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생각나는 첫 답사의 아련한 추억
대학에 들어와 처음 간 답사가 기억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들어선 군사 정권 시절의 엄혹함 속에서 전라도로 첫 답사를 떠났다. 정읍 동학혁명기념탑과 전봉준 고가까지 콘보이(convoy)해줬던 경찰차, 동학혁명기념탑 앞에서 동학혁명전적지에 대한 브리핑을 하던 정읍군수의 모습, 강진 다산초당을 답사하고 강진 시내에서 저녁을 먹을 때 넉넉하게 밥을 퍼주던 식당 아줌마의 인정 넘치던 모습, 그리고 해남 대흥사 부근 유선관 여관 앞을 흐르던 개울가에서 이른 새벽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던 일까지 생생하게 기억난다.

우리 일행은 유선관에서 1박을 하고 대흥사를 둘러보고 인솔자의 안내에 따라 1시간 넘게 숨을 헐떡이며 두륜산 산행을 해 ‘일지암’이라는 곳까지 올라갔다. 그곳은 바로 우리나라에 차 문화를 본격적으로 중흥시키고 퍼뜨린 초의선사가 머물렀던 곳이라는 설명을 들으면서 왜 땀 흘려 올라와야만 했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강요당해야만 했던 적이 있다. 그땐 정말 몰랐었다. 그 후에 ‘일지암一枝庵’을 이렇게 자주 들리리라고는 ….

다산 정약용을 스승으로 섬기고, 추사 김정희와 돈독한 우정을 쌓았던 둘도 없는 친구 초의선사는 호남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초의선사는 차 문화를 널리 대중화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목포, 무안이 낳은 다도茶道의 선구자
차 문화의 선구자, 초의선사의 본명은 의순(意恂 ; 1786~1866)이다. 조선 후기에 활약한 승려로서 호는 초의草衣, 성은 장張, 자는 중부中孚이다. 그의 탄생지는 전남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 943번지 일원(목포시와 무안군의 경계선에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15세에 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뒤 남평南平 운흥사雲興寺에 출가해 금담金潭에게서 선을 닦고, 윤우(倫佑 ; 대흥사를 중창한 해남 출신의 승려)의 법을 이어받았다. 산스크리트어 및 신상(神像 ; 신령의 화상이나 초상)에 능했고, 정약용에게서 유학과 시문詩文을 배웠다.

신위申緯·김정희金正喜 등과 사귀면서 해남의 두륜산頭輪山에 일지암을 짓고 40년간 지관(止觀 ; 지는 모든 번뇌를 끝냄이요, 관은 자기의 마음을 관찰하는 것으로 어지럽게 흐트러진 망령된 생각을 그치고 고요하고 맑은 지혜로 만법을 비추어 보는 일)을 닦았다. 서울 봉은사奉恩寺에서 《화엄경》을 새길 때 증사(證師 ; 3사 7증의 준말. 계화상, 갈마사, 교수사의 3사와 덕이 높은 스님 7명을 증인으로 구족계를 줄 수 있다 해 증사라고 함)가 됐고, 달마산達摩山 무량회無量會가 창립되자 강석講席을 주재했다.

초의선사는 해남 대흥사大興寺에 오랫동안 주석하면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대선사로서 선의 법맥을 이어 갔다. 시詩·서書·화畵·다茶에 뛰어나 사절四絶이라 불렸는데, 특히 그림을 잘 그려 불화나 인물화 등 대흥사에 있는 그림은 거의 대부분 초의선사가 그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초의선사는 남종화의 거두인 소치 허유(나중에 허련으로 이름을 고침)를 길러내기도 했다.

특히 초의선사는 ‘한국의 다승’으로 우리나라의 다도를 정립했다. 대흥사를 중심으로 직접 차를 기르고 좋은 종자를 개발하는 데도 힘써 그 지역을 차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또한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비롯해 수많은 다시茶詩를 지어 다도의 이론적 확립을 모색했다. 스님의 선 사상 역시 다선삼매茶禪三昧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였으니, 스님에게 있어 차는 “불가의 오랜 음다풍飮茶風을 넘어서서 예술과 선 수행의 경지로까지 승화했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다.

