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드나이트 스카이의 한 장면
영화 미드나이트 스카이의 한 장면

코로나 블루와 종말 영화
코로나 사태가 해를 넘겨 이어지며 우울증과 같은 소위 ‘코로나 블루’도 일상이 됐다. 만남을 가질 수 없다기보다 만나서는 안 된다는 점이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만든다. 고립감과 외로움이 너무 오래 지속됐다. 1950년대 붉은털원숭이 등의 영장류 실험을 통해 의존 욕구, 사회적 고립, 유년기 모성 분리와 같은 연구를 해 유명해진 미국의 해리 할로우(Harry Frederick Harlow) 박사는 새끼 영장류들을 충분히 돌봐주되 다른 개체와 고립시켜 키우는 실험을 한 바 있는데, 이런 원숭이들은 급격히 신경쇠약 증세에 빠져드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동물 실험이지만, 어차피 이런 종류의 실험을 인간에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보겠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겪고 있는 문제이지만, 감염병의 특성상 해결의 책임은 개인에게 전가돼 있다. 각자 알아서 헤쳐나가는 수밖에 없다. 이런 시기, 여가 활동은 낱말 뜻 그대로의 남는 시간餘暇 활용이 아니라 외로울 겨를 없이 시간과 정서를 촘촘히 채우는 일종의 생존 활동이 된다.

영화관에 가기가 망설여지니 자연스럽게 TV나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한 감상이 늘어나게 된다. 넷플릭스, 훌루와 같은 서비스가 시나브로 현대인의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오게 됐다. 감염병에 대한 다큐멘터리나 전염병의 함의를 가진 좀비 드라마 등 많은 콘텐츠가 코로나 시대를 반영해 기획되고 있다.

감염병 사태와 관련이 없는 콘텐츠들도 코로나 블루라는 코드와 연관돼 읽히는 것 같다. 특히 지구 멸망이나 고립을 다룬 영화들은 공포심과 우울감을 과장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시기에 쉽게 감정이입이 된다. 전쟁으로 멸망해 사막화된 지구에서 생존자들끼리 사투를 벌이는 40년 전 영화 <매드 맥스>(Mad Max) 시리즈도 감염병 창궐의 시대에 다시 보니 더욱 실감 나고, 비행기 추락으로 무인도에 수년간 고립된 사내의 외로움을 다룬 20년 전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 Away)가 던지는 할리우드식 휴머니티 메시지도 뭔가 절절하게 와 닿는다.

실패한 백신 개발이 전 인류를 좀비로 만든 미래, 면역을 가져 혼자만 살아남은 사내의 이야기 <나는 전설이다>(I am Legend)는 감염병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분히 노골적인 카타르시스를 준다. ‘그래도 지구가 멸망하지는 않았잖아. 이만하길 다행이야’, ‘내 곁에는 누군가 있잖아.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하는 식이다.

오락 영화 한 편 보고 이런 정도의 심리적 위안을 얻는다면, ‘남는 장사’ 아닐까. 조지 클루니(George Clooney)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근작 <미드나이트 스카이>(Midnight Sky)도 같은 맥락의 종말과 고립을 그린 SF 영화다. 독특한 점은 ‘자녀를 통한 영생 모티프’가 혼종돼 있다는 것이다.

미드나이트 스카이
2049년 북극의 바르보(Barbeau) 천문기지. 조지 클루니가 분한 오거스틴은 인류가 생존할만한 행성을 찾는데 전 생애를 바친 천문학자다. 젊은 시절 그는 목성의 위성인 K-23을 가능성이 큰 우주 식민지로 지목해서 유명해졌다. 잘 나가는 과학자였고, 그를 존경하는 후학들도 많다. 이제는 늙었다. 게다가 불치병까지 얻었다. 연구중독 학자의 전형으로서, 전 생애를 천체망원경과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지내는 바람에 가족도 없다. 인류에 기여한 과학자로서의 공로는 인정되지만, 타의 모범이 되거나 부러움을 살만한 인생을 살지는 못했다.

그래서 말년이 쓸쓸하다. 혼자 의무실의 의료기구에 누워 스스로 기계를 조작해 혈액 투석을 하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그런 노인네가 되고 말았다. 메마른 숨을 내쉬며 투석기의 펌프질이 끝나기를 의미 없이 기다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한 다리씩 걸친 채 주저앉아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공허하게 흘려보내는 외로운 영감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구가 멸망하게 됐다. 지표면이 이온화 방사선에 노출돼 생명이 살 수 없는 죽음의 행성이 돼버린 것이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소개령이 내려져 북극 천문기지에 살던 과학자와 군인, 가족들이 모두 헬기를 이용해 황급히 탈출한다. 영감에게는 차라리 잘 됐다.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그냥 혼자 남겠다고 한다. 고집불통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굳이 말리는 사람도 없다. 혼자 남아서 무얼 하겠다는 것인지 묻는 이도 없다. 그렇게 영감은 혼자 북극에 남게 된다.

