 자신은 은행에서 일했던 괜찮은 직장을 가졌던 사람인데 일자리가 전부 외국으로 가버려서 이런 일을 하게 됐다. 굉장히 많은 사람이 생각지도 못했던 밑바닥까지 내밀렸음을 아셔야 한다.

담당자가 하는 얘기는 브렉시트(Brexit)에 관한 말처럼 들린다. 브렉시트는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이민자 문제가 방아쇠가 돼 촉발된 것은 틀림없다. 브렉시트 찬반 국민투표에서 자리를 잡은 이민자가 백인보다 숫자가 많은 런던과 같은 대도시는 유럽연합 잔류에 몰표를 던졌지만, 그 밖의 많은 백인 중심 지역이 영국의 ‘독립’ 혹은 ‘고립’에 투표했다. 그들이 가지는 피해의식은 바로 난민 담당자가 했던 말에 다 녹아있다. 난민을 받는 행위의 옳음에는 찬성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것까지는 하겠다. 그러나 이미 한계가 왔다. 다문화주의는 실패다. 더 요구하지 마라. 당신들 때문에 우리도 못 살겠단 말이다.

남편은 숨이 막힌다. 그런 영국 내 백인들의 경제적 지위 변화와 일자리, 국제관계의 상관관계 따위는 전혀 모르겠다. 당장 영국 정부가 임시로 내어준 내 집의 온 벽에는 아프리카에서 달고 온 귀신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귀신 얘기는 차마 못 하겠고, 여하간 집을 바꿔 달란 말이다.

직원은 조사원을 파견하기로 한다. 집을 망치로 부숴 놓아 “말썽 없이 선한 사람으로” 살지 않은 것은 결정적인 송환 사유가 될지도 모른다. 부부는 고국에서 데려온 ‘토종 귀신’ 때문에 영국에서 쫓겨나 고국으로 송환될지 모를 위기에 처했다. 유엔 평화유지군도 대학살을 막지 못하는 죽음의 땅 말이다. 어이없는 일이다. 영국에서 귀신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고국으로 돌아가 죽을 일만 남았다.

끝없는 난민 문제와 문명의 충돌

남수단의 문제를 상징하는 사진 한 장이 있다. 1993년 3월 26일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것으로, 굶어서 죽어가는 여자아이를 독수리가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충격적인 사진으로 <독수리와 어린 여자아이>(The Vulture and the Little Girl)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빈 카터(Kevin Carter)가 찍었고, 이를 통해 퓰리처상을 받았으나, 사진을 찍기 위해 죽어가는 여아를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관계와 어긋나는 비난을 받게 돼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층적인 비극을 안고 있는 사진이 아닐 수 없다. 사진의 내용만으로, 이 나라가 어떤 상태인지 짐작할 수 있다.

남수단의 난민 문제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심각하다. 영국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아 공식 언어가 영어다. 1954년 수단이 독립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사실상의 내전 상태가 유지됐다. 군사 쿠데타가 여러 차례 일어났고, 학살이 수시로 자행됐다. 이후 2011년 남수단이 독립했다. 1천만 명이 좀 넘는 정도의 총인구 중 난민, 이재민, 피난민, 국내 실향민을 합쳐서 약 430만 명이 살던 곳을 떠났다.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가장 많은 230여만 명의 난민이 고국을 떠났고, 그중 80%가 여성과 어린이이며, 63%가 18세 미만의 어린이와 청소년이라고 한다.

기가 막힌다. 숫자만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약자들의 두려움과 슬픔이 느껴진다. 난민 중 160만 명이 이웃 나라인 수단과 우간다로 향했고, 수단과의 갈등 기간 내전을 합해 200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부 아랍계와 기독교, 토착신앙을 믿는 남부 아프리카계의 갈등과 함께, 2013년부터 정부군과 반군 사이 내전이 발발했다.

엄청난 수의 난민은 자연스럽게도 집단 이주 문제로 연계되고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 미국의 흑인이나 히스패닉과 같이 정치 지형도와 국가 정체성을 바꿔놓게 될 것이다. 이미 유럽 주요국은 난민 문제로 크나큰 갈등을 겪고 있으며, 최근 북아프리카인들이 대대적으로 이주해 정착한 프랑스 남부 도시의 한 성당 앞에서 교사가 무슬림 청년에게 참수당하는 테러 사건이 발생한 데서 보듯, 문제는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새뮤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이 <문명의 충돌>에서 주장한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헌팅턴은 미국의 히스패닉화 현상이 미국의 정체성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것으로도 보았다. 저서 <우리는 누구인가? 미국국가 정체성의 난제들>(Who Are We? The Challenges to America′s National Identity)을 통해 헌팅턴은 역사적으로 청교도(puritan)와 같은 영국계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라 만약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인이 주류가 돼 미국이 건국됐다면 과연 지금 우리가 아는 ‘그 미국’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물으며, ‘노(no)’라고 자문자답한다. 그들이 점령하고 지배하고 이민자를 보내 세운 나라들이 있다. 지금의 퀘벡, 멕시코, 브라질이다. 결코 미국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2003년을 기준으로 1천만 명의 불법 이민자가 미국으로 유입됐는데, 그중 58%가 멕시코로부터 왔다. 그들의 3분의 2가 서부로 갔고, 거의 절반이 캘리포니아에 터를 잡았다. 헌팅턴이 보기에 특정 지역과 언어에 집중된 현행의 히스패닉화는 미국을 기존의 미국과 히스패닉 미국의 양 갈래로 나누게 될 것이며, 종국에는 국가 정체성 유지 역시 어렵게 된다.

뾰족한 해결책은 없어 보인다. 오랜 역사를 가진 너무나 복잡한 구한들의 연쇄로 이뤄져 있다. 갈등을 관리하며 끌어안고 가야 할 문제다. 이 와중에 난민의 인권에 이어 정체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난민’은 한 인간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용어가 아니다. 그 낱말로 한 인간을 설명할 수 없다. ‘난민’이라는 용어는 그들 한 명 한 명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간단한 사실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난민의 ‘난민임’이라는 강제된 정체성은 또한, 난민들 스스로 인간이 아닌 ‘난민’으로 규정하게 만든다.

<그 남자의 집>에서 부부는 결국, 자신들의 잘못된 과거 행적이나 아프리카에서 달고 온 귀신들을 부정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새 출발’은 과거를 부정하고 유럽인이 되고자 하는 노력, 다시 말해 ‘난민성’을 세탁하기 위한 자기 부정에서 시작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난민의 인권과 정체성 문제에 접근하는 첫걸음은 그들 하나하나가 자기만의 역사를 가진 인간임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김기홍 한성대학교 크리에이티브인문학부 교수
김기홍 한성대학교 크리에이티브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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