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사이야기] 혼돈 시대의 지식인, 이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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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이야기] 혼돈 시대의 지식인, 이규보
  • 신안식 가톨릭대학교 인문사회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21.02.09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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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과 갈등, 혼돈의 시대
지난해는 온 세상이 ‘코로나-19’로 뒤덮였고, 새로운 시대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혼돈이 언제 끝날지 아직은 섣불리 예단하기 어렵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저변에는 서로의 불신과 갈등이 비등하고, 매체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기사와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 사회가 왜 이리됐을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도는 정녕 요원한가?

많은 생각이 들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은 어떤 자세로 사회를 바라보고 참여해야 하는지 알아보는 것도 의미 있겠다. 800여 년 전 천재 지식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 의종 22~고종 28)는 무신정권이라는 혼돈의 시대를 어떻게 살았을까?

천재의 현실
이규보는 16세 때 처음으로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이후에도 18세, 20세에 계속 응시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그 까닭은 술과 시 짓기만 일삼고 과거에 대한 글은 연습하지 않은 데 있었다. 22세가 되던 1189년(명종 19)의 사마시에 응시해서 마침내 합격했고, 그다음 해의 예부시禮部試에 급제했다. 하지만 정식 관료가 되기에는 시대가 매우 어수선했다. 이 시기가 무신정권이 왕권을 억누르면서 권력을 좌지우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신이 출세하는 데 많은 제약이 있었다.

1191년(명종 21) 그가 24세가 되던 해에는 아버지의 상을 당해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이후 천마산天磨山에 머물면서 백운거사白雲居士라 자칭하고 백운거사어록과 전傳을 저술해 자신의 행적을 남겼다. 26세 때 『구삼국사舊三國史』 가운데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사실을 보고 자신의 포부와 자부심을 영웅서사시 「동명왕편」에 토로했다. 『동명왕편』에서 노래하는 영웅의 역사는 단지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교훈을 주는 것이었다.

“자고로 제왕이 일어남에 / 많은 징조와 상서가 있으나 / 끝 자손은 게으르고 거칢이 많아 / 모두 선왕의 제사를 끊어뜨렸다 / 이제야 알겠다 수성하는 임금은 / 신고한 땅에서 작게 삼갈 것을 경계해 / 너그럽고 어짊으로 왕위를 지키고 / 예와 의로 백성을 교화해 / 길이길이 자손에게 전해/ 오래도록 나라를 통치했다.”

이것은 「동명왕편」의 내용이 전해주는 교훈으로서 관인寬仁으로 왕위를 지키고, 예의禮義로 백성을 교화해야 한다는 유교 정치이념을 제시한 것이다. 이는 이규보가 처한 고려사회의 현실에서 경험했던 군주권의 약화와 관련된 지적이다. 즉 무신집권기의 유약하고 나태한 국왕의 모습을 본 이규보가 고구려 시조의 생애를 시로 지어 국왕에 대한 간접 비판을 나타낸 것이었다.

1197년(명종 27) 그의 능력을 높이 산 명망가들의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천거했으나 반대파들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199년(신종 2)에 집정자 최충헌에 의해 마침내 등용돼 전주목사록 겸 장서기로 보임됐다. 그러나 이듬해 모함을 받아 파직돼 경기도 광주로 돌아왔다. 이후 그가 여러 차례 구관求官 및 천거 등을 통해 다시 관직에 나아가고자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언제나 벼슬이 없어 / 사방으로 걸식함을 즐기는 바 아니나 / 날 보내기 지루함을 면하고자 함이라 / 아! 인생일세 받은 운명 어찌 그리 괴로운가!”

왜 그는 이렇게 벼슬을 구하고자 했을까? 전주를 떠나 처형妻兄의 집에 머물면서 자신의 심정을 “우연히 하찮은 녹을 바라 강남까지 갔었구나”라고까지 했던 사람이 이렇게 구구절절한 탄식을 하기에 이르렀을까? 관료로 진출한다는 것은 때때로 현실정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는 측면과 반대로 현실정치의 부정부패 등의 불합리한 내용을 개혁하고자 하는 측면이 있을 수 있다. 이규보가 읊고 있는 이 「무관無官」의 시에서 적극적으로 현실을 인정하면서 제 뜻을 펼쳐 보고 싶어 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관료가 되기 위한 열망
군주에 대한 충忠은 신하 된 자가 가지는 당연지사다. 그러나 이런 것은 무신정권기에 성립할 수 없었다. 군주보다는 집정자가 우위에 있었고, 그를 중심으로 인사 및 정책 등이 이뤄졌다.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관료로 나아갈 수 없었고, 나아가더라도 미관말직에 머물러 자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규보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인정이었다.