선禪 사상과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을 부르짖다
초의선사의 출생지로 알려진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 봉수산 자락에는 선사의 높은 정신을 기리고 추모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생가를 복원하고, 추모각, 추모비, 유물전시관, 다도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초의선사(1786~1866)는 조선 후기 불교계에 선풍을 일으키고, 그동안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우리 차와 다도를 중흥시켜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인물로서 다산 정약용에게 다도를 가르쳤고 평생 친구인 추사 김정희, 소치 허련 등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으며 〈동다송東茶頌〉을 지어 우리 토산 차茶를 예찬한 인물이다.

초의선사의 사상은 선禪사상과 다선일미茶禪一味사상으로 집약되는데 다선일미 사상은 차茶 안에 부처님의 진리와 명상의 기쁨이 녹아있다는 것이다. 그가 지은 <동다송東茶頌>에 보면 이런 글이 보인다.

차[茶] 생활이란?
차 따기는 그 묘妙를 다하고 만들기는 그 정성을 다하고 물은 그 참된 것을 얻고 물 다루기는 그 중용을 터득하고 체體와 신身이 서로 화합되고 건실함과 신령스러움이 서로 함께 해야 한다 이에 이르면 다도茶道는 다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초의선사는 조선의 다경茶經으로 불리는 〈동다송東茶頌〉을 써서 조선 차의 우수성을 알렸고, 다도의 정신과 선禪이 하나라는 다선일미설茶禪一味說을 강조했다. 또 찻잎을 따서 덖고 우리고 마시는 법을 상세히 기록한 〈다신전茶神傳〉을 남겨 조선의 다도를 정립했다.

초의선사가 다도의 길에 들어서고 다선삼매茶禪三昧의 경지에 이른 데는 다산 정약용의 영향이 컸다. 차의 언덕을 의미하는 ‘다산茶山’이라는 호에서 알 수 있듯이 정약용은 무척이나 차를 좋아했다. 그가 차에 깊이 빠진 계기는 1801년부터 시작된 전남 강진에서의 유배생활과 무관하지 않다. 다산은 차로 화병과 속병을 다스렸다고 할 수 있다. 다산도 처음에는 차를 받아 마시는 수준이었지만 나중에는 손수 제조해서 마시는 수준에 이르렀다.

1809년 다산초당으로 스물네 살의 젊은 승려가 학문의 배움을 얻고자 찾아온다. 다산은 그에게 유학뿐 아니라 제다법도 가르쳤다. 이렇게 시작된 초의선사와 다산의 인연은 다산의 큰아들 유산 정학연으로, 유산과의 인연은 추사 김정희로, 추사와의 인연은 당대의 지식인들과 사대부들에게로 이어진다. 그 매개체가 바로 ‘차’였던 것이다.

초의선사는 대흥사로 거처를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차를 만들었는데 누구라도 초의가 만든 차, 즉 ‘초의차’를 마시면 매료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절에 차는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한 차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만 차가 생산되고 중국 차가 최고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초의선사가 〈동다송〉에서 우리 차의 우수성을 설명한 것도 그래서였다. 추사가 제주 유배 중에 초의에게 차를 보내 달라고 그토록 졸랐던 이유는 다른 곳에서는 그만한 차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초의선사가 만든 ‘초의차’는 어떤 차였을까. ‘초의차’를 마신 후에 약효를 본 범해선사가 초의선사가 차를 만드는 과정을 시로 남겼다.

곡우에 이제 막 날이 개어도 / 노란 싹 잎은 아직 펴지 않았네
빈 솥에 세심히 잘 볶아내 / 밀실에서 아주 잘 말리었구나
잣나무 그릇에 방원方圓으로 찍어 내어 / 대껍질로 꾸려 싼 다음 저장한다네
잘 간수해 바깥 기운을 단단히 막아 / 한 사발에 향기 가득 떠도는구나   - 범해선사, 〈초의차〉 -