영화 미드나이트 스카이의 한 장면
영화 미드나이트 스카이의 한 장면

그런데 진짜 영감은 무슨 생각으로 눈보라 치는 북극에 혼자 남은 것일까. 병이 도져 죽건 방사선을 뒤집어쓰고 죽건 곧 죽을 것이 확실한 상황이므로, 인생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겠다는 의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누군가 이런 고립무원의 상황에 내던져진다면, 대체 어떤 방법으로 인생을 정리할 수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며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무엇이 하고 싶을까.

흥미롭게도, 영감은 천체망원경과 연결된 컴퓨터 네트워크로 무언가 작업을 한다. 위성 지도를 모니터에 올려놓고 현 위치를 파악한다. 안테나로 우주의 누군가에게 무언가 신호를 보내려고 하는 것 같다. 영감은 평생 해 왔던 것과 같이 작업에 완전히 몰두한다. 그때, 갑자기 화재 경보가 크게 울린다. 놀라 부엌으로 뛰어가 보니 레인지에 불이 나서 팬과 음식이 타고 있다. 소화기로 급하게 불을 끈다.

영감은 온몸에 힘이 다 빠져버려 벽에 기댄 채 천천히 주저앉는다. 음식을 올렸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까지 고장 나버린 것인가. 아직 할 일이 남았는데. 아직은 죽으면 안 되는데. 실의에 빠져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든다. 맞은편 조리대 아래에 일곱 살쯤 된 여자아이가 웅크리고 앉아있다. 의미 해독에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이내 영감은 “안돼!”하고 신음을 내지른다.

“여기는 바르보 천문대! 탑승 못 한 가족이 있으니 누가 데려가기 바란다! 7, 8세의 신원 미상의 여자애다. 누가 좀 와서 아이를 데려가기 바란다! 아무도 없나?”

영감의 다급한 무전에 응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머리가 아프다.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영감은 나름대로 ‘최후의 미션’을 스스로에게 부과하고 수행하는 중이다. 어린아이 건사는 불가능하다. 게다가 자신은 병자이고, 곧 죽을 목숨이다. 여러모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꼬맹이는 청소년도 아니고 어린아이다. 누군가 어른이 돌봐줘야만 하며, 어른은 자신뿐이다. 하지만 죽기 전에 집중해서 해야만 할 일이 있다. 영감은 머리가 아프다.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이에게 밥을 먹인다. 아이는 말을 다 알아듣지만, 말을 하지는 못한다. 대신 그림을 그린다. 붓꽃이다. 영어로 아이리스(Iris)다.

“네 이름이 아이리스야?”

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영감은 놀란 표정이다. 이때 컴퓨터 음성이 들린다. 에테르(Aether)호와 교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영감의 표정은 다시 과학자로 돌아간다. 영감이 하고자 했던 일이 밝혀진다. 에테르라는 우주왕복선과 교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영감이 아무리 시도해 보아도 통신은 두절 상태다.

에테르호는 영감이 한창때 우주 식민지, 즉 제2의 지구로 지목했던 K-23을 2년간 탐사하고 돌아오는 중이다. 승무원은 선장을 포함해 다섯 명. 그중 선장의 아이를 가진 설리반도 있다. 통신 담당이다. 중년의 항해사는 지구의 가족이 너무 보고 싶고, 통신기기를 담당하는 중년 남성과 젊은 여성은 아빠와 딸 비슷한 관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구와 교신이 끊겼다. 그래서 지구가 멸망해버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선장은 음성 항해일지를 녹음한다.

“탐사는 성공적이었다. 질문보다 더 많은 해답을 안고 귀환하는 중이다. 그곳에 생명체가 살 수 있나? 그렇다. 확장이 가능한가? 그렇다. 제2의 지구가 될 수 있나(could it be home)? 그렇다. 다 좋은데, 어째서 지구와 교신이 되지 않는 걸까?”