이규보는 전주에서의 관직 생활 뒤 많은 굴곡을 거쳤다. 이미 불우한 신세가 돼 문을 닫고 들어앉아 출입하지 않았고, 혹은 1202년(신종 5)에는 경주의 농민반란을 토벌하는 데 수제원修製員으로 참여해 문서 등을 만드는 일을 돕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공과는 평가되지 않았고 다만 참여함으로써 최씨 정권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있음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이때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그였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구관求官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게 됐다. 당시 수많은 문인 가운데 자신의 위치는 자타가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농촌의 현실을 보면서 가졌던 개탄과 의협심, 그리고 이를 개혁해야 한다는 소명 의식 등은 자칫 최씨 정권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현실 참여를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현실을 인정한 가운데 최씨 정권을 배경으로 삼아야만 했다.
마침 그의 나이 38세 때 인사관리 등을 맡고 있던 최선崔詵에게 문생門生으로서 자신을 천거해준 것에 대해 인사차 들렀다가 중요한 정보를 듣고 그에게 글을 올려 관직을 구했다.

“삼가 듣건대, 문한의 직에 결원이 있다고 하니, 가령 잠시 그 직에 임용해 제가 마음에 배웠던 것을 시험해보시되, 맞지 않는 것이 있어 각하의 사람 쓰는 지감知鑑에 오점을 남기게 된다면, 물리치고 배척하셔도 좋을 것이요, 저도 마음에 섭섭함이 없을 것입니다. 대저 시험해보지도 않고 그 능력을 책망하는 것은 시험한 다음에 그만두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저 역시 말해 보지도 않았다가 후회하게 됨은 말을 다 한 뒤에 후회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래서 제가 부득부득 이런 말씀을 드려 또한 각하께서 먼저 가능한지를 시험해보시기 바라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 자신이 쓰이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보다는 이제라도 좋으니 다시 한번 생각해 달라는 하소연이 담겨 있다. 그런데 그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는 복관復官되지 않았다. 왜 최선은 그를 문한의 직에 들이지 않았을까? 최선은 최씨 정권기에 재상의 직을 누린 대표적인 인물로서 인망도 있었다. 그의 외손녀는 집정자 최이崔怡의 처가 됐다. 그의 인망과 최씨 정권과의 인척 관계는 매우 두터운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천거한다면 별문제가 없었을 것이지만, 이규보는 문한직 조차 나갈 수 없었다.

“선비가 벼슬을 시작하는 것은 구차하게 자기 한 몸의 영달만을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개 앞으로 배운 것을 정사에 실현하되 경제시책經濟施策을 진작해 왕실에 힘써 실시함으로써 백세토록 이름을 전해 소멸하지 않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이규보는 일면 최씨 정권을 속으로 인정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왕실 즉 왕권의 운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규보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 유자儒者로서 갖는 당연한 의식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으나, 그는 최씨 정권보다는 왕권주의 혹은 왕당파 정도로 인식될 수 있는 측면이 있었다. 특히 그가 문인으로서 가진 시문의 능력은 반대로 무신세력을 기반으로 가진 최충헌에게는 의심의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이규보의 복관은 어려운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좀 더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사고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그는 집정자 최충헌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받쳤다.

“물物은 천지에서 나는 것인데 공이 능히 변화變化·이역移易하기를 조물자造物者와 함께 표리가 되므로 물 중에는 공에게 사역돼 공에게 이용된 것이 많다. 비단 물뿐 아니라, 사람의 신심身心을 닦아 기르는 데도 또한 두루 갖추었다고 할 수 있는데 누가 공에게 이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해 그는 1207년(희종 3) 마침내 직한림원에 임시로 보임됐다가 이듬해에 정식으로 임명됐다. 이규보는 비로소 집정자가 누구인가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에 대한 충성과 존경을 표함으로써 소망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승진은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최충헌의 아들이자 2대 집정이 되는 최이와 인연을 만들면서 그도 새로운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무신정권에 함께한 관리일지 나름의 뜻을 펼치려한 지식인일지 현실과 이상을 고민한 흔적 보여"

관료로서의 갈등과 영광
최이가 최충헌을 이어 집정을 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최충헌이 만들어놓은 정치구조를 그대로 계승했고, 또 왕실과의 관계나 다른 신료들과의 관계도 대부분 그대로 유지했다. 하지만 집정자의 교체는 이규보에게 있어서 중요한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최충헌 집권기에 있어서 이규보는 많은 지식인 중의 하나였지만, 최이에게 이규보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여기에는 이규보가 그동안 쌓아온 여러 가지 기반과 교분이 작용한 것이기도 했다.