곡우 날 이른 새벽 아직 잎이 펴지도 않은 새순을 따서 차를 만든다. 새순은 새끼손가락 손톱만큼 작아서 세심한 손길이 필요하다. 무쇠솥을 뜨겁게 달군 후에 정갈하게 볶아 밀실에서 적당히 말린 후, 적당히 마른 찻잎을 잣나무 그릇(틀)을 이용해 네모와 동근 모양으로 찍어낸 다음 대나무 껍질로 잘 포장해둔다. 이처럼 바깥 기운을 단단히 막아 잘 간수한 덕에 향과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범해선사가 약효를 볼 수 있었던 것도, 추사가 제주에서 절대고독의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초의선사가 이처럼 정성껏 만들어서 보낸 ‘초의차’의 힘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차가 건강에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까이 두고 자주 마시는 것을 꺼리는 사람이 많다.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다도’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일일이 다 지키려면 번거롭고 까다롭다. 초의선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다도는 바로 이것이었다. 초의선사가 쓴 〈다신전〉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차를 마실 때는 사람 수가 적은 것이 가장 고귀하다. 차를 마시는 사람의 수가 많으면 소란스럽고 소란스러우면 차를 마시는 아취를 찾을 수 없다. 홀로 앉아 마시면 신비롭고 두 사람이 함께 마시면 고상한 경지가 있고 3~4인이 어울려 마시는 것은 그저 취미로 차를 마시는 것이고 6~7인이 모여 차를 마시면 그냥 그저 평범할 뿐이고 7~8인이 모여 앉아 마시는 것은 서로 찻잔을 주고받는 것일 뿐이다.”

초의선사가 ‘초의차’를 만들고 〈다신전〉을 쓴 이유는 ‘조주차’가 어떤 것인지 알리기 위해서였다. 조주차라는 이름은 ‘끽다거(喫茶去 ; 차 한잔 마시고 가라)’와 ‘방하착(放下着 ; 마음속의 집착을 내려놓는다는 뜻)’이라는 화두를 비롯해 선문답으로 유명한 당나라 조주선사의 이름에서 따왔다. 차와 선이 하나이길 기대하던 초의선사의 바람을 알 수 있다.

다방면에 걸친 예능적 기질의 소유자
어느 해 입춘, 제주에서 유배 중인 추사 김정희가 집에서 제일 예쁜 대접을 골라 깨끗이 씻어 장독대에 올려 두었다. 날마다 아침이면 대접을 살피러 나갔다. 그러다 밤새 비가 내린 다음 날 대접에 빗물이 고여 찰랑거렸고, 추사는 그 대접을 조심스럽게 받쳐 들고 방으로 들어와 벼루에 빗물을 붓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먹물로 벗에게 편지를 썼다.

추사가 그해 처음 내린 봄비로 쓴 편지를 받은 벗은 초의선사草衣禪師였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었다. 제주는 우리나라에서 봄이 제일 먼저 도착하는 곳이니, 추사가 친구에게 선물한 것은 우리나라에 제일 먼저 온 ‘봄’이었다. 초의선사 또한 해마다 제일 먼저 나온 찻잎으로 차[茶]를 만들어 선물했는데, 이는 깊은 우정이 아니면 갖기 힘든 정성이었다.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주 차를 보내 달라’고 조르는 내용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으며 찻값으로 글씨를 써서 보냈다. 그런데 요즘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다. 차를 마시고 싶으면 제주에서 차를 구해 마시면 될 일이었는데 친구인 초의선사에게 폐를 끼쳐 가며 번번이 아쉬운 부탁을 했다. 그것은 ‘초의차’가 가장 맛있는 차였기 때문이다.

초의선사의 이러한 다도와 ‘초의차’는 초의선사를 다방면에 걸친 예능으로 떨쳐 보였던 예술인으로 승화시켰다. 그의 예술세계는 시詩·서書·화畵 세 분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으며, 그 대강의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시詩 부문에 있어서 초의선사의 시문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경탄을 금치 못했을 정도의 것이었다. 선사도 여러 문사文士와 어울려 수시로 시회詩會를 즐겼으며, 이름난 문장가들은 앞다투어 선사와 시를 교유하기를 원했다.