영감은 에테르호에 지구의 사정을 알리려고 애쓰는 중이다. 그러다 갑자기 토악질을 한다. 늙고 병드는 것은 참으로 구질구질하다. 죽지 않으려고 투석질을 하고, 갑작스레 오심이 오면 변기에 머리를 박고 곧 죽을 것 같은 소리를 내며 토악질을 한다. 인상을 쓰고 숨을 헐떡이며 식사를 하고, 그리고 통신 일에 몰두한다. 잠자리에 들 시간. 여자애가 영감의 방에 들어와 구석에 침낭을 펴고 자려고 한다. 꼬맹이가 무섭고 외로우니까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영감은 질색을 한다.

“안 돼, 안 돼! 여긴 ‘내 방’이라구!”

그리고 아이를 옆방으로 보내고 돌아와 침대에 눕는다. 질색이다. 아까 낮에도 그랬다. 아이가 교신 센터의 통신 장비가 궁금한지, 이것저것 허락도 없이 막 만졌다. 영감은 손대지 말라고 단호하게 주의를 줬다. 영감은 이런 게 싫다. 누가 자신의 일을 방해하고, 몰입을 깨뜨리고, 지식이 없는 사람이 기계나 도구를 만지고, 사소하더라도 내 영역을 침범하는 이런 일들이 너무 싫다. 영감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겸비한 그런 사람이었다. 이러니 정상적인 사회생활은 물론이고, 연애와 결혼을 할 수 있었을 리 만무하다.
아니다. 사실은 영감의 인생에 딱 한 명의 여자가 있었다. 젊고 잘나가던 시절, 자신의 학술발표에 반한 여자였다. 깊은 관계를 가졌지만, 남자는 지독한 일벌레였다. 여자를 돌보지 않는다. 외도나 다름없다. 딴 여자 대신 외계 행성과 바람이 난 것이다. 여자는 임신이 아니니까 안심하라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뒤 둘 사이에 딸이 있음을 알게 된다. 남자는 딸아이를 만나지 않는다. 영감은 그런 사내였다.

영화 미드나이트 스카이의 한 장면
영화 미드나이트 스카이의 한 장면

영감은 그 여자아이, 즉 자신의 딸이 에테르호에 탑승한 설리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영감은 지금, 딸에게 지구로 돌아오지 말고 새로 발견한 제2의 지구로 돌아가라고 알려주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종말과 인생의 마지막이 함께 들이닥치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자신의 핏줄을 살리는 것으로 정한 것이다.

번식에 대한 생명체의 본능일까. 평생 돌보지 않았으면서 이런 것도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양심의 가책 때문일까. 회한이나 후회를 안고 무덤에 들기가 두렵기 때문일까. 무엇이건 간에 영감은 이 일을 해야만 한다. 이때, 아이가 슬그머니 문을 열고 다시 들어와 구석에 자리를 펴고 눕는다. 어쩌겠나. 할 수 없다.

영감은 에테르와의 통신 두절의 원인을 알아낸다. 바르보 천문대의 안테나가 너무 약한 것이다. 더 크고 강력한 안테나가 필요한데, 하겐 호수 기상 관측소에 있다. 문제는 너무 멀리 있다는 것이다. 아이가 부담이지만 가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아이는 영특하다.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둘은 북극의 지독한 추위 속으로 걸어 나간다.

모터 썰매를 잃어버리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둘은 죽을 지경이 된 상태에서 걷고 또 걷는다. 굶주린 북극 늑대들이 둘의 죽음을 기다리며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위험한 곳이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걷지만, 곧 식량이 떨어진다. 거기에 매서운 바람까지 불기 시작한다. 사방이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북극의 허허벌판에서 찬 바람까지 불면 대책이 없다. 둘은 눈을 파고 들어가 꼭 껴안고 쉰다. 둘은 점점 더 서로에게 의지한다.

기상이 더욱 악화된다. 이제는 눈보라가 몰아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걷지 않을 수 없다. 그때, 또다시 늑대가 어렴풋이 보인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짐승들이 공격해오면 속수무책이다. 영감은 아이를 보호하려고 총을 들고 늑대를 겨냥하려 한다. 눈 폭풍이 몰아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을 감는 것과 뜨고 있는 것이 차이가 없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가 없다. 이름을 불러 보지만 대답이 없다. 사라져버렸다. 눈보라에 파묻혔나. 늑대가 잡아갔나. 사방팔방을 둘러봐도 매서운 눈 폭풍만 하얗게 몰아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절망에 사로잡힌 영감은 눈밭에 쓰러져 절규하며 울음을 터뜨린다. 아이가 사라졌다. 아이를 놓쳤다. 아이를 잃어버렸다. 그때, 영감은 환영을 본다. 자신이 사랑했던 유일한 여자의 젊은 시절이다. 환영이 있던 자리에 아이가 서 있다. 영감은 아이를 부둥켜안고서 안도와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우여곡절 끝에 하겐 호수 기상관측소에 도착한 영감과 아이는 에테르호와 교신을 시도한다. 드디어 딸인 설리반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자신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밝히지는 못한다. 설리반은 과학자로서의 영감을 잘 알고 있다.