계양도호부로 나가 있던 이규보는 1220년(고종 7) 시예부낭중 기거주지제고에 임명돼 중앙으로 올라가게 됐다. 61세가 되던 1228년(고종 15)에 그는 마침내 중산대부 판위의사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돼 예부시의 시관試官이 됐다. 하지만 다시 그는 63세 때 팔관회의 일로 최이로부터 문책을 받아 위도渭島로 귀양 갔다가 곧바로 고향 황려현으로 옮겨졌다. 팔관회를 열 때 옛날 규례에 어긋난 일에 대한 논쟁에서 이규보는 단순히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대간이 재상을 꾸짖었다는 죄목으로 함께 의심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이규보는 다시금 이전에 최충헌으로부터 받았던 억울함을 갖게 됐고, 꿈 내용을 시로 읊으면서 “우리는 쌓은 지식을 믿고 / 의리를 펴 나라를 다스리고자 했네 / 때에 임금이 쓰지 않아 / 귀양살이 신세가 됐노라”라고 했다. 여기에서는 섭섭함과 그에 대한 토로, 다시 불러주고 알이 줌에 감사함 등이 교차해 나타나고 있다. 관직 생활 30, 40년 하면서 강직함이나 혹은 비리에 연루돼 귀양이나 좌천을 당하는 것은 거의 일반적이라고 볼 때, 이규보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최이로부터의 문책은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 후 1231년(고종 18) 몽골의 침략에 대비해 이규보는 백의종군으로 개경의 보정문을 지켰으며, 산관散官으로 있으면서 몽골과의 교류에 필요한 서표書表와 문첩文牒을 작성했다. 이듬해 정의대부 판비서성사 보문각학사 경성부우첨사지제고에 제수돼 최이정권에 다시 기용됐다. 이후 지공거知貢擧를 두 차례 맡아 예부시를 주관하기도 해 관직 생활에 있어서만큼은 죽을 때까지 더 이상의 부침이 없었다.

대몽전쟁이 시작되자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해 대몽전쟁의 수행 및 내부안정 그리고 국론의 통일을 기했다. 이런 시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규보는 당시의 정세와 정치구조의 변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일단 강화천도가 시작된 시점부터 보면, 그는 강화천도를 단행하지 않았더라면 고려는 이미 몽골에 의해 지배됐을 것이라고 하면서 천도에 대해 지극히 탁월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천도란 예부터 하늘 오르기만큼 어려운데 / 공 굴리듯 하루아침에 옮겨왔네 / 청하의 계획 그토록 서둘지 않았더라면 / 삼한은 벌써 오랑캐 땅 됐으리 / 백치 금성에 한줄기 강이 둘렀으니 / 공력을 비교하면 어느 것이 나은가 / … / 강물이 금성보다 나은 줄 안다면 / 덕이 강물보다 나은 줄도 알아야 하리.”

강화천도는 몽골의 기동력에 대응해 고려의 지리적 여건을 최대한 이용하고자 한 것이었다. 강화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면서 개경에서도 가깝고 토질도 비옥한 터라 자급자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의 내용 마지막 부분에서 이규보의 본심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 초점은 덕치德治를 제창하는 데 있었다. 최이에게 입는 은혜와 왕권의 회복이라는 문제로 다시금 갈등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만년의 이규보 모습은 이웃집 할아버지와 같은 편안함이 있었다. 대머리에 수염은 하얗게 세었고 얼굴은 그동안의 술로 인해 불그스름하며 배는 불룩하게 나온 마치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보는 그러한 모습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넉넉하게 손자들을 대하고 심오한 눈빛을 가졌으며 모든 세상 풍파를 겪은 달관자의 모습이 그에게 담겨 있었다. 1241년(고종 28) 병을 얻자 최이는 이규보가 평소 지은 전후 문집 53권을 모두 가져다가 판각해 그를 위로하려 했지만, 이규보는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나이 74세였다. 나라에서는 죽음을 애도하면서 3일 동안 조회를 멈추고, 시호를 문순공文順公이라 했다.

동국東國의 상국相國 이규보, 천재의 오만함과 제 뜻대로 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좌절감, 그런데도 청렴 강직하면서 올바른 군주와 신하 상을 만들고 싶어 했던 모습을 그의 생애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이규보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시를 빌어서 그 아름다움과 소박함 등을 표현한 당대 최고의 시인이기도 했다.

혼돈의 무신정권기 속에서 좌절한 지식인 상이 아닌, 적어도 역사의 흐름에 동참함으로써 제 뜻을 펼쳐 보이려 했던 그의 모습은 결코 비굴하다거나 정권에 아부했다거나 하는 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경세經世를 위해서는 그만큼의 능력과 지위, 권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현실과 이상 속에서 고뇌한 지식인 이규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안식 가톨릭대학교 인문사회연구소 연구교수
신안식 가톨릭대학교 인문사회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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