선사의 시는 ‘맑고 심오하고 소순기(蘇筍期 ; 채식을 하는 사람이 지은, 말이 차고 거친 느낌을 주는 시를 이르는 말)를 벗었으며 담백하면서도 높은 뜻과 격조를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초의선사는 두릉시사杜陵詩社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두릉시사의 구성원은 정약용의 아들 유산酉山 정학연丁學淵과 운포耘逋 정학유丁學游, 그리고 진재眞齋 박종림朴鍾林, 광산匡山 박종유朴鍾儒 등이다. 이외에도 ≪초의시고≫에는 연사蓮社, 청량사淸凉寺 모임 등 많은 모임명이 나오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문사들의 수를 세어 보면 전체적으로 37명에 달한다. 40여 년을 국토의 최남단 해남 땅 대흥사 일지암一枝庵에서 주석한 것에 비해 많은 인물과의 잦은 만남이라 여겨진다. 이 역시 스님의 인품과 빼어난 문학적 재능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홍석주洪奭周의 ‘호남의 스님 초의는 학자, 선비들과 교유하기를 좋아했는데, 그의 시문은 속성俗性을 벗었고, 또 정결, 간명해 마치 당, 송시대의 그것과 같이 군더더기가 없이 맑다’라는 표현과 신위申緯의 ‘시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 스님 가운데서도 시인은 많았으나 도중에 끊기고 말더니 이제 의순(초의선사)의 시를 얻었도다’ 하는 표현을 통해 초의선사의 시 세계가 지니고 있는 탁월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한편 초의선사는 시뿐만 아니라 서書 부문도 탁월했다. 초의선사의 제자인 범해 각안梵海覺岸이 지은 <동사열전東師列傳>에는 초의선사의 범서梵書가 당시 모든 서예가 사이에서 정평이 나 있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스님의 범자 서예가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내용이다.

또한 선사의 필적을 많이 접한 서예가들은 특히 예서가 뛰어났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하지만 선사의 진적眞蹟은 대부분 그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며, 이로 인해 초의선사의 서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전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초의선사는 화畵 부문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는데, 특히 불화 솜씨는 근대 불화 작가들 가운데 최고로 손꼽힐 정도였다. 현재 대흥사에 소장돼 있는 관음도 두 점은 선사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대광명전에 그려 놓은 단청 역시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한국 최고의 근대화가인 소치 허련이 처음 선사의 문하에서 시와 그림을 배웠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선사의 화재畵才는 충분히 짐작된다고 하겠다. 불화 이외의 작품으로는 <백운도白雲圖>와 <다산초당도茶山草堂圖>가 널리 알려져 있다.

찻물 끓이듯 정성스럽게 삶을 꾸리다간 선사
다방면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초의선사는 스스로 낮추기를 반복하며, 선과 다도의 길에 정진했다. 58세 때 고향을 찾아 읊은 시를 보면 그의 겸양의 모습을 알 수 있다.

고향에 돌아오다[歸故鄕]
멀리 고향을 떠난 지 사십여 년 만에 / 희어진 머리를 깨닫지 못하고 돌아왔네.
새 터의 마을은 풀에 묻혀 집은 간데없고 / 옛 묘는 이끼만 끼어 발자국마다 수심이 차네.
마음은 죽었는데 한은 어느 곳으로부터 일어나는가? / 피가 말라 눈물조차 흐르지 않네
이 외로운 중[僧] 다시 구름 따라 떠나노니 / 아서라, 수구首邱한다는 말 참으로 부끄럽구나.

초의선사가 71세 되던 해, 42년간 금란지교를 맺어온 추사 김정희가 과천 청계산 아래에서 유명을 달리하자, 그의 영전에 ‘완당김공제문’을 지어 올리고 일지암에 돌아와 쓸쓸히 만년을 보내다가 81세(1866년, 고종 3) 법랍 65세를 일기로 대흥사 쾌년각에서 서쪽을 향해 가부좌를 하고 입적했다.

초의선사가 부르짖은 다도는 결코 복잡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차는 무미無味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내면과 타인, 세상을 관조하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하는 까닭에 차의 맛을 못 느끼는 것은 아닐까? 우리에겐 물을 끓이고 찻잎이 우러날 때까지 기다리고 한 모금씩 넘기며 한 잔을 마시는, 딱 그만큼의 시간조차 없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요즘과 같은 ‘코로나 블루’ 시대에 우리의 몸과 맘의 건강을 위해 차 한 잔을 벗 삼아 보면 어떨까 싶다.

이도남 건국대학교 사학과 강사
이도남 건국대학교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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