“전 박사님 덕분에 우주 프로그램에 참여했어요. 제 어머니와 함께 일하셨죠. 월석을 주셨잖아요. 그런 놀라운 걸 더 찾고 싶어서 우주인이 되기로 했어요.”

영감은 눈물을 흘린다. 월석을 유산으로 물려주어 딸의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딸을 멸망한 지구가 아닌 제2의 지구로 돌려보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했다. K-23 위성은 어떤 곳이냐는 질문에 딸은 “땅속에서 싹이 움트길 기다리는 소나무 향이 나는 곳”으로 묘사한다. 차마 아비라고 밝히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죽기 전에 목숨을 걸고 아빠 노릇을 했다. 그리고 그 보상으로 종말을 맞이한 지구의 북극에서 우주에 있는 사랑하는 딸과 대화를 하고 있다. 마지막 인사를 하며, 딸은 성이 아닌 이름을 밝힌다.

“제 이름은 아이리스에요.”
“알고 있소.”

그때 비로소 영감은 우여곡절을 함께 했던 꼬마 여자아이 아이리스가 사실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딸의 어린 시절 이미지로서, 자신이 만들어낸 환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죽음이 임박하고 지구가 종말을 맞이하는 마지막의 순간이 새로운 시작인 삶으로 이어지는 기적의 연계 고리는 결국 자녀인 것이다.

영화 로드의 한 장면
영화 로드의 한 장면

지구의 종말과 자녀
노스트라다무스류 종말 예언자들의 활약에서 보듯, 지구 종말 모티프는 매우 오래된 것이다. 미륵 사상이나 기독교의 지복천년설 등 종교적인 모티브가 영향을 미쳤다. 근현대 SF 소설에서도 1894년도에 이미 25세기 지구와 혜성의 충돌을 그린 프랑스 소설가 카밀 플라마리옹(Camille Flammarion)의 <세계의 종말>(La Fin du monde)과 같은 작품들이 있었다.

지구의 종말 이야기에 자녀를 중요하게 등장시키는 작품들이 있다. 대게 자녀는 삶과 미래에 대한 희망의 상징이며, 따라서 영생永生 욕망의 허구적 실현이다. <미드나이트 스카이>도 그런 작품이다.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인터스텔라>(Interstellar)도 있다. 국내에서 천만 영화가 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서도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으나, 한국에서의 성공은 특히 도드라졌다. 원인 분석에서 많은 이들이 SF 영화임에도 부녀간의 사랑이 이야기 전개의 핵심적인 모티브였다는 점을 들었다.

미국 소설가 코맥 맥카시(Cormac McCarthy)의 걸작 <로드>(The Road)가 아마도 이런 이야기 중 가장 높이 평가받는 작품일 것이다. 2007년 퓰리처상 소설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동명의 영화도 제작됐다.

지구가 멸망해 재로 뒤덮인 미래의 미국,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인적 없는 고속도로를 걷고 있다. 어머니는 얼마 전 자살했고, 심각한 기침 증세를 보이는 아버지는 스스로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아버지는 혹독해진 기후 탓에 북쪽에서 겨울을 날 수 없음을 알게 돼 아들과 함께 남쪽으로 향하는 중이다.

둘은 약간의 먹거리를 배낭과 쇼핑 카트에 넣어 이동하며, 되는대로 필요한 음식과 물건을 조달해야 한다. 약탈자와 살인자, 심지어 식인을 일삼는 무리가 들끓는 곳이니 안전은 전혀 담보할 수 없다. 리볼버 권총에 의지하지만, 총알은 두 세트밖에 없다. 아버지는 식인종으로부터 위협을 당하면 쓰라고 당부하며 아들에게 총 쏘는 법을 가르친다.

부랑자와 약탈자들의 위협이 이어진다. 아들은 너무 어리고 아비는 병들었으며, 세상은 살아남기에 너무 거칠다. 약탈자들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어린 아들은 붙잡히게 되고, 아버지는 불가피하게 약탈자를 사살한다. 약탈자의 동료들이 추격해오자 둘은 귀중한 음식들을 다 버리고 도망쳐야만 한다.

이야기는 너무나 리얼하다. 세상이 멸망하면 오직 생존만이 목적이 되고, 삶은 비루하고 일상은 구질구질해진다. 배가 너무 고파 위험을 무릅쓰고 어느 집에 몰래 숨어 들어가 음식을 찾다가 보니 일군의 사람들이 시체를 먹고 있다. 너무 놀란 부자는 숲으로 도망친다.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러 겨우 음식을 구하게 되지만, 아버지의 병세는 점점 악화된다. 건강을 지킬 수 있을 리 만무한 환경에서, 아이마저 병이 든다. 그 와중에 도둑이 카트를 훔쳐 간다. 아버지는 도둑에게 총을 겨누고 옷과 구두를 모두 벗게 한 다음 쫓아낸다. 이 광경을 본 아들은 심각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게 된다. 아버지는 할 수 없이 돌아가 옷과 구두를 도로에 가져다 놓지만, 도둑은 사라지고 없다.

남쪽으로 향하던 둘에게 이번에는 숨어있던 웬 약탈자가 화살을 쏜다. 총으로 반격하며 달아나지만 다리에 화살을 맞은 아버지의 병세는 급속히 악화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죽기 직전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이 없더라도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야 한다고 가르치고, 아들은 아버지를 원망한다.

“절대 저를 떠나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알아. 미안하다. 내 온 마음은 너한테 있어. 내가 여기 없어도 나한테 얘기할 수는 있어. 너는 나한테 얘기할 수 있고 나도 너하고 이야기를 할 거야. 두고 봐.”
“제가 들을 수 있나요?”
“그래. 들을 수 있지. 네가 상상하는 말처럼 만들어야 돼. 그럼 내 말을 듣게 될 거야.”

아버지가 죽고, 아들은 사흘 동안 울면서 시체를 지키다가 위험이 도사리는 황량한 거리로 나섰다. 그의 앞에 총을 든 다부진 외모의 사내가 나타난다. 그는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확신시키고, 가족에게 데려가 어린 아들을 보호해준다.

이 소설은 읽는 내내 매우 불편하며, 그것이 작가의 목적이다. 세상의 종말이라는 극한의 상황에 던져졌기에 부모 자식 관계의 묘한 특징은 노골적으로 전경화된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무슨 짓이든 하려고 든다. 왜 그러는걸까? 이는 이타적 행위일까, 이기적인 것일까?

인류학자이자 문화유물론자인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는 저서 <작은 인간>(Our Kind)에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우리 안에 이기적 유전자가 있어서 아무리 많은 대가를 치르더라도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종족을 번식시키도록 강요한다고 생각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며, 오히려 “부모와 어떤 유전적인 관계도 없는 입양아를 자기의 핏줄과 똑같은 정성을 들여 기르는 까닭”에 대해 고찰해 보는 것이 해답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 본성에 또 하나의 생물심리적 요소를 상정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탁월하게 충족시켜주는 것은 부모의 종족 번식 욕구가 아니라 소중하고 만족스러운 존재와 친밀하고 사랑스러운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구이다.”

또, “부모가 아이에게 쏟아붓는 사랑에는 언젠가 그만한 사랑을 되돌려받을 수 있으리라는 문화적 기대가 깔려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불과 두 세대 전만 해도 자녀는 일종의 노동자산이었다. 현대적 의미의 자녀에 대한 사랑과는 다른 방식의 폭력적 훈육도 일상이었다. 그러니까 자녀에 대한 헌신적 사랑은 완전히 생물학적 본능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종의 교환에 대한 기대에서 비롯된 것이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인데, 교환의 ‘품목’이 노동생산물에서 사랑이나 친밀한 관계 형성에 의한 만족과 같은 심리적인 것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공적인 ‘교환’ 방법을 습득해 사랑에 대한 욕망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능력 있는 부모가 되는 것이 관건이다. 상식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어릴 때부터 사랑을 충분히 베푸는 것이다. 최소한,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아동발달 심리학자 티파니 필드(Tiffany Martini Field)는 미숙아들에 대한 실험에서, 하루 세 차례 15분씩 마사지를 받은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을 비교했는데, 부드러운 마사지를 받은 아이들은 비교군에 비해 몸무게가 47%나 빨리 늘어났고, 6일 먼저 퇴원했다고 한다. 사랑과 돌봄은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들마저 성장시키는 강한 힘이 있다. 반면,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미숙아로 머물게 된다.

종말, 고립, 자녀 코드의 영화는 코로나 블루로 고통받는 시기, 사랑이 가진 치유의 힘이라는 고전적인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김기홍 한성대학교 크리에이티브인문학부 교수
김기홍 한성대학교 크리에이티브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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